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21) 중세 초기의 역사(540-604)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21)
중세 초기의 역사(540-604)

1. 교황 그레고리 1세
교황 그레고리 1세(Pope Gregory I, 540-604)는 540년 경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의 소년 시절은 전쟁의 회오리바람으로 로마와 이탈리아가 황폐해가고 팔라틴 언덕(Palatine Hill)의 관청에 소수의 관리들만 남아 있었으며 이교도의 사원과 신전들도 잔재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다섯 개의 교회당만이 공적인 예배 장소로 허용 된 때였다.
그레고리의 부모는 로마 원로원에 속했던 경건하고 부유한 사람이었고 그레고리는 인문학의 3과(논리학, 변증학, 수사학)를 수학하였으며 라틴어를 배웠다. 그가 로마 시의 관리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롬바르드족(Lombard)이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했는데 그들은 계속 남하하여 573년 로마 시 자체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로마가 위협을 당하고 있을 때 그레고리는 로마의 시장 직을 맡고 있었다.
그의 업무는 로마 시를 관장하고 원로원의 의장직도 겸하면서 로마 시의 100마일 이내의 지역을 돌보며 로마 시민들을 위한 양식 공급과 상하수도의 관리와 티베르 강의 관개시설 관리 등을 맡고 있었다. 이렇게 그레고리는 정치적 기반을 다지며 최고 행정관인 라벤나(Ravenna) 총독의 야망도 가질 수가 있었으나 그는 기독교의 완전성을 추구하기로 결단하고 모든 세속적 욕망을 포기하였다.
그래서 그는 574년 시실리 섬에 있는 자신의 유산을 팔아 6개의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또 카알리안에 있는 자기 부모의 저택을 수도원으로 전환하여 자신과 모여든 수도사들의 거처로 삼았다. 그는 세상을 떠나 기도와 명상의 수도생활에 매력을 느낀 것으로 자신의 편지에 고백하였다.
“나는 언젠가 수도원에 있든 날들을 슬픔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명상을 통하여 죽어가고 멸망하는 모든 사물들을 초월 높이 날아올라 천국의 일들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았다. 나의 영혼은 비록 몸에 갇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감옥을 뛰어 넘었으며 나는 죽음을 진정한 생명으로 통하는 길로 사모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이러한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마치 두고 온 해안을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한숨을 짓곤 하였다.”
그레고리는 4년간의 수도원 수업을 통해 중세 역사의 축(軸)을 형성할 수 있는 경험을 갖게 되었다. 579년 그레고리는 수도원에서 교황의 불림을 받고 교황의 7번째 집사가 되었다. 이듬해 그는 교황 펠라기우스의 사절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었다. 그의 임무는 당시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약탈하고 있기 때문에 동로마 황제로부터 군사자금 원조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이때 서로마를 통치하기 위해 동로마의 황제가 파송한 라벤나의 총독은 아무런 힘이 없었기에 이러한 조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레고리는 이 외교활동에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으나 그곳에서도 호화로운 왕궁에 머물기 보다는 개인적으로 수도원적인 생활을 했다. 이전의 서방에서 그와 함께 있던 수도사들이 여기까지 동행하여 그와 함께 지내곤 했다. 임무를 마치고 로마로 다시 돌아온 그는 계속 교황의 집사로서 충실히 봉사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수도사들에게 강해설교 했던 욥기를 재편집하여 ‘대도덕’(大道德, Magna Moralia)이라는 책을 발행했다. 그의 이 저서는 나중에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노예시장의 한 백인 앵글리안(Anglian) 노예 소년의 외모에 반하여 그 노예 소년의 고향 이교도 앵글리안들을 위한 선교 에 헌신할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로마는 롬바르드족의 위협과 페스트가 유행하여 전염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교황 펠라기우스 2세도 이병으로 사망하였는데 590년 당시 로마 시민들과 성직자들은 그레고리가 극구 사양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교황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통치기간의 시대적 상황은 과히 종말론적이었다. 롬바르드족의 지속적인 침공으로 언젠가 로마 시는 멸망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으며 유행병이 창궐하여 로마 시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사람들이 롬바르드족에 잡혀 노예로 끌려가고 있었고 식량은 태부족이었으며 살만한 거처지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이 임했다고 생각했다. 교황 그레고리 자신도 종말론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다. 한 귀족이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여! 그대는 왜 이 세상이 곧 종말을 맞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매일 만물들은 그 끝을 향해 보다 가까이 가고 있으며 우리들은 영원하고 무서운 심판관 앞에서 맞을 재판으로 이끌려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그의 재림 외에는 더 생각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들의 생애는 마치 항해(航海)와 같다. 