평신도를 위한 세계 교회사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19) 중세의 여명(AD400-590)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19)
중세의 여명(AD400-590)

기독론 논쟁의 결론을 내린 칼케돈 종교회의(Council of Chalcedon, 451)
기독론 논쟁의 결론을 내린 칼케돈 종교회의(Council of Chalcedon, 451)

1. 교회로 밀려들기 시작한 세속의 물결
2. 야만족들의 침입
3. 수도원 운동과 초기선교
4. 아일랜드를 복음화 한 패트릭
5. 유럽 선교의 전진기지가 된 아일랜드
6. 이태리반도의 수도원운동 태동

7. 교리논쟁의 점화(지난 호 계속)

논쟁은 뜨겁게 점화되어 국민들은 황실을 반대하고, 알렉산드리아는 콘스탄티노플을 대항하여 일어났다. 결국 유티케스(Eutyches, 380-456)가 파문되었다. 그러나 그는 디오스코러스와 황제 그리고 교황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에 디오스코러스는 유티케스의 무죄를 선포하였고, 유도키아는 그녀의 남편인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를 설득시켜 회의를 재개하도록 종용하였다. 당시 교황이었던 성 레오(St. Leo, 400-461)만이 유티케스의 요청을 거절하고 레오의 톰(Tome of St. Leo, Dogmatic Epistle)이라는 명칭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가톨릭 입장을 이렇게 천명하였다. “예수 안에는 오직 하나의 위격(one person)만 존재하며 이 유일한 하이포스타시스(hypostasis) 안에 양성 즉 신성과 인성이 있다. 그리고 각자는 그것의 질(qualities)과 기능(faculties)을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결국은 유티케스의 청이 받아들여져 단성론을 채택한 강도들의 회의라고 불리는 에베소회의(Brigandage of Ephesus, 449)가 개최되었다. 폭도들과 경찰들이 이 회의에 개입되었고, 단성론을 지지하는 환상파 수도승들도 가담하였다. 이들은 정통 신앙을 수호하기 위하여 항의하는 정통파 신자들을 무차별로 황제에게 끌고 갔으며, 이때 유세비우스(Eusebius)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인 플라비안(Flavian)도 끌려갔다. 플라비안은 폭도들에 의해 살해 되고, 교황 사절은 용케도 도주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분개한 교황 레오는 이 강도회의를 저주하고 새로운 회의를 열도록 명령하였다. 마침 그때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황실에서 유일하게 정통 신앙을 고수하던 황제의 여동생 풀케리아(Pulcheria)의 남편인 마르키안(Marcian, 396-457)이 황제 위를 승계함으로 451년 역사적인 칼케돈 종교회의(Council of Chalcedon, 451)를 열 수 있었다. 600여 명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칼케돈 종교회의에서는 단성론을 공식적으로 저주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공교회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선포 하였다.

“우리는 한 분이시고 동일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 분 안에 양성이 있음을 인정하며, 그 양성 안에는 혼돈(confusion)이나 변형(transformation)이나 나눔(division)이나 분리(separation)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양성간의 다른 점들이 양성의 연합 때문에 결코 압제 당하지도 아니한다. 도리어 각 성(nature)의 속성(attributes)이 하나의 유일한 위격 안(one persona)에 보존되고 존재하고 있다.”

이리하여 네스토리우스나 유티케스의 이론과는 거리가 먼 그리스도에 대한 정통파의 진리가 결론 지워져 공교회 기독론의 근간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동방교회에서 일어난 교리 논쟁의 결과는 동서교회가 갈라서게 되는 앙금을 만들어 냈으며, 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간의 주도권 싸움을 위한 역사의 질곡(桎梏)을 깊게 했다.

3002342무엇보다도 칼케돈 종교회의(Council of Chalcedon, 451)를 통해 이러한 앙금이 보다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칼케돈 종 교회의는 사실 교황 레오의 승리였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신이 회의 소집을 종용하였고 또 자신의 교리칙 서(Tome)가 이단인 단성론자를 대항한 정통파의 신조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칼케톤회의가 선포한 기독론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사절 중의 한 사람은 그를 모든 교회의 총대 감독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동방교회(Orthodox Catholic Church)의 감독들은 이러한 로마 교황청의 야망과 우월감을 거부하였고, 로마 교황 사절들이 결석한 틈을 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위치를 로마의 위치와 뒤집는 작업을 하고 문서를 통해 이를 확정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콘스탄티노플이 제국의 수도라는이유 때문에 옛 로마의 권좌에 권력이 주어진 것처럼 동일한 이유로 새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의 권좌에도 동일한 권력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이들은 콘스탄티노플의 권좌를 메트로폴리탄적(metropolitanism) 성격으로 규정하면서 비잔틴 제국 내의 지역교회에 대한 통치권을 함께 누리도록 결정해 버렸다.

그러므로 이를 저지하기 위한 교황 사절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교황 레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레오는이 사실을 마르키안 황제와 풀케리아에게 ‘교회의 평화와 하나 됨을 파괴하는 무모한 노력’이라고 항의하면서 상소했으나 황제로부터의 반응은 끝내 없었다.

