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27) 중세 중기의 역사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27) 중세 중기의 역사

2. 교황 그레고리 Ⅶ(Gregory Ⅶ, 1073-1124)
온갖 수치스러운 추문들로 인해 교황청의 권위가 실추되고 교권이 바닥이 났을 때 클루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로마 가톨릭의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교회가 세속화되고 정치적인 기독교가 생명을 상실하였을 때 금욕적인 신앙부흥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퀴테인의 경건한 월리엄 공이 프랑스 동부지역의 클루니에 세운 수도원에서부터였다.
이 수도원은 모든 세속적인 권력과 교구(敎區)의 간섭에서 벗어나 교황의 보호 밑에서 개혁정신을 실천하려 했다. 베네딕트 수도원의 규율을 다시 엄격히 준수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려 했다. 결국 이러한 운동은 수도원의 개혁을 넘어 성직자와 교회의 개혁을 시도했다는 데 개혁의 의의(意義)가 크다.
클루니 수도원에서 개혁의 방안으로 제시한 가장 큰 이슈는 성직 매매(simony)와 성직의 독신(獨身) 파기(Nicoliatanism)였다. 11세기에 와서 특별히 이 운동은 평신도들의 성직(聖職) 수임(受任)을 성직 매매로 보았다. 그리고 교황청은 그 동안 빼앗겼던 성직 수임권(Investiture)을 회복하는 것이 부패의 척결(剔抉)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이상(理想)으로 교회의 개혁을 주도한 교황은 25년이나 수도사의 몸으로 서방교회를 통치한 경험이 있던 클루니 출신의 힐데브란트(Hildebrand of Sovana, 1015-1085)였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 6명의 교황 수석 고문역을 담당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여 사람들의 신임을 이미 받았다. 추기경단에 의해 선출되었던 교황 알렉산더 Ⅱ세가 사망한 후 추기경단은 새로운 교황 선출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힐데브란트는 알렉산더 Ⅱ세의 장례를 집전하고 있던 날 갑자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 힐데브란트를 교황으로 추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황한 힐데브란트가 자신의 무자격과 선출방식의 불법성을 내세워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민중들은 막무가내로 그를 성 베드로 성당으로 데리고 가 강제로 교황으로 추대했다.
이렇게 교황이 된 힐데브란트는 한 달 후에 사제로 임명되었고 그 후에 주교로 임명되어 교황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교권을 확보하고 교황을 공정하게 선출하기 위해 자신이 만든 추기경단의 제도를 본인이 어기게 되었다. 그리고 교황청과 제국의 법과 질서를 정립하고자 노력했던 자신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직위를 차지한 것은 아이러니칼한 문제였다. 그러나 민중이 원한다면 경직된 제도를 뛰어넘어 민의가 승리하는 원시적인 민주주의의 향기를 맡을 수도 있는 경우였다.
힐데브란트는 교황이 되어 그의 스승인 존 그라티안(Gratian)을 기념하여 자신의 공식 명을 그레고리 Ⅶ세로 호칭하게 하였다. 그가 개혁을 위해 내세운 두 가지의 중요한 사항은 성직 매매와 성직 수임권이었다. 그는 당시 성직자들이 성직 매매를 통해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간파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부패를 가져온 원인이 세상 권세의 교회 통치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성직 수임권의 회복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1074년 교황으로 취임한 지 1년도 못되어 개혁에 합당한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1) 성직을 매입한 자는 매입한 그 자체만으로도 성직의 자격이 없는 자이다.
(2) 교구를 맡기 위해 금품을 증여한 자는 그 교구를 차지하지 못한다. 아무도 교회와 관련된 직함을 팔거나 사지 못한다.
(3) 음란죄를 범한 성직자는 즉시 성직의 기능을 상실한다.
(4) 평신도들도 교황의 칙령을 위반한 성직자들을 목회자로 받기를 거 부해야 한다.
이 칙령이 전달되자 제일 먼저 반발한 자들은 독신(獨身)을 지키지 못하고 이미 가정을 갖거나 세속의 삶을 즐기고 있는 수렁에 깊이 빠져 있던 대부분의 성직자들이었다.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 대부분의 지역에서 심하게 반발하였고 수도원에서는 이와 반대로 대대적인 환영의 표시를 보였다. 특히 서부 유럽의 성직자들의 반대가 심하였다. 프랑스의 성직자들은 파리에서 회의(1074년)를 열고 공개적으로 교황의 칙령을 비합리적이라고 불만을 표시하였다. 독일도 동일하게 이러한 분노를 그들의 회의를 통해 표현했다.
이러한 교회 내의 반대에 부딪힌 그레고리 Ⅶ세는 성직 매매와 음란죄의 근본적인 진원이 되는 평신도에 의한 성직 매매 제도인 평신도 성직 수임권을 박탈하기로 작정하였다. 여기서 평신도란 주로 성직자가 아닌 영주나 왕들이 자기 필요를 따라 성직을 임명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결국 교황 그레고리 Ⅶ세는 1075년 로마 종교회의에서 평신도 성직 수임권에 대한 교황의 입장을 정리하고 공포하였다.
