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44) 근대 세계교회사

1. 17, 18세기의 세계교회(2)
(2) 영국의 청교도혁명(English Civil War, 1642-1651)
영국의 청교도혁명은 엘리자베스(Elizabeth I of England, 1533-1603) 시대부터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비록 중간 입장이었으나 메리(Mary I of England, 1516-1558) 여왕의 개신교 탄압 때와는 달리 엘리자베스는 개신교를 수용하였다. 엘리자베스의 교회정책은 두 개의 의회법령(1559)을 기초로 세워졌다. 엘리자베스는 수장령(首長令, Act of Supremacy) 을 만들어 자신을 영국교회 최고의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를 둘 다 만족시키기 위하여 ‘공동기도문’을 수정하고 여러 가지 정책을 수립하였으나 결국은 양쪽 다 만족시키지 못했다. 양쪽에서 서로 다른 해결책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특히 개신교 쪽에서 좀 더 과감한 변화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들을 청교도(淸敎徒, Puritan)라고 불렀고 원래의 의미는 ‘빗자루로 잘못된 것들을 쓸어버린다.’는 뜻이다.
이런 청교도들이 초기에 다루었던 문제는 예복(禮服, Vestments)에 관한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성직자의 예복이 ‘적그리스도의 옷’이라고 했으며 ‘우상에게 바친 음식과 같다.’고 주장했다. 이에 여왕은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청교도들에게 혹독한 탄압을 가하였다. 여왕은 청교도들을 뿌리 뽑겠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옹호자들까지도 제거하려 하였다. 그래서 일부 청교도들은 여왕이 로마 가톨릭교회 쪽으로 기울어졌다고 간주하였다.
청교도들과 여왕 사이에 논쟁이 되었던 또 다른 문제는 ‘예언(豫言, prophesying) 모임’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의 이러한 모임은 성경을 연구와 말씀 전파를 위해 모이는 비공식적인 종교적 회집이었다. 그러나 여왕에게 이러한 모임이 교회의 개혁을 더욱 심화시키려는 의도로 여겨졌다. 1577년 여왕은 켄터베리의 대주교(Archbishop of Canterbury) 에드먼드 그린달(Edmund Grindal, 1519-1583)로 하여금 이런 모임에 가담하는 자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도록 지시함으로 실질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여왕의 이 명령을 그린달은 수용하지 않았고 청교도들에 대해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직임 기간은 청교도들에게 약간의 청신호였다. 여왕의 혹독한 탄압은 그린달의 후임자인 존 와잍기프트(John Whitgift Archbishop of Canterbury, 1530-1604)에게 계승되었다. 특이한 것은 많은 청교도들이 이때 장로교 교회정치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들의 대표적 청교도 지도자는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였고 그는 캠브리지대학(University of Cambridge) 교수였다.
카트라이트는 박해를 피해 얼마 동안 유럽 대륙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는 후에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1603년에 사망했지만 교회정치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 후에도 오랜 세월동안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기존교회의 체제 내에 머물면서 개혁을 추진했지만 헨리 바로우(Henry Barrowe or Barrow, 1550–1593), 존 그린우드(John Greenwood, 1556-1593) 같은 사람들은 영국 국회와 완전 분리를 주장했으며 이들은 이로 인해 탄압을 심하게 당했다. 이들은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불렸다.
