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 교회사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53) 근대 세계교회사

19세기세계교   

(4) 19세기 미국교회    

  • 1차 영성각성운동(1735년-1755년)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와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에 의한 미국의 제1차 부흥운동은 상당기간 영향을 미쳤다. 교회 수가 증가했고 그 여파로 각 지역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도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 사무엘 데비스(Samuel Davies, 1723-1761)는 조나단 에드워드의 뒤를 이어 프린스턴대학(Princeton University) 총장이 되어 설교를 통한 영적 각성운동을 주도했다.

프린스턴대학은 이 전통이 남아 있어 그가 죽은 지 10년이 지난 후 지역적인 부흥운동이 프린스턴대학에서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영향이 수년간 미국 전역에 퍼져 나갔다. 1773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29명의 졸업생 중 3명이 주(州) 지사가 되고 23명이 복음의 사역자가 되어 활동할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은 1776년부터 1786년까지 있었던 영국과의 독립전쟁(American War of Independence)으로 인해 사회적 상황이 여러 가지로 바뀌었다. 북미주의 영국 식민지였던 13개 주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미합중국으로 자주적인 공화정(共和政) 체제를 갖추어 자신들의 문화를 이룩하고 방대한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독립한 미국은 영국이나 유럽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신세계에 대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다.

독립전쟁의 결과 이렇게 좋은 것도 많았지만 그러나 미국인들의 신앙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전쟁의 한 현상인 사회 공중도덕의 훼손과 개인 행동규범의 저질화 등이 나타났다. 또 주일(主日)이 무시되고 기독교신앙의 여러 가지 전통적인 신앙관이 위협을 받았다. 전쟁을 치른 후 미국교회의 영적생활이 18세기 말기에는 상당히 쇠퇴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의 교회의 외침보다는 땅의 현실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현실추구의 신앙으로 사람들의 의식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여기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과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이었다. 이들은 건국 초기의 지도자들로서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신앙은 이성론자(理性論者)들의 이론대로 이신론(理神論, deism)을 따랐다. 그들의 중심 사고(思考)는 인권과 자유의 회복이었고 신앙을 배제한 인간적인 안목으로 미국사회 건설을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프린스턴대학에도 이 영향이 미쳐 1782년경의 프린스턴대학은 영적 공황(恐慌) 상태가 올 지경이었다.

  • 2차 영성각성운동(1790년-1840년) 

그러나 갑자기 미국의 영적 각성운동의 조짐이 프린스턴대학 등을 중심으로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버지니아 주 햄프든시드니대학(Hampden-Sydney College)에까지도 새로운 신앙운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래서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의 회개와 기도 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곧 미국의 제2차 대각성운동이 햄프든 시드니 대학에서부터였다.

뉴잉글랜드에서도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다. 150개 이싱의 교회들은 성령의 특별한 역사를 힘입고 새로운 신앙의 열심을 회복했다. 이 기간에 예일대학(Yale University)의 학생 230명 가운데 3분의 1이 회심하는 대역사가 일어났다. 에드워드의 손자였던 디모디 드와이트(Timothy Dwight IV, 1752-1817)는 예일대학 총장이 되어 학생 신앙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총장직을 맡은 후 6개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관해서 설교했다. 또한 학생들과 공개적으로 성경의 영감설(靈感說)을 토론하기도 했다. 이런 총장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동부 뉴잉글랜드의 회중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부흥운동에 대해 서부의 교회들은 현격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서부의 교회들은 동부의 교육받은 자들의 점잖고 지성적인 신앙생활에 싫증을 느꼈으며 이런 경향은 테네시 주나 켄터키 주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켄터키 주에서 장로교 목사들이 중심이 되어 감리교, 침례교와 함께 천막집회(Camping meetings)를 열기 시작했다. 때로는 이 집회에 2-3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와 일주일 동안 집회를 지속하곤 했다.

사람들은 당시의 부흥운동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켄터키 주에서의 부흥운동은 여건상 부흥이 꼭 필요한 때에 온 것이었다. 불신앙이 판을 치고 신앙은 소멸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흥운동은 불신앙을 깨뜨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지한 인상을 남겨 주었다.”