“앞으로 평신도들에게서 주교직이나 수도원장직을 받아들이는 성직자들은 교회에 의해 주교나 수도원장 등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그들이 축복받은 베드로 사도와 교제하는 것을 금한다. 이와 동일한 금령이 하급 성직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만약 황제나 공작이나 후작이나 백작이나 기타 어떤 평신도가 성직을 수임(受任)하는 경우 그는 이를 용납하는 성직자와 똑같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런 조치는 중세 유럽 전체의 통치자들에게는 일종의 폭탄 선언과도 같았다. 이들 가운데 가장 큰 반응을 보였던 나라는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이었다. 그레고리 Ⅶ세의 정책 에 특히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면서 개혁의 걸림돌로 등장한 사람은 독일 황제 헨리 Ⅳ세(Henry Ⅳ, 1050-1106)였다. 헨리 Ⅳ세 는 교황이 발송한 칙령을 무시하고 지속적 으로 성직자들을 임명하였다. 그로서는 독 일을 통치하기 위해서 이 권한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교황은 헨리의 처사를 비난하며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라고 했다. 이런 와중에 교황이 크리스마스 날 밤(1075년)에 남치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로마에 있던 헨리의 강력한 후원자가 꾸민 사건임이 확인됐다. 이에 교황은 1076년 3명의 사절을 파견해 헨리가 직접 로마에 출두하여 교황과 교회 앞에 공적으로 자신의 실책에 대해 답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를 수행하지 않으면 파문(破門)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에 맞서 헨리는 교황 선출 과정에 있었던 불법을 지적하면서 그의 퇴위(退位)를 요구하는 반격 작전을 펼쳤다. 헨리 Ⅳ세는 웡스에서 독일 주교회의를 소집하고 그를 역으로 정죄하고 직위를 박탈하는 등 교황의 자리에서 파문시켰다. “가짜 수도사 힐데브란트! 나 프랑스 왕 헨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모든 주교들과 함께 그대들에게 명령하노니 교황의 보좌들로부터 내려와 영원한 저주를 받을 지어다.”
교황은 이런 헨리의 오만불손한 조치에 대해 라트란 종교회의에 서 헨리의 어머니가 참석한 가운데서 헨리 Ⅳ세를 파문시키고 프랑스 국민들의 왕에 대한 충성 의무를 해체시켰다. 그레고리는 헨리를 고립시키기 위한 후속 조치로서 독일에서의 성사와 예배 금지령을 내렸다. 모든 교회들은 예배가 금지되었고 이의 원인이 된 왕은 모든 국민의 저주의 대상이 되어 거리에서 그에게 돌을 던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헨리 Ⅳ세의 성(城)은 약탈을 당하였으며 그의 토지도 파괴되었다. 이러한 국민들의 움직임에 귀족들까지도 편승하여 왕과의 공식수행을 거부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아우구스부르그에서는 회의를 소집하여 헨리 Ⅳ세가 교황에 의해 재판을 받도록 결정했다. 사태가 극도로 심각함을 인식한 황제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폐위(廢位)를 당하기보다는 회개하는 모습으로 교황 앞에 용서를 빌기로 작정했다.
헨리 Ⅳ세는 약간의 수행원을 동반하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카놋사(Canossa)에 머무르고 있던 교황을 찾아갔다. 헨리 Ⅳ세는 무려 3일 동안을 교황이 머무는 역관 앞의 눈 위에서 회개하는 신자의 초라한 모습으로 교황에게 용서와 자비를 구하였다. 이러한 헨리 Ⅳ세의 행동으로 인해 딜레마에 빠진 것은 헨리 Ⅳ세가 아니고 교황 그레고리 Ⅶ세였다. 만약에 헨리 Ⅳ세를 용서하면 독일에서 얻은 교황청의 이익과 정치적인 승리를 포기해야 하고 용서하지 않으면 교회의 가르침에 반하기 때문에 자신의 인품을 훼손시키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결국 교황은 사제로서 죄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원칙을 범할 수 없었기 때문에 헨리 Ⅳ세의 고해를 인정하고 그를 용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헨리 Ⅳ세가 바라던 일이었다. 교황의 족쇄에서 풀려난 그는 그 후에 힘을 길러 로마를 공격하여(1080년) 함락시키고 교황 그레고리 Ⅶ세를 파문했을 뿐 아니라 귀양을 보냈다. 1085년 살레르노에서 임종을 맞은 그레고리 Ⅶ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공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였기에 결국 유배지에서 죽노라.”
그레고리 Ⅶ세는 개혁에 실패한 인물이었지만 중세의 도덕적 영웅이었고 교황청 제국의 문을 연 인물이었다. 사실 그의 치적을 통해 전 유럽이 교황의 지배하에 들어오는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성직 수임권 문제는 그 후에도 계속되어 수장들 간의 오랜 타협 끝에 1122년 보름스 정교(政敎) 협약에서 해결되었다. 성직은 교회에 의해서만 임명된다는 원칙의 합의와 더불어 임명된 후에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형식으로 종결되었다. 만약에 임명된 주교가 맹세하지 아니할 때는 황제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함으로 평신도의 거부권을 행세하도록 개방한 셈이었다. 그레고리 Ⅶ세의 영향으로 인해 교황의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중세 교회의 중기에 발생한 대 역사적인 사건은 십자군 운동이었다.(*) 글쓴 이 / 심창섭(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