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50) 근대 세계교회사

19세기의 세계교회(1)
(1) 19세기 독일교회의 신학사상
인간이 만들어 내는 사조(思潮)는 언제나 반대 극복 현상의 저울질 속에서 움직여 왔다. 이성(理性)을 중심한 합리적 사고가 서구인들의 사조를 풍미하면서 반(反) 정서적이며 비(非) 감각적인 시대를 창출했다. 그러자 이런 차가운 이성의 진단을 거부하고 인간의 근본을 이성에 두지 않고 감성(感性)에 호소하는 자연으로의 복귀 사상이 나타났다. 이 운동은 종교에서의 초자연적 차원의 재흥과 감정적인 인간의 바른 인식을 주장했다.
이를 이끈 인물들은 프랑스의 루소(Jean-Jacques Rousseau,1712-1778), 독일의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쉴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였다. 물론 이들의 출현으로 인해 합리주의(合理主義)가 아주 물러간 것은 아니었다. 단지 합리주의의 독주를 제어하는 새로운 사조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결국 18세기에 유럽을 휩쓸었던 사조는 세 가지로 분류되었다.

- 독일의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나 볼프(Hugo Wolf, 1860-1903)와 같은 이는 모든 지식이 인간의 생득적인 인간의 순수한 이성이나 단자에서 온다고 보는 학파였고,
- 이에 반하여 영국의 흄(David Hume, 1711-1776)이나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모든 것은 외부로 오는 경험에 의해 주어질 뿐 내적인생득적인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 그리고 생득적 이든 경험에 의해 외부에서 인식되든 이성을 중심으로 합리적인 사고에 집착해 왔던 양파와는 달리 감성에 호소한 낭만주의(浪漫主義, romanticism) 자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런 18세기의 모든 사조를 비판하고 통합하면서 새로운 종합적인사조를 불러 온 사람이 바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였다. 칸트는 라이프니츠, 볼프, 흡, 루소 등의 지성인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지만 1781년 ‘순수이성 비판’(Critique of Pure Reason)을 출판하여 서양 사조의 새로운 전환기를 가져왔다. 그는 이전의 이성의 체계를 무너뜨리고 지식의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냈다.
칸트는 로크가 주장하는 것처럼 마음은 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법을 가지고 있으며 밖에서 들어오는 것들을 이 법에 의해 분류한다고 보았다. 이것을 범주(範疇)라고 규정했다. 그에 의하면 지식은 밖에서 들어오는 법 즉 경험과 마음 안에 있는 법 즉 생득적인 것 이 두 요소의 소산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칸트에 의하면 지식 자체가 다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마음이 만들어 놓은 범위 안의 것만이 지식이 된다. 그래서 우리의 지식이란 존재하는 것 모두를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神)이나 자연종교를 객관적으로 다 서술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인간이 절대 지식에는 도달하지 못하지만 행동을 하려 할 때 일종의 도덕적 의무감 같은 감정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 문제를 ‘실천이성 비판’(1788년)에서 다루면서 사람이 행동을 하려할 때 어떤 ‘범주적 명령’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범주적 명령’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도덕적 법칙이며 이것이 우리 속에 의식되며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 ‘범주적 명령’의 개념에는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유, 영생,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 자유, 영생, 하나님에 대한 도덕적 의무감을 실천함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 아들을 가장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 보이신 이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란 바로 이 도덕적 명령을 실천하는 자들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한 칸트가 기독교에 공헌한 바는 이성주의(理性主義, rationalism)와 낭만주의(浪漫主義, romanticism)의 극단을 피하고 인간의 심원(深遠)한 감정을 실천적인 종교의 확신과 도덕적 행동의 기초로 보았다는 것이다. 결국 그의 이론은 기독교의 진리를 도덕적 실천 차원에서 해석하려는 사람들의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를 인간 감정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이해하려는 판도를 열었다. 바로 이러한 칸트 철학을 근거로 나타난 사람이 19세기 초반 근대 기독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슬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였다. 그는 어린 시절 모라비안(Moravian)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 영향은 일생 동안 지속되었다. 비록 그가 그들의 반(反) 지성적인 경건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1810년 베를린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칸트가 철학에서 이전의 철학을 총정리 하여 새로운 철학체계를 이루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학계에서 슬라이에르마허는 칸트와 같은 역할을 했다. 당시에 유행했던 정통 교리주의나 합리주의적인 신학 방법은 서로 상반된 주장하고 있었지만 신앙에 대한 지적 접근이었음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슬라이에르마허는 “종교는 교리로나 합리적 설득이나 행위의 체계로 대체되거나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感情)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그 감정은 애인과 헤어졌을 때의 슬픈 감정 등 연민(憐憫)이나 동정과 같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보다 본질적인 것이었다. 인간은 절대적인 것에 대해 자신의 유한성 곧 의존성을 느낀다는 것이며 이 의존의 감정이 바로 모든 종교의 기초라는 것이다. 바로 이 감정이 신과 인간의 깊은 심연(深淵)을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슬라이에르마허의 기독론은 그의 신학의 중심 과제였다. 그리스도는 무한(無限)과 유한(有限)의 화해자이며 가교(架橋)이다. 그리고 도덕은 종교가 될 수 없지만 종교는 도덕의 빼놓을 수 없는 친구요 옹호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슬라이에르마허의 주장은 절대의존의 감정을 종교의 씨(種子)라고 규정함으로 정통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경을 통해 나타날 인격적인 그리스도와 신(神)의 존재에 대한 확신에 대해 주관적인 의존의 인간 감정(感情)에 호소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슬라이에르마허 이후 독일신학에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한 것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에서 부터였다. 헤겔은 우주(宇宙)는 절대자 곧 신(神)의 세속적인 발전으로 보았다. 이 발전은 마음이 스스로 논리적으로 생각해 내는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데 세 단계의 발전이 있다고 보았다. 즉 정반합(正反合, thesis, antithesis, synthesis)의 단계이다. 그의 발전 단계는 소위 ‘변증법적 원리’(Hegel’s dialectics)였다.