영국의 청교도들의 종교개혁은 당시 열렬한 로마 가톨릭 신봉자인 스페인의 필립 2세(Philip II of Spain, 1527-1598)가 분노를 일으킬 만큼 확대되었다. 스페인의 필립 2세는 영국에서 청교도 신앙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동원하였다. 스페인의 필립 2세는 영국뿐 아니라 유럽 각지의 개혁사상을 멸절시키겠다는 종교적인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는 영국에 대해 상황이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1588년에 130척의 함대를 동원하여 영국의 도버해협(Strait of Dover)을 가로질러 공격하였다. 그러나 악천후의 날씨와 영국군의 신속한 대처로 스페인의 영국 정복은 실패로 끝나 청교도들의 역사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은 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이며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James VI and I King of Scotland, 1566-1625)가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영국의 왕으로 온다는 소식은 영국의 청교도들에게는 기쁨과 소망의 소식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스코틀랜드의 개혁의 주동자였던 존 낙스(John Knox, 1505-1572)를 통해 대관식을 거행했으며 그 자신이 장로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영국에 오기 전에 사실은 런던의 일천 명의 성직자들로부터 천명의 청원서(The Millenary Petition, 1603)를 받았으며 이는 청교도들의 개혁을 위한 소원서였다. 그러나 영국 개신교도들의 기대는 곧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청교도들의 청원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목사들은 사실 ‘교황의 누더기’(the rags of popery)라고 부르는 영국교회에 남아있는 옛 것들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불편한 분위기가 계속되자 왕은 1604년 회의를 소집하였다. 주교들과 청교도들이 회의에 참석하였고 왕은 의장이 되었다. 논쟁을 하던 중 한 청교도가 총회(Synod)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 말은 장로교의 색채를 풍기는 말이었기 때문에 왕을 노하게 만들었다. 그때 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들이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를 지향한다면 군주를 마귀이자 하나님으로 간주하는 것이오. 감독이 없의면 왕도 없소!” 왕은 총회(Synod)라는 용어가 곧 영국교회의 감독(주교)들이 개혁교회의 장로들로 대치된다고 이해했으며 이것은 바로 왕이 왕위에서 쫓겨날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회의는 곧 결렬되었고 이일로 인해 300명의 성직자들이 주교들에 의해 직책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왕은 회의에 성경의 새로운 번역을 제안했다. 왕은 번역된 성경이 민중들에게 보급되어 널리 읽혀지기를 바랐다. 1604년 성경번역이 추진되어 7년만인 1611년 흠정역(欽定譯, the Authorized Version, King James Version)이 출판되었다. 이성경은 영국의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 다 똑같이 즐겨 읽을 수 있게 영어로 번역 되었으며 관용구와 표현들을 만들어 이후 영어의 언어적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이 회의에서 양심상 영국의 국교회와 교구에 속할 수 없다고 한 분리주의자들은 타국으로의 이주를 결정했다. 그리고 화란이나 영국인들이 정착해 있던 북아메리카로 이주했다.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찰스 1세(Charles I of England, 1600-1649)는 열렬한 로마 가톨릭 교도인 프랑스의 앙리에타 마리아(Queen Henrietta Maria, 1609-1669) 공주와 결혼했다. 이렇게 되자 영국의회의 청교도에 대한 호의성향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왕은 의회와 충돌했다. 그리고 찰스 1세는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의회에 대한 불만을 품고 1629부터 1640년까지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통치했다. 이런 찰스 1세의 정책에 자문역을 했던 사람은 켄터베리 대주교인 월리엄 라우드(William Laud, 1573-1645)와 스트라포드의 공작인 토마스 웬트월스(Thomas Wentworth, 1st Earl of Strafford, 1593-1641)였다.
그러나 왕의 종교정책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월리엄 라우드였다. 라우드의 정책은 청교도 성직자들을 박해하고 그들의 예배의 조례를 영국국교 형태로 다시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간악한 박해 정책을 세웠는데 자신의 정책을 거부하는 청교도들을 그들의 뺨에 S.L. 즉 ‘선동적인 중상자’(Seditious Libeller)라는 의미의 글자 또는 S.S. ‘난동 선동자’(Sower of Sedition)라는 글자를 찍게 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막대한 벌금이 부과되었으며 귀를 자르기도 하였다. 그는 반(反) 칼빈주의자로서 “주교 없이는 참 교회가 없다.”는 주장을 했다.
이 같은 라우드는 찰스 왕의 절대적인 후광을 받으며 소위 앵글로-가톨릭 전통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는 교회의 의식과 성직자들의 복장 그리고 예배를 통일시키고 청교도들을 박해했다. 그는 드디어 영국의 중심교구로 청교도의 세력이 가장 강한 켄터베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찰스 왕과 라우드의 탄압정책을 반대하여 절망하고 설교의 자유와 교회의 조직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미국 이민의 길을 택하였다.
그들은 1620년부터 미국 매사추세츠(Massachusetts)로 이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1640년까지 미국에 이민 온 청교도들은 모두 2만 여명에 이르렀다. 라우드의 개신교에 대한 박해와 영국 국교회에 대한 충성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정책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에도 적용하려 하였다. 그는 영국 국회의 기도서를 스코틀랜드에서도 읽혀져야 한다고 강요했다. 이에 스코틀랜드에서는 곧 반란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장로교 신앙을 위한 국민계약서(Agreement of the People, 1649)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스코틀랜드교회는 주교(主敎)에 의해 통치될 수 없다고 선포하였다.