이 지역 부흥회는 18세기 초처럼 심하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인 발작, 신체의 경련, 울음 등 극단적인 형태의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을 신앙의 요체로 자처하는 경향도 깊어갖다. 어쨌든 이 부흥운동은 미국 서부의 도덕적인 생활 개선에 기했다. 그런데 이 부흥운동의 대표자는 신학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장로교 목사인 찰스 피니(Charles Grandison Finney, 1792-1824)였다.    

그는 새로운 방법으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예배 시에 순서를 갑자기 바꾼다든가 거칠고 반복적인 언어를 구사하기도 했다. 이런 피니의 예배 인도 방법은 지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던 동부에서도 환영을 받을 정도였다. 그의 이러한 부흥운동의 영향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으며 매일의 기도회와 평신도의 교회 지도 참여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피니는 1835년에 새로 설립된 오하이오 주의 오벨런대(Ohio obellen university) 학장이 되었고 1846년에는 그의 조직신학 강의를 간행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모든 교리의 진실성 여부는 그것이 구원에 기여하느냐 못하느냐에 의존한다고 강론했다. 미국에서 일어났던 이 부흥회는 몇 가지 공헌을 남겼다.    

  • 2차 영성각성운동의 긍정적인 결과

첫째, 부흥회를 통해 조직된 소그룹 모임인 자발적 조직을 통해 외국선교의 조직이 활성화 되었다. 윌리엄스대학(Williams College)의 학생 다섯 명이 인도 선교사로 지원하여 떠났고 미국 해외선교위원회가 1810년에 조직되었으며 곧 침례교회에서도 해외선교협회가 설립되었다. 뒤이어 1817년에는 장로교가 1818년에는 감리교가 1820년에는 성공회가 해외선교회를 조직했다.

둘째,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한 활동과 성경 반포에 기여한 것이다. 1816년에 미국성서공회가 설립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주일학교연맹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1825년에는 미국책자협회가 조직되었다.

셋째, 도덕성 회복과 인도주의 향상이었다. 사람들의 건전한 삶을 위해서 금주, 절제, 성수주일, 노예제도 폐지 운동 등을 전개했다. 메인 주(State of Maine)는 금주법(禁酒法)을 주법으로 정하기도 했다.

부흥운동의 여파가 이렇게 사회 문화운동으로 전개되면서 미국 사회 전체의 발전에 자극제가 되었다. 이런 영향으로 각 교파는 교인들의 숫자가 증가 추세를 보였다. 감리교는 1784년 1만 5천명에 불과 했던 숫자가 2백만을 넘었다. 장로교 역시 수적 발전을 가져왔다.

  • 2차 영성각성운동의 부정적인 결과 

물론 이 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현상도 무시할 수 없다.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의 분열(分裂) 이유는 자유주의자들의 이 운동에 대한 극렬한 반대로 인해 야기되기도 했다. 그리고 1815년 이들은 유니테리언(Unitarian)이란 이름으로 독립했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특히 칼빈의 예정론을 공격했다.

코네티컷 주(State of Connecticut)에서도 반대의 물결이 일어났다. 부시넬(Horace Bushnell, 1802-1876)이라는 목사는 부흥회를 비판하였고 기독교신앙은 광란과 경륜의 정서적인 반응이 아니라 조용한 생활을 통해 집안에서의 교육을 통한 훈련이라고 했다. 이렇게 말함으로 감리교나 경건주의의 부흥사들이 말하는 구원의 길에 대한 반론을 제시했다.

장로교도 분열로 이어졌다. 1807년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온 캠벨(Thomas Campbell, 1777-1844)은 펜실베이니아 주(State of Pennsylvania)에서 목회하면서 누구나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이 노회에 문제가 되었으며 그는 노회에서 치리를 받았다. 여기에 반발한 캠벨은 노회를 탈퇴하고 교리나 신조의 표준 없이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융합을 외치면서 1832년 제자단을 조직하여 분립했다.

그 후 노예문제로 미국장로교는 남북이 갈라졌는데 노예제도를 찬성하는 남부는 1864년 미국장로교회(PC USA)를 조직했고 반대하는 북부에서는 1869년 아메리카합중국 장로교회(PCA, 북장로교)가 조직되었다.

