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20)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20)
예수님의 대속사역의 유익
제 16 주일(문 40-42)
요절 :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문 40 : 그리스도께서 왜 스스로 낮아져서 죽음에 까지 이르셨습니까?
답 :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 이외의 것으로는 우리의 죄를 보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 41 : 그리스도께서 ‘장사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심은 그가 정말 돌아가셨음을 확증하기 위해서 입니다.
문 42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는데 왜 우리 역시 죽어야만 합니까?
답 :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보상이 아니라, 단지 죄짓는 것을 종식하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16주일에는 십자가 대속의 진리를 살펴보려고 한다. 사도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되셨고, 그리고 음부에 내려가셨음’을 고백한다. 지난 시간에 이어 질문 40-42에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이를 고백하는 성도의 죽음과의 관계를 살펴보게 된다.
우리 주님께서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말씀하시며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즉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신 것’이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는가? 이렇게 예수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이 점에 대하여 공부해 보기로 한다.
1.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 때문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0-42문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필요성, 예수님의 죽으심의 확인, 그리고 그 예수님의 죽으심과 성도의 죽음과의 관계’ 등을 다루며, 예수님의 이러한 수난으로 부터 성도가 얻게 되는 유익을 생각하도록 한다.
(1) 예수님의 죽으심의 필요성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외치신 가상칠언(架上七言) 가운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시고 죽으셨다. 그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뜻이다(막 15:34).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왜 그렇게 잔인하고 비참하게 죽도록 그의 요청을 외면하신 것일까? 이미 지난 5-6 주일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함이라는 진리를 배웠다. 그런데 40 문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그것을 요구한다.’는 말을 덧붙여 가르치고 있다. 무슨 의미일까?
이 부분에 관한 설명은 창세기 2:16,17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명령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하나님은 이렇게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 것을 조건으로 하는 언약이다. 만약 이 언약을 어길 경우 그는 반드시 죽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조건으로 아담과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대로 우리조상은 불행하게도 이 귀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인간은 언약을 파기한 벌로 사망에 지배받는 존재가 되었고 그 죄의 값은 계속 후손들에게 전가되고 있다. 이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인간들에게 내려지는 심판인 것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한 (롬 5:17a)” 결과라고 설명한다.
결국 이렇게 인간은 죄 값으로 영원히 사망의 세력에 억눌린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이런 운명에 처해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어느 인간도 구원할 수 없는 가운데 자신이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빌 2:6-8).
하나님은 인간을 타락하게 한 사탄의 책임을 물어 저주하시며 놀라운 복음을 예언하셨다.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창 3:15)을 약속하신 것이다. 원시복음이라 부르는 이 말씀에 따라 마침내 우리 주님은 마가복음 10:45의 말씀과 같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는 희생제물로 자신을 주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는 대속사역인 것이다.
이를 히브리서 기자는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라고 설명한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거룩한 피조물로서의 영생을 누릴 특권을 상실한 인간에게 퍼 부으실 형벌을 아들 예수에게 담당시켜서 십자가에 처형하신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는 충족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로 인하여 예수의 십자가 대속은 일어난 것이다.
(2) 대 속죄 제사의 의미
구속역사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긍휼과 사랑의 길을 마련하신 역사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 후손들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는 언약의 길을 내셨다.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선택하여 구출해 내셨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이적과 기사로 시내산 아래 모으시고 율법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성막을 마련하게 하시고 그곳에서 백성들을 만나셨다.
백성들이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제사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죄를 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1년에 한 차례씩 대 속죄제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써의 자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제사를 수종들 때, 제사장들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먼저 자신의 죄를 사하는 절차를 행한 후, 깨끗한 몸으로 백성들이 죄 사함 받을 수 있는 절차를 수행해야만 했다. 대제사장의 이러한 절차는 해마다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했다.(참고 레 16:11-22) 그 이유는 그들 역시 죄인이기 때문이다.
이를 히브리서 기자는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히 5:1-3)고 설명한다. 자신을 먼저 깨끗하게 한 후 대제사장은 백성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사역을 수행한 구약의 제사제도는 하나의 예표적인 것이었다.
이를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9:24-26에서 예수께서 구약을 종식하고 십자가를 지신 것은 더 이상 구약시대에 행했던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고”,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신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대제사장으로서의 영원한 사역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죽으심은 바로 인간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해결하시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갈 수 있도록 마치 구약의 제사장이 그랬던 것처럼 직접 자신이 희생제물 되어서 단번에 온전한 제사를 드리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룬 대속의 십자가는 첫 언약의 실패로 죽음의 세력에 굴복한 인간들에게 다시 영원한 유업을 주시겠다는 새 언약의 기초인 것이다.(참고 히 9:11-15)
이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예수님의 사역은 죄인들이 양심으로 지은 것을 해결해 주시는 유일한 사죄의 방식이다. 즉 인간 제사장이 해결할 수 없는 그 일을 예수께서 완벽하게 수행하신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필요성을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고 요약했다.
(3) 대속의 진리를 믿는 믿음
이렇게 이루어진 구원의 진리를 온전히 믿고 이를 고백하는 자에게는 놀라운 은혜가 임한다. 그에게는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고, 죄에서 해방되어 진정으로 자유인의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바울이 선언하는 복음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즉 예수의 십자가 형벌로 사망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십자가에서 완수하실 뿐만 아니라,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2. 예수 죽으심의 확인
요리문답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질문한 후 바로 예수께서 ‘장사되셨다’는 사실의 의미를 공부하도록 질문한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땅에 장사(葬事) 되신 의미가 무엇일까?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을 통하여 이 사실을 확인하며 공부해 보자.
