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 다원주의 비판

종교다원주의자들은 퍼즐처럼 세계의 모든 종교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가설(假說)이며 종교다원주의가 진리라는 것을 그들 자신도 증명하지 못하는 허구(虛構)일 뿐이다.
PART Ⅲ
시작하는 말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후기 근대주의)이 신학계는 물론 우리 한국사회의 각 분야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modernism, 근대주의)에 대항하여 일어난 새로운 정신적 사조(思潮)로서 21세기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조이다. 보수주의적 시각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 현대의 자유주의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반드시 자유주의자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막스 테일러(Mark C. Taylor, 1945- ) 같은 해체주의(Deconstructing Theology) 자도 있으나 현대 로마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 1928- )같이 온건한 입장을 취하는 자도 있고, 미국의 과정신학(Process theology) 자 그리핀(David Ray Griffin, 1939- ) 같이 현대주의의 메커니즘(mechanism)에 반대하면서 유기체적 사상을 강조하는 자도 있고, 린드벡(George Arthur Lindbeck, 1923-2018) 같이 후기 현대사회에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다시 발견하고자 시도하는 신(新) 루터교 신학자도 있다. 필자도 다가오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개혁신학이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신학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 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종교신학(Theology of Religions)이 한국에 상륙하여 그동안 신학계에 너무나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종교다원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종교사상이기도 하다.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이미 한국의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 크나큰 물의를 빚어내었다.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한국의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한국기독교학회를 중심으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에서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해 일관된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타종교의 구원 불가능성을 선언하고 있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의 제 유형을 살피고 그 다음 그것의 종교신학인 종교다원주의를 비판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Ⅰ. 포스트모더니즘 신학
1.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196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비단 문학, 예술, 건축이나 철학에서 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모드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일종의 지성적 문화운동이다.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란 말은 오늘날 방의 장식에 있어서 부조화(不調和), 빌딩의 디자인에 있어서 불균형(不均衡)의 미(美), 텔레비전 광고에 있어 파편적인 영상의 무의적인 결합과 관능과 본능에 호소하는 원초적인 장면, 문화적 단편화 과정, 전위적(前衛的)인 옷 스타일, 광란적인 록음악, 소설에 있어서 자아 소멸과 무주제(無主題), 철학의 주제 분산화, 핵의 파멸에 의한 인류의공포, 대학의 쇠퇴, 정치 이념의 다원화, 정보화 내지 후기 산업사회 시대에서의 지식 등 우리 문화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사용되고 있다.
포스트모던 사회란 과학, 문학, 예술 등 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변형(變形) 된 형식과 의식(意識)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이질성(異質性)과 다양성(多樣性)이 강조되고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한 사회, 영웅이 사라지고 구체적인 나와 네가 모두 존중 받는 사회, 하나의 거대한 담론(談論) 즉 절대정신과 생산력 등이 통일성과 전체성에 있어서 사회를 지배하거나 통제하지 않고 상이(相異)한 담론의 주체가 수행하는 다양한 언어게임이 허용되는 사회요, 국가 기관의 통제력이 감소되고 개별적인 시민단체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이다.
또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불연속성(不連續性)과 연속성(連續性)이 교차(交叉)하는 개념이다.
- 포스트모더니즘의 불연속성
모더니즘의 불연속성은 한계를 극복하고 뛰어넘는다는 의미이다. 좁은 의미로는 전통(傳統)을 붕괴(崩壞)시키고 허물어버린다는 해체주의(解體主義, de-constructionism)의 뜻이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계몽주의시대 이래로 현대주의가 찬양하고 표방한 인간 이성(理性)의 합리성, 과학의 신뢰성, 진리의 객관성과 보편성에 대한 비판(批判)과 반작용(反作用)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은 이런 계몽주의가 이룩한 성과와 업적을 붕괴하고 해체시키는 지적 내지 문화적 운동이다. 급진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은 현대주의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업적을 극단적으로 허물어뜨리는 운동이다. 예컨대 신(神), 진리, 주체성, 초월적 이성, 엘리트주의, 남성 중심, 서양 중심적 사고방식에 반항(反抗)한다.
- 포스트모더니즘의 연속성
포스트모더니즘의 연속성은 긍정적인 의미로서 모더니즘과의 연속선상에 있다. 모더니즘의 정신인 전통에 대한 비판과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과 진리관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나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런 현대주의에 대한 비판과 단절은 역설적으로 현대주의가 표방하고 있는 인간 중심주의 복권(復權)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은 인간의 이성(理性)과 과학기술의 성과(成果)를 수단으로 하여 인간을 무지와 권위의 종속과 가난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기술의 메커니즘(mechanism)은 인간을 과학기술의 제도에 종속시키고 노예화함으로서 인간을 비(非) 인간화 하였다. 이러한 현대주의적 인간 속박과 인간 노예화에 대한 문화적 비판이란 현대정신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 정신적 기초 위에서 현대주의의 역기능만을 비판하고 단절하려는 시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의미에서 현대주의와 연속선상에 있다.
2.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
(1) 비합리주의(非合理主義)
현대사회 해체주의(解體主義)의 선구자로는 독일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신(神)의 죽음과 더불어 인간이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되는 초인(超人)의 도래(到來)를 외쳤다. 그가 죽었다고 선언한 신(神)은 기독교적 신(神)이기도 하지만 근대적 합리주의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니체의 외침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이 근대정신의 지고(至高)의 원리로 설정한 절대정신의 종언과 인간 이성(理性) 자체의 죽음을 선언한 것이다. 또 니체의 선언은 현대사상의 기초가 되는 인간 이성의 해체를 말한다. 그는 생(生)의 의지가 인간 삶의 근원이요 기초가 되는 것으로 보았다.
