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 교회사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22) 중세 초기의 역사(540-604)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22)
중세 초기의 역사(540-604)

Map of Europe about 500 A.D.
Map of Europe about 500 A.D.

2. 대륙의 선교

중세 초기 기독교신앙이 지중해로부터 유럽대륙으로 옮겨가는 과정은 점진적이고 극적이었다. 중세 초기는 클로비스 왕(Clovis, 466-511)의 개종으로 정통신앙을 수용한 프랑크 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야만인들은 울필라스(Ulfilas, 311-383) 등의 선교로 인해 아리우스파 신앙에 젖어 있었고 앵글로 색슨족이 이교도로서 브리튼 본토에 정착하게 된 시점이었다.

그래서 그레고리가 교황 직에 올랐을 때는 브리튼의 기독교인들은 브릿타니, 콘월, 웨일스, 스트라스클라이드 지방으로 쫓겨 난 뒤였다. 그리고 중부 유럽과 발칸반도에 이르기까지는 이교도의 지역이었다. 울필라스에 의하여 아리안주의 기독교로 전도 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지역도 소멸된 상태였다. 한편 유럽의 북부 지역은 전도가 늦어졌다. 스웨덴은 9세기, 노르웨이는 10세기에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 어거스틴의(Augustine, 354-430) 선교

중세 초기의 선교 역사는 영국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영국 전도의 점화는 그레고리 교황 1세가 파송한 어거스틴에 의해 이뤄졌다. 어거스틴은 잉글랜드의 남동쪽 켄트 지방에서 선교를 시작했고 동북쪽으로는 켈트족(Celt) 수도사인 아디안(Adian)에 의해 이루어졌다. 664년에 휫트비(Wtiby)에서 두 흐름의 선교활동이 합치는 성과를 거두었다.

켄트(Kent) 지방의 에텔베르트(Ethelbert, 560-616) 왕이 개종한 것은 과히 전설적이고 극적인 이야기였다. 596년 어거스틴은 이전에 수도원에서 그레고리와 한 방을 썼던 것이 인연이 되어 그레고리에 의해 발탁되어 40명의 수도사들과 함께 영국에 파견되었을 때 에텔베르트 왕은 프랑크 왕족의 공주인 베르타(Bertha)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이미 기독교 신자였다.

어거스틴과 수도사 일행은 597년 4월에 테이넷 지방의 엡스플릿트에 상륙하였다. 에텔베르트 왕은 이들과 야외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런데 왕에게 접근하는 수도사들은 성가를 합창하며 은으로 만든 십자가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모습의 그림을 앞세우고 회견장의 왕을 향해 행진하였는데 왕비는 이들에게 비록 제한적이지만 일정한 장소에 머물게 하고 이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도록 왕에게 간청했다.

왕비의 이 간청은 받아들여졌고 마침내 601년에 에텔베르트 왕 자신도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는 다른 6개의 합스부르그 왕국들에게 에텔베르트 왕이 적의의 대상이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거스틴의 선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성탄절에 1,000명의 새로운 신자들이 합동 세례를 받는 기적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물론 고대사회의 개종방법이었던 왕이 개종하면 모든 백성들이 개종해야만 하는 종족 개종(bibalaanvagan)의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어거스틴은 앵글로 색슨족의 침공으로 폐허가 된 옛날 로마 교회의 터 위에 성당을 다시 건축하고 ‘거룩한 구세주 우리들의 하나님이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헌정하였다. 켄터베리에도 최초의 기독교 성당이 세워졌고 이 성당의 유지를 위하여 주위의 토지도 기증받았다. 어거스틴은 이 외에도 수도사들을 성직자로 임명하는 등 교회의 신장을 위해 더욱 노력했고 수도원도 설립하였다. 이 수도원 내에 에텔베르트 왕은 성(聖) 베드로와 바울에게 헌정하는 교회를 지었다. 이 교회와 수도원을 성(聖) 어거스틴이라 명명하였다. 이 명칭은 어거스틴의 영국 개종에 공헌한 공적을 기념하기위한 것이었다.

어거스틴의 사역은 7년으로 종결되었으나 그의 사역은 중세교회에 대륙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선교는 원래 존재하였던 브리튼의 주교들과의 화합을 이루지 못했다. 원래 이곳에 잔존했던 브리튼의 신자들은 앵글로 색슨족에게 침략을 당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개념보다는 적의를 품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거스틴이 들어와 앵글로 색슨족에게 접근했을 때 같은 기독교 신자였지만 달갑게 생각지 않았다.