(1) 장사되심의 의미
복음서의 저자들은 복음서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여 남겨주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마 27:57-60)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눅 24:21-23)
이러한 기록은 비교적 자세하여 예수께서 어떻게 장사되었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흔히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수님이 기절했다는 주장(혼절설, 昏絶說), 예수님의 시신을 제자들이 훔쳐 숨겼다는 주장(도적설, 盜賊說) 등을 거부할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발생한 사망 사건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당시 로마 군사들이 십자가에 달린 죄인을 빨리 죽게 하려고 예수와 함께 처형된 다른 죄수 두 사람의 다리는 꺾었으나, 예수는 이미 죽어 그럴 필요가 없었으며(요 19:33), 다른 군사들은 이미 죽은 예수의 시신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으나 예수님은 고통스러운 반응을 하지 못했다(요 19:34). 그 이유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했을 때 빌라도는 “벌써 죽었느냐?”며 순순히 내어주었던 것(막 15:43,44)은 정말로 예수께서 확실하게 죽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2)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묻히심
신약의 저자들은 이렇게 죽어 땅에 장사되신 예수님의 사망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가 어떻게 적용된 사건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흙으로 돌아감(창 3:19)을 의미한다. 둘째, 아담 즉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께서 첫 번째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무덤에 장사된 것이다. 셋째, 앞서 36문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므로 잉태되고 출생할 때부터 갖고 있는 나의 죄를 그의 순결함과 완전한 거룩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려준다.”는 답변처럼 성도들은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죽음까지도 죄로 오염된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한 이들에게 형벌에 대하여 퍼부으시는 죄의 값을 예수께서 친히 담당하여 죽고 장사되므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은 완료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한편 이런 형벌에 처한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성도들을 온전히 구원하시는 구주가 되셨다. 즉 우리 주께서는 이렇게 음부의 열쇄를 가지고 무덤을 여신 구원자이시다.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8)
3. 주님의 죽으심과 성도의 죽음과의 관계와 그 유익
질문 42에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면 우리가 또 죽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사람의 죽음과 어떤 관련이 있는 지를 생각하게 한다.
(1) 예수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과의 관계
성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심판으로 죽음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 것은 죄를 지은 사람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죽음을 죄 없으신 예수께서도 동일하게 받으셨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대신 죽어 주심으로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다는 복음의 도리를 생각하게 한다. 이 진리에 대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히 9:27)라고 설명한다.
문제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도 당한 ‘죽음’이란 심판을 우리 모두가 당한다는 점이다. 정말로 죽음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모두 죽는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과 우리 인간의 죽음과의 차이점은 문 42에 대한 답변에서와 같다. 즉 예수의 죽으심은 대속의 죽음이지만, 우리 인간의 죽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되는 상태로 들어가는 죽음인 것이다.
(2) 죄짓는 행위를 종식함
그러면 불신자의 죽음과 신자의 죽음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불신자의 죽음은 이제까지 지은 죄에 대하여 선언하신 영원한 심판의 자리에 가게 되는 상태에 돌입하는 것이지만, 신자의 죽음은 우선 죄를 짓는 행위를 종식하는 것은 불신자와 일반이지만, 그 다음은 영생에 들어가기 되는 복된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관문인 셈이다.
신자는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 자체가 죄와 항상 싸우고 갈등하는 삶이지만, 죽음으로 이젠 더 이상 죄와 싸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죄의 영향으로부터 해방되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위로이며 복이 되는 것이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은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신다.”(시 116:15) 고 했으며 계시록에서도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요계 14:13b)고 하시며 성도의 복된 죽음을 높이 평가했다.
(3) 영생에 들어감
이렇게 자기의 죄를 대신 형벌을 받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성도에게는 그 죽음이 더 이상 심판이 아니며 또한 저주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성도의 죽음은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영원한 영생에 들어가는 복된 순간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라고 선언하면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 리시리라.”(롬 8:9-11)고 강력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대속의 진리를 믿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가? 이 땅에서 사는 인간 모두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 안 에서 더 이상 그 죽음을 두려워하 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오히려 그 죽음이 영원한 영생으로 들어가게 하는 하나의 관문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가신 순교자들 모두가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무서운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받아드렸던 것이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고백한 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라는 동일한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 품에 안겼던 것이다.
결 론
우리 모두는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는 불쌍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구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한 무덤에서 장사되셨기에 우리의 죄는 예수에게 완벽하게 전가된 것이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예외 없이 죽는다. 그러나 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정죄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진리를 믿음으로 그에게는 의롭다 선언(칭의 선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도의 죽음은 귀하고 복되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죽음이 죽음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영생의 길로 나아간다고 선언한다. 그는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
그렇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든지, 죽던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성도들은 더 이상 사망이 지배하지 못하는 복된 영적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죽음 그 자체가 독한 화살과 같이 한평생 그에게 독이 되어 고통과 두려움이 빠져 절망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더 이상 죄에 대한 저주가 아니며, 절망과 심판이 아니다. 이미 이 모든 죄에 대한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시고 장사지낸바 되셔서 해결해 주셨다. 이젠 더 이상 죄가 목표 삼고 우리의 인생을 향하여 쏘는 사망의 화살은 성도들에겐 효력이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이렇게 설명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1-58)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지는 대속의 진리는 바로 죄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다. 이 진리를 믿고 고백하는 자는 더 이상 죄와 사망에서 허덕이지 않고 예수 안에서 누리는 복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글쓴 이 / 박병은 목사(덴버 둘로스장로교회 담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