근대의 계몽주의는 이성이 지니고 있는 합리성과 그 원리에 따르는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과 보편성과 실증성을 진리 인식의 지고(至高)의 권위로 설정했다. 또 계몽주의는 인간을 넘어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했다. 계몽주의는 객관적 진리의 설정과 더불어 인간 도덕성에 기초한 통일되고 단일적인 가치를 추구했다. 또한 사회정신의 통합과 균형 그리고 유일한 입장과 접근과 동질성을 추구했다.
이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이성의 권위와 도덕성과 객관적인 가치관을 무참히 무너뜨린다. 료따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는 계몽주의 구성을 인간해방 사상으로 유보 없이 받아들이는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의 모더니즘 옹호 입장을 비판하면서 “아유슈비츠(Auschwitz)라는 단어 하나로 근대적인 이성의 이상(理想)에 종말이 알려졌다.”고 선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또 인간의 감정과 의지에 기초한 상대적인 진리관과 도덕관과 가치관을 내세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性) 해방과 더불어 전통적인 가족제도 및 결혼에 대한 거부, 이혼의 급증, 독신자의 급증, 동성애(homosex)의 사회적 허용, 정치적으로는 독재 권력의 거부, 지배 이데올로기의 거부 등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근대과학이 주창했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眞理)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적 진리도 관찰자의 가치와 주관적 기호(嗜好)가 깃든 상대적(相對的) 진리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개인의 경험과 민족과 문화 집단의 특수한 진리만이 있다. 다양한 가치와 태도, 분산화 불균형, 다양한 시각과 접근, 이질성을 강조한다.
철학의 영역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부르짖고 있는 자들은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자들로 푸꼬(Michel Foucoult), 데리다(Jacques Derrida), 라깡(Jacques Lacan), 료따르(Jean Francois Lyotard) 등이다. 이들은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드 등 회의주의(懷疑主義) 사상가들의 정신을 이어받으면서 과학의 가설을 포함해서 현대문화 체계의 경험주의적, 합리주의적 휴머니즘 가설에 도전하고 있다.
이처럼 이들은 현대적인 것에 대한 총체적인 부정을 시도하고 있다. 이들은 근대사상이 당연시해 온 일체의 보고(寶庫)를 문제시한다. 이들은 마르크스와 프로이드로부터 ‘회의의 해석학’(hermeneutic of suspicion)을 수용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를 극단화시켜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드주의에 대하여도 긍정적 입장을 거부한다. 이들은 근대적 데카르트적 사고가 기초하고 있는 자아의 확실성을 파괴한다.
(2) 다원주의(多元主義, pluralism)
모더니즘(modernism)은 인간 이성의 합리성에 입각한 총체적 진리와 가치와 사회문화의 일원성에 입각한 획일화 내지 통합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총체성과 전체와의 조화를 거부한다.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자 료따르는 “총체성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자. 제시할 수 없는 것의 증인이 되자. 차이를 활성화하고 차이의 명예를 구해내자.”고 선언했다. 그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큰 이야기’(the metanarrative)를 거부한다. 사회와 역사과정에 대한 일목요연한 서술이란 없다고 선언한다. 메타 이야기의 불신은 이성의 몰락을 의미한다. 큰 이야기의 대안으로서 모든 이야기들의 동등한 권리와 민주화가 요구된다. 료따르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포스트모던 지식은 결코 권력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차이(差異)들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섬세하게 다듬고 표준에서 벗어난 것을 참아내는 우리의 능력을 강화시킨다. 그것은 자신의 이성을 전문가들의 일차원성에서가 아니라 발명가들의 다(多) 차원성에서 취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체화와 총체화에 반항하면서 언어게임, 시간, 인간 주관, 사회와 역사과정에 대한 파편적인 서술을 강조한다. 이러한 파편화와 편린화란 인간정신과 문화운동의 다양성을 시사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한 언어와 사상과 문화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 지식은 더 이상 획일적인 언어나 사상과 문화가 가치와 기준을 설정할 수 있도록 군림하지 못한다.”
또 그는 논리 실증주의는 경험적으로 실증될 수 있는 사실의 언어만이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실증될 수 없거나 검증될 수 없는 말은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가 말하는 사실의 언어란 ‘1+1=2’, ‘개나리꽃이 핀다.’, ‘화창한 봄이 왔다.’ 등 논리적인 언어, 사실을 서술하는 언어, 증거를 댈 수 있는 언어이다. 이러한 검증될 수 있는 언어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료따르는 또 말하기를 “그 외 미학적 발언이나 윤리적 발언이나 형이상학적 발언은 무의미하다. 미학적 발언인 ‘저 장미꽃은 아름답다.’는 사실이 아닌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사실이 아닌 그것은 무의미하다. 윤리적 발언인 ‘선을 행하라.’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 윤리적 명령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의미가 없다. 형이상학적 발언인 ‘하나님은 참 신이시다.’라는 말은 사실로서 검증될 수 없다. 때문에 그것은 무의미하다.”라고 한다.