사실 브리튼의 기독교인들은 앵글로 색슨족이 중간 통로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150년 동안 고립되어 있었고 대륙의 기독교와 접촉이 단절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주교들이 ‘어거스틴의 참나무’ 아래 회담에 참석했던 것 같고 그 뒤에도 회담에 7명의 주교들이 참석했던 것 같으며, 이들은 교구를 형성하지 않은 뱅골 이스트에 소재했던 대수도원의 집단 감독 체제의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2) 파울리누스(Saint Paulinus, 584?-644)의 선교

영국 전도는 604년 어거스틴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 새 주교에 임명된 파울리누스가 에텔베르트 왕의 공주를 위한 목사로 파송되는 등 역할을 하였다. 공주는 노덤브러아(Northumbria)의 에드윈(Edwin) 가(家)에 출가하였고 그 결과 에드윈과 그의 귀족들은 모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교도인 메르시아가 에드윈을 살해하고 노덤브리아를 침략하자 파울리누스의 사역은 허사로 종결되었다.

(3) 골롬바의(Saint Columba, 521-597) 선교

Saint Columba
Saint Columba

631년에는 고울 지방에 시기베르트라는 사람이 유배되어 갔다가 개종하여 돌아와서 동부 앵글리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켄터베리의 호노리우스가 보낸 선교사 필릭스를 세워 선교하게 하였다. 또 위섹스는 이탈리아 출신의 수도사인 비리누스에 의해 전도되었다. 비리누스는 옥스포드 주변 도체스터의 주교로 임명되자 이오나(Iona) 수도원에서 교육받은 노덤브리아의 오스왈드가 635년 도착하였다. 이로 인해 스코트랜드 출신 켈트족 수도사들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이오나 수도원은 콜럼바(Saint Columba, 521-597)가 세웠고 이미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다.

아일랜드에서 563년 12명의 동료와 함께 스코트랜드로 이주해 온 선교사 콜럼바(521-597)는 당시 친척인 달리아다 왕의 보호 밑에 이오나에 자리 잡고 수도원을 창설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스코트랜드 북부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픽트(Pict) 족에게 선교하여 개종시켰다. 콜롬바의 영국전도의 교훈을 이어받아 아일랜드의 선교사들은 북 잉글랜드의 노덤브리아의 앵글로 색슨 족들에게까지 전도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잉글랜드 동북 해안에 위치해 있는 린디스판 섬에 새로운 이오나 수도원이 634년 이오나 출신에 의해 세워졌다.

(4) 아이단(Aidan of Lindisfarne, ?-651)의 선교

그러나 켈트족 수도사는 너무 엄격한 신앙을 강조하여 이오나 수도사들은 온화한 성품의 아이단을 선출하였다. 아이단은 온화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여 이들을 양육하였다. 아이단은 린디스파렌 섬에 수도원과 교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곳은 북쪽의 켈틱 기독교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이를 통해 아일랜드의 기독교 전통이 전수되었다. 아이단은 대부분의 시간을 설교 여행에 보냈으며 금욕적인 생활과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에 열중하였다. 비록 그의 사역지가 642년 이교도 펜다에 의해 점령되었으나, 파울리누스의 경우처럼 그의 공적이 수포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켈틱 기독교는 우스위의 지도하에 노덤브리아 뿐만이 아니라 펜다의 고토 메르시아 왕국까지 보급되었다.

(5) 콜럼바누스(Columbanus, 550-615)의 선교

아일랜드와 영국의 섬나라 수도사들의 선교 열정은 영국에 한정되지 않고 대서양을 건너 대륙으로 연결되었다. 그들 중 유명한 방고르(Bangor) 수도원의 수도사 콜럼바누스는 585년 12명의 수도사 동료와 함께 부르군디의 아네그레이에 와서 룩세륄 수도원을 세웠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수도원 적인 선교여행은 북 스위스와 북 이탈리아에까지 달했으며, 614년에는 이탈리아의 아페닌 지역에 보비오(Bobio)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독일의 중부와 남부지역 깊숙이 활동하였다.

(6) 윌리브로드(Willibrord, 657-739)의 선교

콜롬바누스의 뒤를 이어 대표적인 인물로 대륙의 선교에 나선 수도사는 노덤브리아 출신의 월리브로드였다. 그는 33살에 다른 11명의 수도사들과 함께 이교도의 땅인 우트레흐트 항구 부근에 도착하였다. 그는 다행히도 프랑크족의 공작이었던 피핀왕의 원조를 받아 프리지아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월리브로드는 교회와 수도원을 이곳에 지은 후 데인 족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로서 훈련을 시키기 위해 30명의 데인 소년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는 프랑크 족에게로 귀환하여 프리스랜드예서 사역하였다. 그는 역시 페핀의 도움으로 에프텐나흐에 수도원을 세웠다. 714년에도 또 하나의 수도원을 세우는 등 프랑크족의 도움으로 선교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페핀의 사후에는 상황이 변하여 라드보드가 반란을 일으켜 페핀의 입장을 뒤엎고 교회를 불사르며 수도원의 신부들을 몰아냈다. 그러나 라드보드의 사후에 전도의 자유가 허락되어 그는 교회를 수복하는 일에 전념하다 세상을 떠났다. 결국 그는 우트레히트 교구를 형성하는 등 선교 사역을 이루었으나 그의 선교는 단명이었고 그의 뒤를 이어 건너온 윈프리드(Winfrid)라고 하는 독일의 사도 보니페이스(Bcniface, 680-751)에 의해 계승되었다.