승객들은 안거나 서거나 누워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항상 그들은 배가 움직이는 만큼 움직이고 있다. 우리도 모두 이와 마찬가지이다. 자고 깨고 침묵하고 말하고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를 막론하고 원하거나 원치 아니하거나를 막론하고 매일 매순간 우리들은 종말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종말론적 신앙은 염세적이거나 현실을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태도로 나타나지 않고 도리어 종말의 임박을 확신함으로 헌신적으로 일할 수 있는 추진력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재직 시에 정말 성경대로 공의와 질서를 사랑하고 평화를 뜨겁게 추구하면서 그에게 맡겨진 소임을 다하였다. 우선 그는 로마 교구의 위상을 높여서 로마 교황청이 중세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제도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는 이전에 황제의 세속 정부가 관장하던 몇 가지 일들을 자신의 감독 하에 교황청이 담당하게 했는데 즉 로마 교구에 속한 재산관리를 교황청의 권한으로 교황청에 예속시켰다. 당시 로마 교구의 유산은 이탈리아의 중남부와 지중해의 도서를 포함해서 방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롬바르드족의 침입으로 인해 제국의 행정력이 마비되었고 황제가 파송한 라벤나의 총독이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레고리는 이러한 정황 가운데서 세속 관리들의 임무를 성직자들이 담당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교회가 곡물과 각종 자원을 정부 대신 공급하게 되었고 토지세도 교회에서 직접 징수하게 되었다. 또 세속관리들이 빈농들을 억압하는 것을 교회가 중재하여 해결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는 로마 교황청의 권위를 높이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레고리는 또 로마 시를 구원하기 위해 롬바르드족과 불가침 협약을 할 만큼 정치적인 역량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때문에 생긴 가난과 난민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구제사업의 공적을 올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또한 일곱 집사를 통하여 일반구제를 담당하게 하였다. 병자, 나그네, 고아, 무숙자 등은 교황청에서 유지하는 병원에 수용시켰다. 교회에 헌물 하는 곡물들(포도주, 치즈, 채소, 베이컨, 생선, 기름 등)을 빈민들에게 배급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교회는 전 로마 시를 먹여 살리는 공급자로 인식되었다. 이것이 결국 교황의 정치적 권한과 영항을 확보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레고리는 또 교회의 예배 갱신하여 복잡했던 예배의식을 통일하였다. 그가 시작한 그레고리 성가는 중세 교회음악과 예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비록 그가 전통적인 음악체제나 예배의식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는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직접 스콜라 칸토룸의 소년 성가대를 감독하고 지휘하였다. 그레고리의 이러한 행적에 대한기록이 후대의 기록이라고 해서 우리가 믿지 못할 것은 아니다. 그레고리는 또 목회자들의 지침서인 ‘사목 법규’를 만들어 성직자들의 자질 향상과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레고리의 업적 중 가장 뜻 깊은 업적은 영국의 전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레고리는 596년 어거스틴을 영국의 켄트베리에 전도자로 파송하여 앵글로 색슨족의 개종을 시도하였다. 당시 켄트지역을 다스리던 에델베르트 왕은 이미 기독교인이었던 아내 베르타의 간청으로 어거스틴 일행에게 전도의 기회를 허락하였다.
이렇게 그레고리 1세가 직접 파송한 선교사에 의해 개종된 앵글로 색슨족은 로마 교황청에 충성하게 되었고 종국에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수도원들이 로마에 귀속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결국 아일랜드 수도원의 기독교와 영국의 로마식 기독교 이 두 조류의 기독교가 결합되어 나중에는 역으로 유럽 대륙 선교 열을 가중시켰다. 이들의 선교 활동이 후에 유럽이 기독교로 개종되는 물줄기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는 그레고리 1세의 선교 비전의 결실이기도 하였다.
그레고리의 1세의 이러한 업적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로마 교구와 교황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로마 교구는 모든 교회들의 으뜸이요 그 주교는 모든 교회를 다 책임지는 인물’이라고 생각하였다. 로마 교회가 유럽 교회의 전체의 오류와 잘못을 교정해야 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식이 심겨졌다. 특히 그레고리 자신이 이러한 신념을 갖고 있었으며 종교 회의의 칙령들도 ‘사도 교구(로마 교구)의 인정 없이는 권위가 없다.”라는 의견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그레고리 1세는 사실 중세의 기초를 튼튼히 구축하고 중세 교회를 잉태시킨 주된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다.(*) 글쓴 이 / 심창섭(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