모더니즘은 진리를 초기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한 바와 같이 언어 실증주의에 입각한 의미의 획일성에 기초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초기에 주장했던 의미의 획일성을 깨고 나왔다. 그는 언어게임(language game)을 주장한다. 모든 발언은 그 기능에 따라서 진행되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의 사항이나 이데올로기의 지배는 붕괴되었다.
1950년 다니엘 벨(Daniel Bell)은 이미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예고했다. 그의 예언은 1980년대 말 동구권의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가시화되었다. 그렇다고 반드시 자유주의가 승리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자유주의의 한계는 지나친 자유의 강조에 따른 방종(放縱)과 무질서와 공동체의 유익을 떠난 개인중심의 개인주의이다.
또 윤리와 도덕의 절대적 규범도 무너졌다. 이혼, 혼전 관계, 혼외 관계, 동성연애가 허용된다. 남녀관계에 있어 전통적인 절대규범이 통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규범과 윤리가 아니라 상황 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판단에 기초한 행동인 상황윤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윤리로 등장한다. 윤리와 도덕에 있어 단 한가지의 기준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기준과 윤리적 지침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된다.
세계가 전자(電子)로 축소화되고 하나의 지구촌이 형성되면서 동서양의 문물이 지구촌 구석구석에까지 유입되고 문화의 획일성(劃一性)이 사라지고 문화의 다양성(多樣性)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도 지금까지는 미국에 이민(移民) 간 사람들이 백인 사회에 동화되어 백인화 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유색인종들의 이민이 점차 늘어나면서 이들이 가지고 온 전통문화와 언어를 인정하고자 하는 문화의 다양성 허용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역으로 한국이나 일본 등 전통적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서구 유럽과 미국의 문화가 유입되면서 전통문화와 서구 미국문화가 공존하거나 상호 결합하는 문화의 다양성이 야기되고 있다.
3. 포스트모던 신학운동
포스트모던 신학운동으로는 신정통주의 유형, 새 패러다임 유형, 새 존재론 유형, 신학적 다원주의 유형, 해방신학 유형 그리고 해체주의 유형 등이 있다.
- 신(新) 정통주의 유형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되살리려고 한다.
- 새 패러다임 유형은 복음과 후기 현대(post modern)의 요구에 맞는 새로운 신학의 사고를 요구한다.
- 새 존재론 유형은 데카르트적인 이원적 사고를 유기체적인 사고로 대체한다.
- 신학적 다원주의 유형은 기독교의 신앙고백적인 전통과 성경 일변도의 교리에 저항 한다.
- 해방신학 유형은 약자와 빈자에 대한 지배 권력에 저항 한다.
- 해체주의 신학은 다원주의와 전통적 권위와 권력에 대한 저항과 해체를 추구하고 있다. 이것이 본래적인 의미에서 탈(脫) 현대주의 신학이라 말할 수 있다. 해체주의 신학은 전통신학은 해체하고 기독교를 비(非) 신학(a/theology)으로 변형시킨다. 여기에 대표적 신학자가 테일러(Mark C. Taylor)이다.
(1) PM의 신(新) 정통주의적 유형(PM, post-modernism)
이 유형은 모든 신학이 상실한 기독교 전통으로의 복귀를 시도하는 운동이다. 이 유형의 대표적 신학자는 미국 예일대학 신학부에서 가르치고 있는 린드벡(George Lindbeck)이다. 린드벡이 말하는 모던(現代, modern)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근대는 17세기 과학의 혁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모던의 타당한 지식은 경험에 기초한 체계적 탐구인 과학으로부터만 도출 될 수 있다.
둘째, 근대과학은 메타언어(metalanguage)인 사실언어를 제공하고 인간 사유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사실 언어만이 참 언어라고 보고 그 결과로 성경의 언어는 제2의 언어가 되어버렸다.
현대주의의 영향 아래 발생한 자유주의신학은 신학적 사상의 표준으로서 중세교회의 권위에 대항하여 인간의 이성(理性)을 내세웠다. 그리고 인간 이성의 합리성과 과학적 객관성과 보편성을 기독교 교리와 성경 메시지 이해의 기준으로 설정하여 성경을 인간의 이성이 설정한 합리성의 심판대 앞에 서게 했다. 그 결과 현대문화는 영성(靈性)을 상실했으며 교회조차도 성경 언어를 상실한 가운데 영적 비전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린드벡은 포스트모던(post-modern)을 다음과 같이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한다.
첫째, 사실언어로써 군림하던 과학의 진리 주장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20세기 물리학에 있어서 미립자의 발견과 더불어 일어났다. 미립자의 발견은 실재 자체가 확정할 수 없는 비결정적 성격을 지님을 인정하게 되었다.
둘째, 과학의 언어도 종교적 언어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집단의 관용어이다. 과학도 종교와 마찬가지로 ‘그 공동체의 살아 있는 관행 밖에서는 이해 불가능한 언어’이다.
셋째, 과학의 문화적 헤게모니는 종언되었다. 언어의 다원성이 당연시되는 시대가 포스트모던 시대이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인식론적 상대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 신학의 과제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상실한 기독교의 전통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실존과 이성을 강조한 나머지 성경을 상실하고, 기독교의 정체성(正體性)을 상실하고, 기독교 전통이 전승해 준 신앙이 나누고 교제하는 기독교 신앙 공동체를 등한히 했다.
린드벡은 현대신학이 파기(破棄)한 그들이 말하는 성경의 비과학적 요소들과 비이성적 신화(神話)와 제의(祭儀)와 이야기를 복권시키려 한다.
