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 교회사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47) 근대 세계교회사

The Great Awakening or First Great Awakening was a Protestant religious revival that swept Protestant Europe and British America in the 1730s and 1740s. An evangelical and revitalization movement, it left a permanent impact on American Protestantism.

1. 17, 18세기의 세계교회(5)  

(6) 18세기 북미 신앙과 대각성운동

17세기 미국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유럽 대륙과 영국에서 이주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중 대부분은 유럽과 영국에서 갈망하던 신앙을 갖고 미국 땅에서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미국에는 처음부터 다양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미국 이민 초기의 한 정착지였던 뉴잉글랜드에는 루터교회, 개혁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 독립교회, 퀘이커파, 로마가톨릭, 재세례파(Anabaptist), 중생파(New Bom), 형제파(Dunkers), 신광파(New Lights), 계약파(Coventry Church), 브라운파(Brownist), 분리파(Seoedas) 등 각종의 교파와 종파들이 정착했다. 이런 다양한 교파들이 미국교회를 형성하고 사는 동안 이들에게 신앙의 영속적인 영향을 준 운동은 바로 영적 대각성운동(大覺醒運動, Great Awakening)이었다.

50여 년간 지속된 이 운동은 미국의 신앙형태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도 독일의 경건주의나 영국의 복음주의 부흥과 마찬가지로 합리주의 팽창과 문화의 혼란 속에서 발생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미국의 교회생활에 변화를 가져왔고 특히 입교의 개념 즉 교인됨의 개념을 회개의 변화를 겪은 중생(重生)한 사람들이라는 표준을 도입하게 되었다. 교회는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들만의 공동체라는 독특한 정의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이 영적 대각성운동은 뉴저지의 라리탄(Raritan) 계곡의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부터 불이 붙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에 이주해 온 네덜란드인들은 이곳을 그들의 향수를 달래는 장소로 모여들었다. 플레링후이센(Theodorus Jacobus Frelinghuysen, 1691-1747) 목사가 이곳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좀 더 일깨우며 생생한 신앙의 지식을 갖게 하기 위해서 6년 동안 계속해서 부흥운동을 진행했다. 이것이 효시(嚆矢)가 되어 미국 전역으로 부흥의 물결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 운동에 대해 당시 미국교회는 찬반의 난상토론과 분열의 경험들을 하게 되지만 흐르는 격류를 쉽게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운동에 매력을 느낀 한 청년은 플레링후이센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그는 영국 청교도의 확신에 따라 교육에 열중하여 당시 필라델피아 북쪽 오늘날의 프린스톤에 로그(Log) 대학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프린스톤대학(Princeton University)의 전신이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월리엄 테넨트 2세(William Tennent Sr. 1673–1746)였다. 테넨트는 목사로  1718년 아일랜드로부터 필라델피아에 이주해 왔는데 그는 영국의 성공회 소속이었으나 미국에 와서는 장로교에 가입하였다. 테넨트의 네 아들도 로그대학에 다녔는데 장남인 길버트(Gilbert, 1703-1764)는 졸업 후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그는 철저한 목사로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당시 미국에는 두 개의 장로교의 흐름이 있었는데 하나는 청교도계통으로서 신앙을 경험적으로 생생하게 느끼는 것에 최의 관심을 가진 부류와 다른 하나는 정확한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스코틀랜드장로교의 흐름이었다. 결국 이들은 서로 대립적인 관점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청교도 측을 따랐던 테넨트가는 반대에 부딪쳐서 뉴브룬스윅에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인을 대표하며 동시에 반 테넨트파를 대표하는 구파는 청교도 진영을 신파로 규정하고 종교회의에서 제명 하여 종국에는 뉴욕종교회의(신파, 테넨트파)와 필라텔피아회의(구파, 반테넨트파)와의 분열을 가져왔다. 이때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가 미국에 왔고 그는 뉴욕계의 교회에서 활약하여 이들 부흥운동에 활력소가 되었다. 1758년 신파와 구파가 다시 하나로 결합되기는 했으나 그 앙금은 그래도 남아 있었다.

이 운동이 뉴잉글랜드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이것은 바로 에드워드의 부흥운동의 고전이 되었다. 이 지역의 부흥운동은 에드워즈로 말미암아 점화되어 갔다. 에드워즈는 메사추세츠 주의 노댐프턴(Northampton)에서 목사로 있었으며 당시의 미국은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침체기의 길을 걷고 있었다. 에드워즈는 1734년경의 젊은이들의 환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지금은 극도의 종교적 침체기로 보인다. 마을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수년 동안 방종의 풍조가 휩쓸고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밤거리를 배회하고 선술집 등지에서 탈선된 행동을 하고 있다. 그 중에도 다른 사람들보다 특히 더 방탕한 무리들이 있다. 그들은 흔히 남녀가 한데 어울려 불 잔치와 난잡한 장난을 즐기기 일쑤였다. 그들은 각자 속해 있는 가정의 위치를 생각지 않고 친구들과 밤을 지새는 일이 많았다. 사실 이 마을에서는 가정도 별다른 힘을 발취하지 못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모임에서 예의 바르지 못한 행실을 보이는 것이 보통이었고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나의 조부께서 그들을 보살피지 않으셨더라면 지금보다 한층 더 상태가 나빴을 것이다.”