루터교도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루터교의 목사로서 부흥운동을 옹호하였던 슈무커는 독일 사람과 스칸디나비아 사람을 중심으로 미국 루터교 총회에서 분리해 나가면서 미국 루터교회가 전통적인 루터에서 떠났다고 비난했다. 1867년 그들은 새 총회를 조직했고 에어리 산에 또 하나의 루터신학교를 세웠다.    

19세기 미국 개신교 분열의 주된 원인은 부흥운동이 아니라 노예문제였다. 노예문제는 교파에 관계없이 발생한 지역적인 대립이었다. 남부교회들은 노예제도를 인정했으나 북부교회들은 대부분 노예제도에 대한 반대 입장을 취했다. 1843년 미국 감리회가 노예를 소유한 교인을 제명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남부교회들은 이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 반발로 인해 남부의 감리교회는 1845년 분리해서 나갔다.

침례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844년 노예를 소유한 선교사를 외국에 파송해 달라는 앨라배마 주(State of Alabama) 침례교협의회의 요청을 미국 침례교 선교국의 거절이 발단이었다. 미국 침례교 선교국은 노예제도를 인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허락이 불가능함을 주장하자 1845년 남부에 있는 침례교회는 남침례교협의회를 구성했다.

  • 미국 신학교의 전성시대

19세기는 또한 부흥의 영향으로 미국에서 신학교의 설립이 성황을 이루었다. 일찍이 1784년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뉴 브를스윅에 신학교를 세웠고, 1794년에 크세니아에서 피츠버그신학교의 전신이 설립되었다. 1808년에는 회중교회의 신학교인 앤토버신학교가 설립되었고, 1812년에는 장로교 신학교인 프린스턴신학교가 뉴저지에 세워졌다. 1819년에는 유니테리언의 영향으로 하버드 신학부가 세워졌고, 회중교회에서는 예일대학 신학부를 세웠다.    

  • 미국사회에 신흥종파와 이단의 발흥

19세기 미국교회에 기존교회의 영적 무능과 형식적 신앙의 매너리즘에 반대하여 부흥운동이 일어났지만 동시에 신흥종파 운동이 발생했다. 침례교인 가운데 농부였던 밀러(William Miller, 1782-1849)라는 사람은 구약의 다니엘서를 읽다가 주의 재림을 계산하여 1843년에 주님이 재림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예언을 추종하는 자들은 1845년 재림파를 설립하고 1863년에 제칠일안식교를 정식으로 발족했다.

몰몬교는 조셉 스미스(Joseph Smith, 1805-1844)가 1827년 신비의 계시를 받고 뉴욕 맨체스터 근교에서 비밀문자로 된 몰몬경(Book of Mormon)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책 내용은 아무나 알 수 없고 마술적 안경을 쓰고 번역 후에 원본은 천사가 회수해 갔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공식적으로 몰몬교회가 세워진 것은 1830년 뉴욕의 페이예르(Fayene)교회였다. 그리고 영(Brigham Young, 1801-1877)이 교단의 지도자가 되었다. 창시자 스미스는 일부다처제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실천하기도 했다. 몰몬교는 여러 지역에서 박해를 받았으나 유타 주의 솔트 레이크 시로 이주하여 그들의 사업의 성공과 함께 발전하였다.

  • 해외선교의 눈을 뜬 미국교회

19세기 후반 미국교회는 유명한 전도자 무디(Dwight Lyman Moody, 1873-1899)가 등장하여 미국의 19세기의 마지막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복음전파와 해외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무디는 생키와 함께 전도여행을 시작하여 새로운 형태의 찬송가를 만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그는 1873년과 1883년에 영국에까지 건너가서 집회를 인도하여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시카고에 무디성경학교(Moody Bible Institute)를 세워 많은 젊은이들을 복음의 사역자로 배출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또한 매사추세츠의 헬몬산 집회를 통해 세계적인 선교비전을 갖도록 학생들을 인도하였고, ‘우리시대 안에 세계의 복음화’라는 슬로건을 내건 많은 학생들이 선교에 헌신하였다.