(7) 보니페이스(Boniface, 680-754)의 선교

이교도에 의해 살해당하는 보니페이스 A.D.753
이교도에 의해 살해당하는 보니페이스 A.D.753

보니페이스는 교황의 인준을 받고 선교사로 출발하여 라드보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월리브로드에게 가서 그와 함께 3년간 사역을 하며 경험을 쌓았다. 그는 월리브로드에 의해 프리스랜드에는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가기 원했다. 그는 튜톤 족의 언어와 문화 풍습 등을 공부하면서 이교도 선교를 위한 준비를 열심히 했다. 722년 그는 헷세와 튜링기아 지방에서 전도하여 추장을 개종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그는 로마에 가서 그레고리 교황 2세에게서 이방인을 위한 주교로 임명받았고 교황은 그에게 독일과 라인 강의 동편을 교구로 수령하였다.

보니페이스는 교황과 주교들의 지원을 받아 선교를 시작하였다. 교황은 특히 당시 기독교인 추장이었던 찰스 마르텔과 이교도인 색슨 족에게 보내는 추천장을 그에게 써 주었으며 그것은 그에게 대단한 도움을 주었다. 그에게는 두 가지 사명이 주어졌다. 하나는 프랑크족의 교회를 개혁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는 교황과 프랑크 왕국의 왕들(찰스 마르텔과 그의 아들 페핀)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 사역을 진행하였다. 프랑크 족의 기존 성직자들은 교회법인 캐논(canon)과 상치되는 행동에 익숙해 있었으며 이들은 보니페이스의 개혁에 방해가 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는 10년간 설교 등으로 인근의 이교도들을 교화하기 위해 수도원을 건설하는 등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아니했다. 그는 헷세 지역의 이방 신인 오딘 신(神) ‘참나무’를 도끼로 찍어버리고 그의 추종자들과 그 자리에 교회당을 세웠다. 이것이 후에 베드로와 바울에게 헌정한 프릿즈라 교회와 수도원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보니페이스는 또한 바바리아 지방을 개종하기 위해 프릿즈라 동부에 유명한 풀다(Fulda) 수도원을 세웠다. 수도사들은 이곳을 개척하여 석조 교회를 세워 그리스도에게 헌정하였다. 그리고 보니페이스는 수도사들 중에서 스투룸을 2년간 로마와 몬테카시노에 파송하여 베네딕의 수도규칙을 연구케 하였다. 후에 스투룸은 풀다의 원장이 되었으며 그의 지도 하에 이 수도원은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수도원이 되었다. 보니페이스가 세운 독일의 수도원에서는 독일의 젊은이들이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건너와서 교육을 받았다. 보니페이스는 그를 찾아온 영국인들을 위해서도 수도원을 세워 교육을 시켰고 수녀원을 세웠다.

특이한 것은 남녀를 위한 공동 수도원을 세워 남녀가 함께 수도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예를 들면 쉽보른에는 비록 건물은 분리되어 있었지만 양성(兩性) 수도원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업적을 인정한 교황은 보니페이스에게 이제 교구를 초월한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보니페이스에게 각 지역의 주교 임명권을 준 것을 의미하며 그의 직위는 한층 더 높아지게 되었다. 741년 교황 자카리라스에 의해 보니페이스는 교황 사절로 임명되었고 그는 프랑크 교회의 개혁 작업을 시도하였다.

당시 프랑크 교회의 문제는 전술한 대로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평신도들이 성직이나 장로로 임명되어 교회법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공동체도 훈련시킬 수가 없었다. 아내와 함께 사는 경우와 교회에 속한 재산을 차지하고 수입을 가로채는 사례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부패의 문제들을 개혁하기 위해 그는 페핀의 도움을 받아 두 차례 독일과 프랑크족의 성직자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매년 종교회의를 통해 시정을 촉구하였다.

보니페이스는 마지막 2년 동안 자신의 초기 사역지 프리스랜드(프리지아)에서 사역했다. 본 강 언덕에서 50명의 수행자들과 함께 초신자 견신례를 행하던 중 이교도들에 의해 753년에 순교했고 독일의 개종은 이제 페핀의 아들인 사를마뉴에 의해 무력으로 개종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는 선교를 통해 로마 교황청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교황을 후견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교황청의 권위가 선교지에서 확보되었으며 동시에 아일랜드와 영국의 수도사들이 로마 교회와 더 밀착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는 바로 중세교회가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형성되도록 역사의 기류를 흐르게 하는데 기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글쓴 이 / 심창섭(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