(2) PM의 새 패러다임 신학 유형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은 신학의 새 패러다임을 제안하고 있다. 그는 ‘포스트모던으로 가는 길’(Weg in die Postmoderne)을 신학의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신학적 혁명으로 묘사한다.
첫째, ‘새로운 신학의 프로그램’은 ‘다양한 긴장들, 변화하는 흐름들, 서로 다른 체계들을 이전보다 더욱 많이 직면하는 신학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큉은 지금까지 화려한 명맥을 유지해 왔던 신학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한다.
둘째, 이 새로운 프로그램은 “반(反) 계몽주의적으로 즉 전통적인 신앙 형태로 퇴각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현대의 유행하는 학문의 변화에 기회주의적으로 순응해서는 안 된다.” 큉은 여기서 전통주의로의 복귀나 자유주의에로의 영함을 함께 경고하고 있다.
셋째, 이 새 프로그램은 기독교 복음과 다가오는 21세기의 요구를 충족 시킬 수 있도록 기독교신앙을 지성적으로 책임 있게 해명해야 한다. 그리하여 큉은 기독교신앙이 새로운 신뢰성과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큉은 “포스트모던이란 모던(modern)을 극복하는 것이며, 모던의 내재적 비판이며, 계몽에 대한 계몽이다.”라고 이해한다. 그것은 모던을 헤겔적인 의미에서 ‘지양되어야 하는 패러다임’으로 본다. 여기서 지양이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첫째, 사회적 착취와 지성적인 미개의 지양이다. 여기서 그 계몽주의의 비판적 힘을 긍정하고 있다.
둘째, 이성과 진보의 미신적인 신앙의 부정, 민족주의, 신민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부정이다.
셋째, 억압되고 왜소화된 사고의 차원에서 다양하고 개방된 사고를 향하여 열리는 새로운 초월성의 지향이다.
(3) PM의 새 존재론 유형
캅(John Cobb)과 그리핀(David R. Griffin)은 포스트모던을 존재론의 재구성으로 특징짓고자 한다. 이들은 화이트헤드(Whithead)로부터 배운다. 화이트헤드는 그의 저서 ‘과학과 근대세계’(Science and the Modern World, 1925)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현대가 역사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전환기들 중의 하나라고 보았다.
이 저서에서 그려진 과학과 종교, 철학의 새로운 방향은 그의 주저 ‘과정과 실제’(Process and Reality)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것은 실제를 신(神)과 더불어 자기를 실현하며 나아가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정체된 것과 현존적인 것은 비(非) 진리로 드러난다. 진리는 역동적인 과정이며 실제는 역동적인 과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캅과 그리핀은 화이트헤드의 과정 사상을 건설적으로 수용하면서 데카르트적 이원론을 거부하고 새로운 존재론을 제시한다. 새 존재론의 통찰은 사물을 기계론적 관점에서 보려는 모든 사고를 거부하고 사물들은 유기체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리하여 학문의 분야에 의한 지식의 단편화, 관념론, 유물론적 원자론, 개인주의 등이 모두 데카르트적 이분법에서 기인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과정 사상가들은 근대성이 남기는 유산인 자기비판 정신, 인격에 대한 관심, 인간 자유에 대한 헌신, 탐구의 자유 등은 철저히 보존하고자 한다. 또 유기체적인 사고로서 물질과 정신, 육체와 영, 자연과 역사, 과학과 종교, 개인과 사회의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한다.
(4) PM의 신학적 다원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원주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다원주의 정신이란 현재주의가 주장한 보편성과 동일성, 질서와 획일, 균형과 조화, 통일과 종속(從屬)에 저항한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특수성과 차이성, 혼돈과 질서, 불균형과 부조화, 균형과 저항을 강조한다. 따라서 다원주의 정신이란 해체주의의 문화 신학적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 신학적 다원주의는 신앙과 진리에 있어 시간적 격차, 공간적 격차, 인종적 격차, 성격 격차, 계급적 격차를 강조한다.
첫째, 시간적 격차이다.
이것은 신앙과 진리란 시간 속에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과학의 신앙이 현재의 신앙을 획일적으로 지배할 수도 없다. 그리고 현재의 신앙으로 미래의 신앙을 획일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신앙과 진리란 시간적 격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넘어선 보편적 진리와 신앙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신앙과 초대교회 당시의 신앙과 중세시대의 신앙과 종교개혁 당시의 신앙과 현대의 신앙에는 시간적 차이가 존재하며 획일적인 진리란 없다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종교다원주의가 오늘날 다원주의 시대가 요청하는 신학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인간을 떠난 객관적 신앙과 진리의 규범을 거부한다. 그럼으로써 기독교 신앙관과 진리관의 보편성과 연속성이 거부된다. 그리하여 기독교신앙의 정체성이 거부된다.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신경이나 칼케돈신경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 각 교회사에 나타난 신앙고백이 영향력을 미칠 수 없기에 이른다.
둘째, 공간적 격차이다.
이것은 신앙과 진리란 공간의 차이 속에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느 특정한 처소의 신앙과 진리가 보편적으로 획일적이고 절대적인 신앙과 진리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중동지역에서 발생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동남아 지역에서 발행한 힌두교와 불교, 동북아시아에서 발생한 유교와 도교 등은 공간적인 차이에서 발생한 종교들이다. 이들 종교 사이에는 획일적인 신앙이나 진리 주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간의 이질성과 진리성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해방 신학자들과 민중 신학자들은 서구신학을 비판하면서 제3세계의 신학을 정립한다. 여기서 신앙과 진리의 장소 편파성이 강조된다. 그리하여 그것이 갖는 공간을 넘어선 보편성이 거부된다.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가지고 처소의 제약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시공을 넘어서는 진리성이 거부된다.