  • 19세기는 미국교회의 격동기

19세기 미국교회는 열정적인 복음주의자들의 교회부흥을 위한 몸부림이 있었지만 근대문명이 몰고 온 지식의 보급 특히 과학지식의 발달과 인본주의의 대두로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도전은 막을 수가 없었다. 새로운 성경연구 방법은 전통적인 성경의 견해를 무너뜨리고 창세기의 기사(記事) 등도 큰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진 일부 교수들과 교인들은 성경의 무오(無誤)를 제창하고 보수를 다짐하는 운동을 벌였다. 이 일을 위해 록키 산이나 나이아가라에서 여러 차례의 집회가 있었다.    

1895년 이들은 드디어 나이아가라에서 회의를 갖고 ‘다섯 가지 근본주의의 입장’을 표명하면서 근본주의라는 새로운 신앙의 사조를 창출하였다. 이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서 대표적으로 나선 사람은 장로교회의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 교수였고 반면 자유주의의 입장에 서서 이를 저지하려는 대표적인 사람은 침례교의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 1878-1969)이었다. 매이첸 교수는 또한 프린스톤의 자유주의를 반대하여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했다.

19세기는 또한 미국의 기독교가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였다. 글래든과 라우쉔부쉬와 같은 사람은 자유주의의 계통의 진영에서 주로 일어난 ‘사회복음’이라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어떤 개인 중심의 박애사상이나 도덕적인 실현을 통한 개혁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의 불의에 대한 공동체적인 대응과 사회정의(社會正義)의 실현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실현된다는 가능성을 믿는 자들이었다. 또한 19세기 말의 자유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사상이 바로 역사에 대한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땅 위에 유토피아(utopia)의 건설의 가능성을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학교에서는 기독교윤리학이 개설되었고 교과과정의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각 교파의 총회에서도 사회부(社會部)가 신설되는 등 기독교의 사회운동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9세기의 미국교회는 유럽에서 몰려온 이주민들로 인해 종교분포가 형성된 시기였다. 1790년 최초로 미국의 인구조사가 이루어졌을 때 400만의 인구가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중후반부에 무려 550만 명의 유럽인들이 이주해 왔다. 1840년 이후에 아일랜드 인들이 대거 이주해 왔고 특히 1845-47년 사이에 아일랜드에 감자 흉년이 들었을 때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때 대부분의 이민들은 로마가톨릭 교인들이었다.    

화란에서도 이주민들이 들어왔다. 1830년 화란의 칼빈주의자들의 일부가 정부와 교리적으로 이완된 화란개혁교회에 반발하다가 기독교 개혁교회라는 교단을 결성하였고 이들 중 많은 이들이 1846년에 미국의 미시간 주에 정착했다. 오늘날의 칼빈신학교를 중심으로 기독교 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를 중심한 교단을 형성하고 있다.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의 이주민들은 대부분 독일인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루터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서부지역에 자리 잡았으며 그 결과로 북아메리카의 서부지역은 루터교파가 주류를 이루는 개신교 세력을 형성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스칸디나비아에서 100명 정도의 이주민들이 들어와서 루터교인들의 숫자를 증가시켰던 것이다. 이때 대 각성운동으로 일어난 세계선교의 열기는 젊은 신학생들과 의학도들에게 선교의 비전을 심어주었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1858-1902)는 이러한 선교비전의 열기에 편승하여 1885년 개신교 복음을 들고 조선의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글쓴 이 / 심창섭(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끝 > 

미국의 영적 대각성운동(大覺醒運動, Great Awakening)은 18세기 초에 일어난 앵글로색슨계 미국인의 종교 역사에서 빠르고 극적으로 나타난 신앙부흥운동이다. 이 운동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서유럽을 휩쓴 종교운동의 일부로 유럽의 경건주의와 정적주의와 관련이 있고, 영국의 존 웨슬리가 이끈 복음주의와도 관련이 있다. 대각성운동은 영국 식민지 당시 여러 가지 상황들로 인해 나타났다. 뉴잉글랜드의 메마른 합리주의와 중부 식민 주들에 분포해 있던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예배의식에 집착한 형식주의, 그리고 남부의 목회감독소홀 등을 반대하고 극복하여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계약을 새롭게 하려고 한 것이다. 부흥운동은 주로 네덜란드 개혁교회, 회중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등에서 일어났으며 이들 대부분이 주로 칼뱅주의 자였다. 그러므로 대각성운동은 복음주의적 칼뱅주의(개혁주의)가 발전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