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 교회사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23) 중세 초기 유럽의 역사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23)
중세 초기 유럽의 역사

사를마뉴에게 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주는 교황 레오 3세, AD800
사를마뉴에게 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주는 교황 레오 3세, AD800

3. 권력화 되어가는 로마 가톨릭 교황청

중세 서구 국가 중 로마 가톨릭 교황청과 유대를 강화하여 유럽 통치의 중추역할을 했던 나라는 프랑크(Francia) 왕국이었다. 클로비스 1세(Clovis I, 446-511) 왕비 클로틸다(Clotilde, 475-544)에 의해 정통 기독교로 개종(496년)한 것을 계기로 중세 교회는 국가와의 관계가 밀착되기 시작했다.

클로비의 후손인 메로빙거 왕조(Merovingian dynasty)의 왕들이 통치하는 동안 메로빙거는 부패하여 실제 경영권은 왕궁의 대신들에게 있었다. 이때 궁중대신이었던 카로링가가 사실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714년 그가 죽자 권력은 그의 서자인 찰스 마르텔(Charles Martel, 686-741)에게 넘어갔다. 찰스 마르텔은 당시 기독교 최대의 위협적인 적으로 등장한 이슬람의 서구 유럽의 침략을 투을 지역에서 막았고, 독일과 네덜란드의 선교사들을 지원하여 기독교의 확장에 도움을 주었다.

당시 교회에는 스페인과 고울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사람들이 교회로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어떤 왕들은 군중 속에 자객들이 잠적해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호위병이 없이 교회에 나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주일이면 아침 기도와 미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펴졌다. 많은 재산들이 교회에 유입되었고 메로빙거 시대의 교회와 수도원들은 왕국 전체 토지의 1/4내지 1/3을 차지하였고 따라서 주교와 수도원장의 사회적 위치도 높아져 백작이나 공작에 뒤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찰스 마르텔이 이슬람과의 대전에서 필요한 경비를 위해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으나 교회는 교인들의 지속적인 헌금으로 재산 손실이 쉽게 회복되었다. 왕은 박탈한 재산을 귀족들의 공무를 위해 지급했지만 귀속들은 곧 그 재산을 교회에 바치곤 하였다. 이렇게 중세 초반의 정치와 종교가 묘하게 되어져 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찰스 마르텔의 후계자였던 피핀(Pepin the Short, 714-768) 시대였다.

피핀은 교회의 지배권을 유지하면서 로마 가톨릭 교황청과의 유대를 견고히 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피핀 왕은 선친의 또 다른 아들이었던 카를로만이 권력을 내놓고 수도사가 됨으로 제국을 통합하고 실제 권력을 장악하는데 교회로부터 재가(裁可)가 필요하였다. 이것은 당시 왕들이 자신의 권력과 칭호의 보편성을 인정받기 위해 신적 확인이 필요했었고, 이것은 통치를 위한 정치적인 조치가 되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황청을 통하지 않고는 자신의 실권에 대한 권위를 부상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교황의 사절이었던 보니페이스(Saint Boniface, 675?–754)는 전술한 바와 같이 피핀의 도움으로 자신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고 피핀은 보니페이스를 통해 752년 교황 스테판 3세의 승인 하에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피핀은 교황에게 라베나와 이탈리아 지역을 증여하고 교황에게 통치권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로마를 침입한 롬바르드족을 징벌하여 교황청을 보호하는 후견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곧 로마 가톨릭 교황청이 왕들의 통치권한을 인정해 주는 대가로 세속권한을 이용해 보호를 받고 왕들은 정치적으로 교권을 필요로 하는 공존의 도식을 만들어 낸 행위였다. 이것은 곧 교회와 국가가 밀착되어 가는 중세 초반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피핀 왕이 교황에게 바친 이탈리아 지역과 그 지역에 대한 통치권은 상징적인 의미가 더 컸다. 이를 ‘피핀의 증여’(Pippinsche Schenkung)라고 부르며 그 의식은 중세 역사에 지속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황의 교권이 정치권력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중세 교회의 로마 가톨릭 교회 국가(Church State)가 시작되는 사건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황청이 중세 세속지배의 출발이 된 피핀의 영토 증여(AD 752)
로마 가톨릭 교황청이 중세 세속지배의 출발이 된 피핀의 영토 증여(AD 752)

로마 가톨릭 교황청이 프랑크 왕국과 후견인으로서 국가와 동반했던 절정기는 피핀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등장한 사를마뉴(Charlemagne, -814, 재위 742-814)의 통치시대였다. 사실 이 시기는 교회가 국가의 도움이 더욱 절실하던 시기였다. 사를마뉴의 치적 시에 로마 가톨릭 교황청은 권력다툼으로 부패해 있었고 이를 계기로 야만족인 롬바르드(Lombard) 족의 침략이 계속되는 등 혼란한 정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를마뉴는 아버지의 영토를 배 이상 확장하는 등 프랑크족의 역사상 어느 통치자보다도 뛰어난 전술가였다. 그는 유럽의 전 지역을 통치할 정도로 서 로마제국의 몰락 이후에 거기에 버금가는 영역을 통일하였다.