셋째, 인종적 격차이다.
이것은 신앙과 진리란 인종의 차이에 따라서 달라진 다는 것이다. 인종에 따라서 인간적 사회적 경험이 다르고 종교적 인식과 해석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백인들은 지금까지 지배적인 시각에서 가진 자와 수탈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신학적 사고를 해왔다는 것이다. 제임스 콘(James H. Cone)이 그의 혹인신학에서 부르짖는 바와 같이 짓눌린 자는 압제자가 보지 못하는 차원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의 인종적 편파성이 강조된다. 그리고 인종의 편파성을 넘어서서 보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신앙과 진리의 규범이 거부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서구 백인 중심의 지배주의 신학과 이에 대항하는 제3세계의 황인과 흑인의 신학이 강조된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제3세계의 신학으로 간주된다.
넷째, 성격 격차이다.
이것은 남녀 성이 다르기 때문에 인식의 차이와 시각이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남성 지배적인 문화에서 남성 신학자들에 의존한 신학이란 가부장적인 신학이요 신(神)도 가부장적인 표상으로 이해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여기서 여성신학은 여성의 관점에서 남성들이 도외시한 인식의 영역을 문제시한다. 여성신학은 여기서 여태까지의 서구신학을 남성 지배적 신학으로 보고 이를 거부한다. 그리하여 여성의 해방을 위한 새로운 여성신학을 정립하고자 한다. 특히 여성 해방 이데올로기에 지배되는 여성신학은 지금까지의 서구신학을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신학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결한다.
신학적 다원주의가 진리와 가치와 문화가 갖는 역사적, 문화적, 공간적 제약에 관하여 역설하는 것은 일면의 진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다원주의의 심각한 문제점은 진리의 객관성과 인간을 넘어서 있는 하나님의 창조적 진리와 계시적 진리를 거부하는 데 있다. 인간의 상대성을 넘어서는 진리와 가치의 객관성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의 늪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5) PM의 해방신학 내지 민중신학 유형
기존하는 종교와 진리체계와 지배체계에 대항하는 이런 신학의 유형이 바로 남미의 해방신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이다. 이 유형은 근대적으로 지배한 정통신학과 정치적으로 지배 계층의 하수인 역할을 해온 제국주의 사고에 대한 반항(反抗)을 표명한다. 이 유형은 획일적이고 독단적인 신앙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며 억압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의미한다. 지배 권력과 기존 세력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란 획일적이고 독단적인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부정한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이질적이지만 비판적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진리의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도외시한다. 이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탄압과 억압과 말살과 수탈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적 계급투쟁론과 프롤레타리아 해방 실천이 요청된다고 본다.
한국의 민중신학은 이런 해방신학의 1970년대 한국 상황적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갖는다. 첫째, 양자는 사회, 정치, 경제적 억압 상황에서의 경제적 빈곤, 둘째, 정치적 억압과 소외, 인권 침해, 셋째, 사회와 문화적 소외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인식을 심화시켜 나갔다. 넷째, 양자는 신구약 성경을 사회 경제사적인 시각에서 해석한다. 민중신학에 해방신학과 더불어 ‘야훼 하나님은 떠돌이 민중해방의 하나님이며 예수는 민중이며 함께 부활하시는 분’으로 본다.
(6) PM의 해체주의 신학 유형
미국의 막스 테일러(Mark C. Taylor)는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을 파괴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의 포스트모던 입장은 극단적 포스트모더니즘으로서 전통적 신학을 해체하고 있다. 그는 신학과 사상과 종교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탈(脫) 현대주의 신학운동을 축하한다. 그는 니체의 저술을 다시 읽음으로써 영감을 받은 프랑스의 탈구조주의자인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로부터 해체주의적 영감을 받고 있다. 그의 신학적 주체는 신학의 탈구조(脫構造) 또는 해체(解體, deconstruction)이다.
막스 테일러는 그의 저서 ‘오류 범함: 포스트모던 비/신학’(Erring: A Postmodern A/theology)에서 하나님, 자아, 신의 창조 세계의 확실성, 진리의 객관성, 선과 악의 구별, 역사의 의미 등의 전통적 개념들을 해체시키고 있다. 막스 테일러의 해체된 신학은 이렇게 더 이상 기독교 신학이 아니라 하나의 비(非) 신학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신학적 해체주의의 철저한 결론이다.
4. PM에 대한 개혁신학의 수용과 비판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회와 개혁신학에 대한 하나의 큰 도전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기독교회와 개혁신학을 위해 하나의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긍정적 측면을 수용하고 부정적 측면을 비판하면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현대 후기(post modern)를 향한 시대적 사명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
(1) 포스트모더니즘의 긍정적 측면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理性) 중심의 세계관을 극복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폭로함으로써 인간 실존의 유한성과 한계성을 드러낸다. 모더니즘은 계몽주의의 유산을 물려받아 인간 이성을 진리와 신앙의 최고 재판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제 인간 이성의 바벨탑은 무너졌다. 이것은 성경의 계시적 사고를 위해서는 하나의 기회이다. 물론 기독교 신학은 비합리주의로 퇴각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신학은 합리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동시에 비합리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기독교적 비판주의에 충실해야 한다.