마침내 양국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감독들의 전쟁’(The Bishops Wars, 1639-1640)으로 불리어졌다. 전쟁을 통해 의회의 지원이 필요했던 찰스 왕은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단기의회(1640년 4,5월)와 장기의회(1640-1660)가 연속적으로 열렸다. 그러나 의회는 왕과 라우드의 지배에서 벗어나 의회를 지배하려 하였다. 이에 이번에는 잉글랜드 의회와 잉글랜드 왕 사이에는 1642년 전쟁이 벌어졌으며 이는 의회파와 왕당파와의 전쟁이었다.
의회파의 지도자였던 청교도 죤 핑(John Pym, 1584-1643)은 의회파의 동맹자들을 규합하였고 스코틀랜드와도 1643년 동맹을 맺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의 군대의 원정을 얻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교리, 예배 의식, 치리 그리고 교회정치 등을 하나님의 말씀과 개혁교회의 가장 훌륭한 모범에 따라 개혁할 것을 맹약하였다. 이러한 일을 추진하기 위해 이들은 총회를 열기로 결의하였다. 그 총회 장소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이었고 그래서 이 모임을 웨스트민스터 회의(Westminster Assembly)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는 오늘날 장로교회의 기본 신앙고백서요 지침서인 ‘대소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6)를 작성하였다. 청교도들의 줄기찬 신앙의 투쟁은 결국 세계 개혁파교회의 신앙의 계대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던 것이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참 신앙이 자유를 얻기 위한 희생의 역사를 거쳐 온 결과였다.
청교도들의 승리는 로마 가톨릭도 청교도도 아닌 독립파였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의 공헌이 결정적이었고 자신이 호민관(護民官, tribunus)으로 등장하여 공화정(共和政)을 수립함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는 청교도신앙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했다. 공화정은 개신교 정신으로 통치하기 시작했으며 영국 국교회 파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구속할 정도로 강요성을 띠기도 했다. 크를웰은 국회군(國會軍)을 편성하여 왕의 군대를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으며 청교도의 대적이었던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와 크롬웰에게 굴복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크롬웰의 신식(新式) 군대가 독립당으로 실권을 장악한 후 상황이 달라졌다. 그들은 극단적인 장로교파들의 개혁을 싫어했으며 크롬웰도 이들 편에 섰다. 결국 군인들의 이런 태도로 국회가 승인하였던 장로교회 완전 수립이 불가능하게 되자 스코틀랜드는 불만을 토로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정치적인 계산으로 찰스 1세는 는 영국에 장로교회의 수립을 후원한다는 약속 아래 스코틀랜드인들로 하여금 영국을 침략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군대는 침략군을 1648년 프레스들에서 격파하였고 이로 인해 찰스 1세는 오히려 모반죄로 처형되었고 국회의 장로교 의원들은 축출되었다. 그리고 이 여세를 몰아 크롬웰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차례로 정복하였다.
크롬웰은 사실 청교도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독립적인 입장이었다. 그는 종교의 자유는 최대로 허락했지만 2천명의 감독교회(Episcopal church) 교직들을 면직시켰다. 그는 양심적이고 유능하며 정치가다운 인물이었지만 종교를 무력의 지렛대로 다스림으로 호감을 사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까지(1658) 잉글랜드의 평화는 유지되었다.
1658년 크롬웰 사망 후 그의 아들 리차드(Richard Cromwell, 1626-1712)가 권력을 계승하여 호민관이 되었다. 그는 무력하여 무정부 상태를 초래했다. 왕당파와 장로파는 독립당을 반대로 왕정을 복구하기로 결심하였다. 드디어 1660년 찰스 2세가 왕위를 회복하고 장로회파를 국교회에 흡수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래서 장로회파의 지도자였던 박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에게 주교직을 주었으나 거절했다. 그러자 왕은 자신의 주장을 실현시키기 위해 1661년 사보이 궁에서 주교들과 장로들 간의 회합을 갖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는 아무런 결과가 없었다. 찰스 2세가 모든 신민들에게 양심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약속한 것은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 후 오래가지 않아 청교도 사역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주교들이 다시 세력을 확보하기 시작했으며 박해를 위한 법률들이 제정되었고 이것들이 합법화 되었다. 그 중요한 사례는1662년에 제정된 통일령(統一令, Act of Uniformity)이었다. 이 법령에 의하여 모든 성직자들은 공중 기도서에 있는 모든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해야만했다. 이는 개신교인들의 신앙양심을 무시한 처사였다.