특별히 그는 이 정복을 통해서 유럽을 군사적인 힘으로 기독교화 하는 기독교 세계(Pax Christiana)를 이룩하였다. 그는 프랑스, 벨지움, 네델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스페인의 일부까지 점령하는 업적을 세웠다. 그는 종교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국가 권력에 의해 교회 확장이 강요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문화를 형성하게 하였다. 특히 자신의 대관식은 바로 중세 교회의 정치적 세력을 이룩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관식은 바로 사를마뉴가 교황청의 투쟁을 종식 시카고 롬바드족의 침략을 퇴진시킴으로 이루어졌다.

최초 유럽 대륙을 통일하여 기독교 국가를 꿈꿨던 샤롤마뉴의 영토
최초 유럽 대륙을 통일하여 기독교 국가를 꿈꿨던 샤롤마뉴의 영토

당시 사를마뉴의 도움으로 로마 귀족들과의 교황 권 투쟁에서 승리한 교황 레오 3세는 사를마뉴가 800년 크리스마스에 참석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성찬식 때 무릎을 꿇게 하고 사를마뉴에게 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이때 미리 약속된 군중들이 소리를 질렀다. “지극히 경건한 아우구스트 사를마뉴에게 하나님의 면류관을! 위대한 평화의 황제에게 생명과 승리를! 만민에 의해 즉위한 그를 로마인들의 황제로!” 이러한 함성과 함께 사를마뉴는 졸지에 옛 로마 황제의 칭호를 얻게 되었으며 로마 가톨릭교회와 관계는 더욱 밀착되었다.

사를마뉴가 비록 정치적인 이유에서 대관식을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왕국을 신정(神政) 국가로 인식했다. 그래서 황제가 된 사를마뉴는 경건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충성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매일 아침 미사를 올렸고 저녁에도 매일기도를 드렸다. 교회 개혁을 위해 자신이 교회의 회의를 소집하고 회의 결정에도 개입하였다. 사제들에게는 세례를 베푸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관리 등용에 있어서도 고위 성직자나 부호들이기도 한 성직자들을 임용하였다. 이렇게 하여 결국은 교회가 국가의 일부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사를마뉴는 또한 기독교 문예부흥에 기여하였다. 그는 고트족, 프랑크족, 색슨족, 겔트족 등에서 유능한 학자들을 불러 모아 궁정학교를 개설하였다. 그 중 앵글로색슨 족의 알윈(Ealhwine Flaccus or Alcuin of York, 735-804)은 요크의 유명한 대성당 학교의 교장을 지낸 사람으로 샤를마뉴 의 궁정 교육 및 종교 분과의 고문이 되었다. 그는 결국 카를링거 왕조의 문예부흥을 지도하게 되었다.

알윈은 궁정학교의 교육으로 고전 교육의 과목들을 이수케 하는 등 그리스도 신앙의 전파를 위한 지식인 즉 교사 양성을 시도하였다. 그는 수사학, 문법, 변증학을 가르쳤다. 그는 또한 사를마뉴가 취한 이방인들의 강제 개종을 반대하면서 교회와 국가를 ‘두 개의 칼’이라는 상징적인 표현을 최초로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를마뉴 대제에게 국가의 권력인 칼로 야만인들을 개종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사를마뉴 대제는 알윈이 읽어주는 어거스틴의 신국(神國, De Civitate Dei, 410?)을 통해 자신의 통치철학을 터득하려고 했다. 사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의 모든 교회 의식을 로마의 의식으로 전환시킨 만큼 로마 교회와 밀착되어 있었다. 특히 사를마뉴는 모든 유럽 수도원의 수도 회칙을 베네딕트의 회칙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교회법들을 정리하여 로마 교황청의 법과 일치하도록 표준 전례를 마련하였다.

이 모든 일은 궁정학교의 학자들과 그 대표인 알윈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프랑크 왕들이 결국 중세 유럽을 형성하는 데 중심역할을 하였고 특히 왕들의 로마 가톨릭 교황청과의 밀접한 관계로 인해 중세 교회는 정치적인 수례바퀴와 공동보조를 맞추면서 진행할 수밖에 없는 교회와 국가가 하나가 되는 구도로 발전하였다.(*) 글쓴 이 / 심창섭(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