둘째,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일변도 세계관의 한계성을 지적했다.
모더니즘은 과학을 세계 이해의 열쇠로 보았다. 그래서 기독교가 말하는 기적과 초월적 세계가 모더니즘에서는 평가 절하되거나 과학적 세계관의 한계 안에서 인정되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역동적인 세계관은 세속주의 세계관의 한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신비적 세계를 향하여 열리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위해서는 하나의 기회이다.
(2)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정적 측면(비판)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은 전통의 권위 특히 기독교의 전통을 부정하고 있다.
그것은 교회의 가르침과 건전한 권위까지도 부정하면서 기독교를 정체성의 위기를 빠뜨리고 있다. 전통이 건전한 이성(理性)으로 비판될 수는 있다. 그러나 전통은 맹목적으로 부정될 수는 없다. 전통과 관계나 연결 없는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도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 건전한 대안과 개혁은 전통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합리적 대안 제시를 통하여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포스트모더니즘은 탈(脫) 경전화를 주장함으로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다.
여기서 기독교신학은 그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여 하나의 종교학이 되어버린다. 기독교신학이 종교경전(성경)을 무시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부질없는 겉치장거리다. 그리하여 신학은 더 이상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의 종교학으로만 기능하다. 그리고 성경은 여러 종교경전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린다. 여기에 오늘날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경전을 이미 상실한 후기 현대 기독교의 위기가 있다.
셋째, 진리의 시간적, 공간적, 인종적, 성적 격차와 상대성의 지나친강조는 객관적 진리와 가치의 존재를 부정하는 상대주의 내지 회의주의에 빠진다.
기독교는 진리와 신앙의 상대주의나 회의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역사 속에 들어오나 상대주의나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신적 진리는 시간적, 공간적, 인종적, 성적 차이나 상대성을 넘어서면서 이러한 차이와 상대성을 종합하는 통일성과 보편성을 보장한다.
넷째, 다원주의 사고는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를 한낱 세상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의 종교로 격하시켜 버린다.
제도(制度)나 의식(儀式)으로서 기독교는 외형적으로 세상의 다른 종교처럼 하나의 종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종교를 넘어서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그의 계시의 유일회적 성격이 기독교를 종교를 넘어서는 계시로서 특정지우기 때문이다.
Ⅱ. 종교다원주의
1. 정의
종교다원주의(宗敎多元主義, Religious pluralism)란 하나님의 구원 계시가 기독교뿐만 아니라 타종교에도 있으며 기독교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 아니라 타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현대 기독교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유주의신학의 종교운동이다.
종교다원주의와 지금까지의 자유주의신학 사이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자유주의신학이 기독교 전통교리의 어떤 부분을 부인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면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 교리에다 무엇을 더 붙이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또 자유주의신학이 예수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데 반하여 종교다원주의는 예수의 신성(神性)도 믿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신성도(神性) 인정하는 입장이다.
이 종교다원주의 운동은 1961년 뉴델리의 제3차 WCC 총회에서 인도 신학자 더바난단(Devanandan)에 의하여 제기되었으며 공식적으로 논의되고 주장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신(神) 중심적 모델’(theocentric model)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칼 바르트 이래 주장된 그리스도 중심 신학의 종교 배타주의를 넘어서고 있다.
2. 종교다원주의의 주장
WCC계의 인도 신학자들 사마르타(S. J. Samartha), 파니카(R. Pannikar), 토마스(M. M. Thomas)는 기독교와 힌두교의 융합을 주장하고 있다. 사마르타는 힌두교를 비롯한 타종교 안에서 그리스도가 얼마든지 있다고 주장하면서 힌두교의 범(梵, Sanskrit, Brahman) 사상으로 기독교 삼위일체 신(神)을 용해시키고 있다. 파니카도 “그리스도는 브라만 안에 있으며 범(梵)을 실현한 자이므로 힌두교 안에 ‘익명의 그리스도’(the unknown Christ)가 있다.”고 주장한다. 토마스도 “힌두교 교인이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해 종교를 바꾸거나 새로운 공동체로 이동해 갈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문화공동체에 그대로 속해 있으면서 ‘기독교적 힌두교인’(ein christlicher Hindu)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종교다원주의는 힉(John Hick)과 니터(Paul Knitter)에 의해 서구신학의 자유주의 종교신학 운동이 체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힉(John Hick)은 기독교 내지 예수 그리스도가 종교적 헌신의 중심이라는 전통적 종교관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Copernican revolution)을 선언했다. 그는 모든 종교적 신념과 실천의 중심에는 ‘하나의 신적 실재’(one divine reality)가 있으며 모든 주요 종교들은 이 실재에 대해 역사적, 문화적으로 제약된 인간의 반응이라는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했다.
니터(Paul Knitter)는 예수의 선교와 인격은 본래 왕국 중심적이거나 신(神) 중심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초대교회에 이르러 교회의 메시지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기독론의 진화론적 변형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는 ‘신(神) 중심적 기독론’(theocentric christology)을 주장하면서 기독론의 언어를 ‘사랑 언어’(love language)로서 해석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구원(救援)과 신비(神祕)가 예수에게만 제한되어 있지 않고 다른 자에게도 열려 있다고 주장한다.