에드워즈의 집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회개하고 각성하며 영원 진노를 피하여 영생을 얻으려는 관심이 고조되었다. 사람들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진리를 이해하게 되었고,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에드워즈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영원한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에드워즈의 부흥은 주로 회중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여기에 테넨츠나 휫필드도 가세하여 부흥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대각성운동을 주도한 세 목사, (좌로부터) T.J. Frelinghuysen, J. Edwards, G. Whitefield

이들의 설교를 듣고 쓰러져 몸을 뒤튼다든지 울음을 터트리고 아우성을 치는 사례가 열광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자 중부에서 일어났던 찬반의 논란이 다시 일기 시작하였다. 조지 휫필드는 이러한 반대에 부디치자 그들을 회개치 않은 사람들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동료 목사인 데이븐포트(James Davenport, 1716–1757)는 준비 없이 설교를 몇 시간씩이나 함부로 했고 당시 저명한 목사들의 이름을 들면서 회개하지 않는다고 공박하는 등 그는 도가 넘는 심한 행동을 했다.  

에드워즈를 비롯한 대각성운동의 주역들의 노력으로 북 아메리카의 많은 지역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음에도 또한 분열은 불가피하게 나타났다. 이들의 부흥을 반대는 집단인 보스톤의 촌시(ChaiIes Chauncy, 1705-1787)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옛 빛파(Old Light)라는 조직을 형성했고 부흥사들은 새 빛파(New Light)를 구성했다. 묘하게 이 두 파의 싸움의 틈 사이에서 미국교회는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와 유니테리언(Unitarian) 사상이 급진적으로 번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의 성장 둔화와 소요 가운데서 침례교회(Baptist Church)가 발전하는 이상한 기류를 나타냈다. 그러나 침례교회 내에서도 부흥회를 중심으로 논란이 일어났다. 남부의 버지니아 지역의 부흥계의 목사들이 독립 침례교회를 조직했고 잔존한 부류는 기존파로 자처하여 분열되었다.  

감리교회(Methodist Church)는 1766년부터 발전하기 시작했고 에스베리(Francis Asbury, 1745-1816)를 통해서 활발해졌다. 그는 1769년 웨슬리(John Wesley,1703-1791)가 신대륙으로 파송한 8명의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감리교의 최초의 연회는 13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되었다.  

한편 영적 대각성운동의 영향을 받지 않은 교단은 루터파(Lutheran)였다. 비록 미국에서의 대각성운동의 영향은 받지 않았지만 독일 할레에서 온 뮬렌버그(Henry Melchior Muhlenberg, 1711-1787)로 인해 자체 내의 경건주의적인 열의가 마치 부흥운동처럼 이주해 온 루터교인들 사이에도 번져갔다. 그로 인해 루터교회는 상당한 발전을 했고 경건주의와 정통사상을 잘 조화시킨 전통을 만들었다. 1748년에 최초로 미국 내의 루터회의가 조직되었다.

그런데 이 북 미주 영성 대각성운동에서 미국 신학계와 교회에 대표적으로 역할한 사람은 역시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였다. 그는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이지적이었다. 당시 그는 철학과 과학을 통독하였고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와 뉴톤(Isaac Newton, 1643-1727)에 심취할 정도였다. 그는 또 미국에서 칼빈주의 철학인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교리’를 골자로 한 칼빈주의 신학을 대성시켰으며, 부흥회를 지나친 정서적 폭발이라고 불신하는 자들을 향해서는 부흥회를 옹호하고 부흥회를 절대화하는 자들을 향해서는 경계하면서 각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표준을 지나치게 높여 참 선택된 자들의 회집이라고 고집함으로 1750년 극단론자로 몰려 자신의 교회에서 면직을 당했다. 그는 그 후 인디언들에게 선교하였으며, 조직신학자로서 방대한 저술을 했고, 18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우두머리가 알미니우스주의라고 비난하면서 칼빈주의를 확고하게 정리 집대성하였다. 그는 말년에 프린스턴대학의 총장직에 올랐으나 1개월 만에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글쓴 이 / 심창섭  (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