칼케돈 종교회의 이후에도 교리 논쟁의 부활과 함께 동서교회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사건은 지속되었다. 이는 471년 아카시우스(Acacius)가 콘스탄티노풀의 총대 주교로 임명되면서 시작되었다. 황제 레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에는 칼케돈의 결정을 수호했던 아카시우스가 새로운 황제 제노의 종교정책 변경에 편승하여 단성론 지지자가 되어버렸다. 사실 알만족의 위협과 내분에 시달리던 제노(Zeno emperor, 425-491) 황제는 제국 내의 지역적 분열을 없애고 평화를 유지하여 국력 신장을 가져오기 위해 단성론과 정통파의 갈등을 정치적으로 화해시키려고 했다. 이때를 기해 아카시우스는 제노 황제를 동조함으로 정치적 지원을 받아 동로마제국 내의 모든 교회를 장악하는 일종의 비잔틴 교황의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므로 단성론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피터 몽기우스(Peter Mongius)와 화해하고 많은 의견에 서로 동의하였고 이를 근거로 제노는 482년 자신의 이름으로 통합칙령(Edict of Union)을 선포하였다. 이 칙령에서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가 다시 파문되고 그리스도의 양성이 다시 확인되기는 했지만 모두들 모호한 용어로 재정리되어 사실은 칼케돈의 결정을 포기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아카시우스와 몽기우스는 자신들이 서명한 통합칙령을 받아들이기를 반대하는 모든 감독들을 그 직위에서 쫓아내 버렸다. 이리하여 정치적 힘에 의해 동방의 중요한 4대 교구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졌으며, 제국내의 교리 분쟁이 이로 인해 일단락 된 것처럼 보였다.

중요한 것은 통합칙령에 대한 서방교회의 반응이었다. 교황 심플리시우스(Simplicius, ?-483)와 그의 후계자인 펠릭스 3세(Felix, 재위 483-492)는 크게 분노하여 부동의 자세로 동방교회의 만행을 항의하였다. 비록 교황 사절들은 폭력에 의해 저지당하고 뇌물에 매수당하기도 하였지만, 교황 자신은 견고하여 종국에는 아카시우스를 파문시키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동시에 이 칙령에 서명한 모든 주교들을 그 직위에서 파문시켰다. 이에 분개한 아카시우스도 펠릭스를 파문시켰다. 이 비극적인 동서간의 드라마는 이후 36년간 더 지속되었던 것이다.

491년 제노의 황제 위를 승계한 아나스타시우스 1세(Anastacius, 491-518)도 초기에는 중도 입장을 취하다가 점차 단성론자를 지지하면서 칼케돈주의를 따르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유페미우스(Euphemius, 490-496)와 마케도니우스(Macedonius, 496-511)의 직위를 박탈하고 유배시켜 버렸다. 그리고 단성론자인 세베루스(Severus)를 지지하였다. 이에 안디옥 주교인 플라비아누스(Flavianus, 498-512)도 세베루스에 의해 축출당하고 정통 신앙을 수호하던 열성적인 수도승들과 성직자들이 무차별 피살되었다.

이에 로마의 교황 호르미스다스(Hormisdas, 514-523)는 박해 중지를 명하였고, 이에 불복하여 518년 황제가 죽기까지 동서의 갈등과 분쟁은 계속되었다. 그 뒤에 518년 저스틴 1세(Justin, 518-527)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상항은 바뀌어 다시 정통 신앙이 보호를 받고 단성론자들이 박해받기 시작하였다. 이에 로마의 호르미스다스 교황은 사절을 파송하여 분쟁을 종 결시키고 정통신앙을 지킬 것을 지시하였다. 그는 사절을 통하여 선포하기를 우리는 의논을 하기 위 한 목적으로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 사도직 (Apostolic)과 화해하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받아 들여야 할 범식(formula)을 전달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였다.

Hormisdas(514-523)
Hormisdas(514-523)

이로 인하여 단성론자들은 그 직위에서 축출 당하고, 모든 주교들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이 범식에 서명을 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결국 제노와 아나스타시우스 황제까지도 이단으로 정죄되어 교회의 명기록(marble tables)에서 그들의 이름이 삭제되었다. 이렇게 단성론 논쟁은 베드로의 후계자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것이 동서간의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소시키는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결국 동서간의 분파의 근본적인 문제는 치유되지 아니한 채 분쟁의 불씨를 안고 동서교회는 중세의 역사 속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글쓴 이 / 심창섭(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

< 참고자료 >
단성론(單性論, Monophysitism)

1.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이 아닌 오직 하나(monos)의 본성(physic)만 가졌다고 보는 주장이다.
2. 제4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칼케돈 공의회, 451)는 그리스도의 양성(신성과 인성)을 강조하여 단성론을 부정하였다.
3. 칼케돈 공의회 이후 단성론은 유티케스(Euthyches, 378경-454), 줄리안 (Julian of Halicarnassus)을 따라 그리스도의 인간적 몸은 신성과 완전히 결합, 변화하여 부패하지 않게 되었다고 본 가현론자와 안디옥의 세 베루스(Severus, 460경-538)를 따라 두 본성은 단지 관념에 불과하고 그 본성은 우리의 본성처럼 타락할 있다고 본 세베루스주의자로 나누 어졌다.
4. 이들 견해는 아직도 시리아의 야코부스파(Jacobite)와 이집트의 콥트 (Coptic) 교회(콥트 교회도 단성론파, 칼케돈 공의회 지지파, 동방 카톨릭 콥트파, 이 디오피아 정교회 등의 네 분파가 있는 데 여기서는 단성론을 지지하는 콥트 교회를 말함), 이디오피아 교회들의 해석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