3. 종교다원주의 주장에 대한 비판
(1) 신관(神觀)
종교다원주의의 신관(神觀)은 모든 종교의 배후에는 최후의 실재(實在)로서의 신(神) 즉 ‘신(神) 너머 신(神)’이 존재한다는 종교철학적 가설에 불과하다. 과연 모든 종교체험이 동일한 신적(神的) 실재를 가리키는가? 이에 대해 종교 사학자들은 모든 종교에 하나의 공동적 신적인 근거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의 신(神)에 대한 이 가설은 종교들 사이의 차이성을 간과하는 허구에 불과하다.
힉(John Hick)에 의하면 야훼(Yahweh), 알라(Allah), 순야타(Sunyata), 브라만(Brahman), 니르바나(Nirvana)는 ‘실재의 원래적 현현’(authentic manifestation the Real)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런 신적 실재에 대한 이미지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야훼나 알라는 인격자(personae)를 나타내는 데 반해 순야타, 브라만, 니르바나는 비(非) 인격(impersonate)을 나타내고 있다. 힉은 이 두 이미지의 차이란 신적 실재가 여러 가지가 아니라 동일한 실재에 대한 인간의 종교 전통의 다양한 체험과 해석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각 종교의 전통에서는 야훼나, 알라나, 브라만이나, 니르 바나나 모두 힉이 주장하는 것처럼 종교적 실재에 대한 ‘이차적 표현’이라고 이해하지 않고 이들 각자가 모두 종교적 궁극자라고 하는 최종적 존재론적 원리를 주 장하고 있다.(그림 / 종교다원주의 신학자자들 생각은 기독교도 세계 여러 종교 중 하나일 뿐이다.)
야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고의 신적 존재요, 알라는 이슬람교도들에게, 브라만은 힌두교들에게, 니르바나는 불교도들에게 최종적 신적 실재이다. 이들은 이처럼 각자 고유한 존재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야훼’에 대한 유대교와 기독교적인 신(神) 이해는 존재론적으로 지존자요, 인격적인 창조자요, 종교저인 심판자이다. 이는 니르구나 브라만(Nirguna Brahman)의 힌두교 개념이 갖는 일원론적 함축성이나 불교가 말하는 ‘선(禪) 속의 무(無)’(Nothingness in Zen)에 대한 존재론적으로 궁극적인 이해와는 상충되며 이들 궁극 자들 즉 신(神)은 서로 간에 공통점을 찾을 수 없으리만큼 전혀 다른 것이다.
(2) 그리스도
종교다원주의는 다른 종교에도 그리스도가 있으며 다른 종교도 구원의 길이라고 본다. 이들은 기독교와 타종교간의 연속성을 가능케 하는 접촉점으로서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칼케돈의 정통기독론(Chalcedonian Christology)을 거부하고 신(神) 중심적 기독론(Theocentric Christology)을 제시한다. 기독교의 정통 기독론으로는 “인류의 큰 다수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시킨다고 본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나사렛 예수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심오한 신화(神話)로 해석할 것을 주장한다.
힉에 의하면 ‘성육신 신화’란 예수가 우리의 충분한, 효율적인, 구원하는 신(神)의 접촉점(our sufficient, effective, and saving contact point with God)이라는 것을 전달해 주는 언어 방식이다. 힉은 예수를 문자적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신(神)에 관해 전적으로 인식한 자로 본다. 그래서 힉은 역사적 예수를 ‘아주 잘 알려지지 않은 나사렛 사람’(the largely unknown man of Nazareth)으로 묘사하기에 이른다.
힉은 예수가 그리스도가 된 것을 진화론적인 모델(evolutionary model)로 설명한다. 초대교회의 신비스러운 부활 체험의 충격과 주위 희랍과 로마문화의 영향이 역사적 예수를 먼저 ‘메시아’로 진화했고 그 다음에는 은유적인 ‘신의 아들’로 진화했으며 최종에는 문자적으로 ‘신의 아들’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존재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고 본다.
니터(Paul Knitter)도 역사적 예수에 관한 지식 가능성에 대한 힉의 회의론적 견해에는 찬성하지 않으나 힉의 진화론적 기독론의 모델에 동의하고 있다. 이 같이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제시하는 기독론의 진화론 설명은 전혀 성격적,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와 부합되지 않는다.
예수에 대한 칭호가 인자, 메시아, 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으로 진술된 것은 진화가 아니라 발전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예수는 처음부터 ‘주(主)’요 ‘하나님’이시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칭호는 30년과 50년 사이의 예수에게 적용될 수 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종말론이고 메시아적인 사신(使臣)으로 선포했다. 그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속에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이 임박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수치스러운 죽음과 올리우심으로 해석되었던 부활은 특별한 종말론적 구속 사건의 통일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기독론 사고(思考)를 ‘선재(先在)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했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의 경륜(經綸)이 그를 통하여 실현되는 것을 알았고 그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셨다.
4.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대응
개혁주의 신학은 변혁주의(變革主義) 종교 신학을 정립해야 한다. 타(他) 종교와의 관계 정립에 있어 변혁주의적 착상(着想) 은 근본주의 신학이 취하는 배타주의도 자유주의자들이 취하는 연속주의도 거 부하고 불연속성과 연속성, 배타주의와 포용주의를 변혁주의적 태도 속에서 역설적으로 통일시킨다.