이 법령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박해를 당했다. 이 법령을 어긴 양심범 1,800여명의 성직자들이 비(非) 국교도라는 이유로 생계와 생활의 터전을 잃었다. 이 외도 5명 이상 모이지 못하게 한 비밀집회 법(A Conventicle Act, 1664)과 5마일 법(The Five Miles Act, 1665) 등을 제정하여 비(非) 국교도들을 박해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이들을 반(反) 국교도인들로 몰아붙였다. 바로 이런 찰스 2세 치하에서 죤 번연은(John Bunyan, 1628-1688)은 신앙양심 문제로 투옥되었으며 유명한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을 남겼다. 결국은 지난 20년 동안 투쟁을 통해 거두었던 청교도들의 공적이 아무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찰스 2세의 뒤를 이어 찰스 1세의 동생이었던 제임스 2세(James II of England King of England, 1633-1701)가 왕위에 오르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립을 주목적으로 군관(軍官)의 요직에 로마 가톨릭 교도들을 임명했다. 그는 자유령(自由令, Declaration of Indulgence, 1672)을 만들어 신앙의 완전자유를 허락했으나 이것은 잉글랜드를 로마 가톨릭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이런 정책에 타격을 입은 반 국교도들은 제임스 2세의 정책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대응할 묘안을 찾다가 제임스의 딸 메리와 결혼한 네덜란드의 총독 오렌지의 월리엄의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1688년 월리엄은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진군했다. 결국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도망가고 영국은 월리엄 3세와 메리에 의해 공동 통치를 받게 되었다. 정세는 판이하게 바뀌었다. 이제 국교 지지파들은 전에 청교도들이 당한 것과 유사한 박해를 당했다.
월리엄 3세와 메리는 1689년 ‘개신교 자유령’(Act of Toleration)을 선포했다. 이것은 30년 전쟁 이후 맺어진 지역적인 자유와는 달리 개인적인 자유를 허용한 것이었다. 즉 월리엄과 메리에게 충성을 서약한 자와 로마 가톨릭교회적인 요소를 거부하고, 39개 신조를 찬성하는 자들에게는 예배의 자유를 허락하였던 것이다. 이 법령에 의해 나타난 새로운 현상은 다양한 신교의 예배형식의 출현이었다. 장로교, 회중교, 침례교 등이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월리엄과 메리는 영국에서만 청교도와 같은 개신교의 신앙에 자유를 허용했을 뿐 아니라, 개혁이 정치적인 이유로 난관에 부딪쳤던 스코틀랜드에게도 개신교 복구를 가져오게 하였다. 월리엄과 메리의 통치 하에서 스코틀랜드 국회는 1690년에 1661년 이후 추방당했던 장로교 목사들을 복귀시키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정 승인하여 장로회주의를 선택하도록 했다. 그리고 1707년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하나로 통합 대영제국(大英帝國, British Empire)을 이루었으며. 개신교의 자유정신에 따라 스코틀랜드의 교회의 독립권이 동시에 인정되었다.
이 시기에 소위 퀘이커파(Quakers)라는 이름의 동우회가 나타났다. 그들은 예배를 드릴 때 몸을 떨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생겼다. 이 단체는 죠지 폭스(George Fox, 1624-1691)라는 사람이 결성하였다. 폭스는 형식적인 예배의 전통적인 의식을 반대하고 참된 예배는 본질적으로 내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세례 또는 성찬 등의 형식을 중요시하지 않고 신조의 고백도 거부하며 영혼의 조용한 대화와 찬양과 기도 등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아주 검소한 복장을 하였으며 내적 조명을 상당 부분 의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그래서 이들은 영국에서 박해를 받아 서인도 제도와 북아메리카에 정착하였으며, 1681년 퀘이커 교도인 월리엄 펜(William Penn, 1644-1718)이 펜실베니아 식민 주(The Colony Pennsylvania)를 건설하였다. 초기에는 이 지역을 실바니아(Sylvania)로 부르려고 했으나 펜(Penn)의 이름을 첨가하여 펜실바니아로 이름을 지었다.(*) 글쓴 이 / 심창섭 (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