헤겔은 이 원리에 의해 ‘인간’(人間)을 정의할 때 ‘마음’이라는 정(正)과 ‘물질’이라는 반(反)의 합(合)인 그것들의 총화라고 보았다. 그의 이 같은 논리는 인간론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신관(神觀)도 변증법적인 원리에서 이해되었다. 정(正)은 하나님 아버지, 반(反)은 성자 그리고 합(合)은 사랑의 성신(聖神)으로 보았다. 이런 주장은 발전단계를 거쳐 형성된 기독교 진리를 추구하였으며 완성을 위해 발전하는 진리의 상대성을 몰고 왔다. 그리고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절대성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예를 들면 성육신(成肉身)의 과정을 변증법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양성을 파괴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정(正)은 무한한 하나님, 반(反)은 유한한 인간성과 구별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합(合)은 신인(神人, God-man)에게서 구현되는 최상의 높은 차원의 일치로 보았다. 결국 그의 논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점점 이루어져 가는 과정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는 사람으로 태어나실 때부터 완전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파괴하는 이론 체계로 볼 수 있다.
이런 헤겔의 ‘변증법적 원리’가 더 무섭게 적용된 것은 성경신학에서였다. 바우르(Ferdinand Christian Baur, 1792-1860)는 헤겔의 발전 이론을 신약성경 연구에 적용했다. 헤겔의 이론을 받아들인 그는 튀빙겐 학파의 창시자로 모든 역사적 발전은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적 원리’에 적용된다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는 메시아적 유대교 곧 정(正)에서 출발 바울신학에서 반(反)으로 작용하여 3세기 바울과 베드로의 신학을 총괄하는 합(合)의 단계인 로마 가톨릭교회가 출현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역사발전의 논리에 의해 신약성경의 각 권의 저작 연대와 저작자의 재조정을 시도했다. 그래서 이런 연구를 통해 그는 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만이 바울의 저작이라는 실로 경이로운 이론을 내세웠다. 왜냐하면 이 책들만이 반(反)의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헤겔과 바우르의 이런 영향을 받고 독일신학에 또 다른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역시 튀빙겐 대학 교수였던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 1808-1874)였다.
슈트라우스는 예수의 지상의 생(生)을 성경에 기록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 수 있다고 하며 이것은 예수를 한 인간으로 보고 관찰할 때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마태복음을 최고의 가치 있는 복음으로 보고 성경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그러나 기적 자체를 가능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합리주의자들처럼 기적을 송두리째 매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런 모든 기적들은 소박한 예수의 모습을 뒤덮고 있는 신화(神話)라고 했다. 이는 예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를 초인간으로 보려는 데서 파생된 신화 조작이라고 단정했다. 그래서 이 신화를 다 걷어내고 순수한 인간 예수에 대한 모습을 볼 때 진정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독일신학이 19세기에 급격히 변하면서 자유주의의 물결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 신학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19세기 말 기독교신앙을 도덕적 가치로 규정한 자유주의 선구자로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을 들 수 있다. 리츨은 칸트의 도덕적 감정이 실천적 확실성의 기초라는 이론과 슬라이에르마허의 종교적 의식 강조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슬라이에르마허의 종교의 감정을 개인적인 의식의 규범적 가치로 인식해서는 안 되며 기독교 공동체 즉 교회의 의식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리츨이 주장하는 의식은 사변적 추상적 지식과는 관계없이 실제적이고 인격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리츨은 이런 종교적인 의식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의 영감설은 도출할 필요가 없고 일반적인 역사적 연구방법만 가지고도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인격적 관계의 강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 구원의 메시아로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도덕선생으로 계시되었다고 했다. 리츨을 거쳐서 그의 영향을 받은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이 나왔고, 1890년에는 리츨을 뛰어넘은 종교사학파(宗敎史學派, The Religion of History School)들이 독일교회에 등장했다. 종교사학파들은 종래의 기독교의 우월성은 인정하지만 종교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보편화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일반종교 중의 하나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종교사학파들은 기독교도 고대 극동 아시아의 일반적인 모든 종교와 같은 배경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대표적인 학자로서 ‘기독교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Social Teaching of the Christian Church, 1931)을 저술한 트뢸취(Ernst Troeltsch, 1865-1923)가 있다.(*) 글쓴 이 / 심창섭 (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