배타주의적 태도는 근본주의와 바르트주의에서 보는 것처럼 다른 종교를 우상숭배요, 미신이라고 정죄하면서 타종교를 멸시하게 된다. 이런 태도에서는 타종교에 대한 바른 이해가 결여되기 때문에 타(他)종교인에 대한 전도(傳道)는 있을 수 없다.(사진 / 요 14:6,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뿐이다.)
연속주의는 자유주의와 종교다원주의에서 보는 것처럼 기독교를 역사에 나타난 다양한 종교 전통의 하나로 본다. 연속주의는 기독교의 계시를 특별한 계시가 아니라 종교사에 나타난 여러 종교계시들 중의 하나로 본다. 여기서 기독교는 일반종교와 일치되고 기독교적 교리와 의식은 쉽사리 타종교의 그것과 상호 교환되는 보완되면서 혼합주의가 되어버린다.
이에 대해 변혁주의적 태도는 배타주의가 갖는 장점인 기독교가 타종교에 대해 갖는 독특성과 불연속성 그리고 연속주의가 갖는 장점인 기독교가 타종교에 대해 갖는 공통점과 연속성을 취한다. 동시에 배타주의가 갖는 단점인 타종교를 우상숭배로 간주하면서 타종교에 나타난 일반계시까지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연속주의가 갖는 단점인 기독교 계시를 일반 계시들 중 하나로 동일시(同一視) 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변혁주의 태도는 타종교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취한다. 타종교도 하나님의 일반계시이기 때문이다. 일반계시로서 타종교는 초월적인 신(神)에 관해 지시하고 있으며 경건성과 도덕성을 함양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일반계시는 인간의 죄의 타락 때문에 부패되어 참 하나님을 가리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타종교는 복음에 의해 조명(照明)을 받고 그 본래적인 함축성인 하나님을 알도록 지도(指導) 받아야 한다. 여기에 변혁주의 태도가 있다. 변혁주의 태도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여기서는 대화의 4가지 태도가 언급될 수 있다.
첫째, 타종교에 대한 연구와 대화를 지향한다.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도 타종교에 대한 대화를 제안한다. 바빙크는 다른 종교를 우상이요, 미신이라고 비웃는 한 다른 종교인을 멸시하게 된다고 하면서 역설한다. 상대방의 종교적 확신을 존중하여야 한다.
둘째, 타종교의 경건성과 도덕성으로부터 배운다는 열리고 겸허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기독교는 무교(巫敎)의 지성(至誠), 불교의 선(禪) 정신, 유교의 사회적 규범 등으로부터 성경적인 경건성에 부합하는 요소를 발견하고 배울 수 있다.
셋째, 종교인들 사이의 만남은 종교적 진리에 관한 진지한 만남일수록 종교 간의 만남으로 끝나지 않고 종교가 증언하는 신(神) 들의 투쟁(鬪爭)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투쟁이란 인격적인 상호비방이나 중상(中傷)이 아니라 감동과 사랑이 동반된 설득이요, 권유요, 증언이다.
넷째,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신앙의 확신과 고백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우월성을 증언해야 한다.
이런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최종성에 대한 증언을 통해 복음은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고 타(他) 종교인들의 회심과 변혁이 야기된다.
맺는 말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의 해체주의 유형은 진리와 종교에 상대성과 다원성을 주장하면서 해체주의 신학을 전개하며 또한 종교다원주의 신학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해체주의 신학은 아직도 전통과의 극단적인 단절(斷切)을 선언하고 전통을 부정(不定)하기 때문에 일부 극단 신학자들 사이의 사변적(思辨的) 놀이로 끝나리라고 본다.
그러나 한스 큉이 제시하는 새로운 신학의 패러다임 유형이나 린드벡이 제시하는 성경적 언어의 복권과 기독교 전통의 재발견하고자 하는 신정통주의 유형은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이들의 제안은 개혁신학이 후기 현대사회에서 신학의 새로운 모델을 찾고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는데 하나의 지침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과정신학이 제시하는 새 존재론 유형은 그 범신론적 성격을 제거한다면 유기체 사상을 성경적, 개혁신학적으로 유용화(有用化) 시킬 수 있다. 그리고 해방신학 유형이 제시되는 지배 권력의 압제에 대한 정의로운 실천도 그 마르크스적인 계급 투쟁론을 제거한다면 성경적, 개혁신학적으로 유용화 될 수 있다.
개혁신학은 이런 신학적 흐름 속에서 다가오는 포스트모던 상황을 도피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개혁신학은 ‘후기 현대’(後期現代, post-modern)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관과 섭리에 대한 신앙을 확고히 해야 한다. 개혁신학은 이 신앙 안에서 미로(迷路) 속에 있는 현대인을 향하여 복음을 바로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 시대를 향하여 바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개혁신학은 ‘후기 현대’(後期現代, post-modern)를 향해 해석학적 신학이 되어야 한다.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에 대한 하나의 심각한 도전(挑戰)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우리에게는 복음 선포의 기회이기도 하다. 개혁교회는 자기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발견하고 ‘후기 현대’(後期現代, post-modern)가 가야할 사상적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성경적이며 기독교적 세계관(世界觀)과 인생관(人生觀)을 제시하는 것이 요청된다. 그리고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도전에 대해서는 우리가 변혁주의적 종교신학을 그 대안(代案)으로 제시해야 한다.(*) 글쓴 이 / 김영한 교수(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철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Ph.D., 철학박사,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Th.D., 신학박사, 한국개혁신학회 회장,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초대원장,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 개혁주의 이론실천학회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