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3)
유일한 위로와 삼위 하나님

제 1 주일(문1, 문2 계속)

3. 위로와 앎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두 번째 질문은“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 당신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이다. 이 질문은“어떤 위로를 원하는가?”“위로를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혹은“위로를 얻기 위하여 믿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등을 묻고 있지 않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 질문과 답은 인간이 경험하고 바라는 바를 막연하게 알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에 근거하지 않고 이미 이루신 삼위 하나님의 구속의 진리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 즉 영적 지식의 내용에 근거하여 깨달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룬 바를 만족함으로 보람과 위로받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이 이 땅에서 이루고 경험하는 바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며, 그리고 불완전한 위로가 될 수 있을지언정 영원한 위로는 결코 될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이 이룬 업적이나 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음으로 위로를 받으려 하지만 그것 역시 참된 위로가 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진정한 위로는 삼위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진리를 온전히 알 때 진정성 있는 위로, 참된 위로, 영원하고 완벽한 위로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참된 위로와 참된 지식은 병행한다고 하겠다. 이 영적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알고 깨닫는 지식을 말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것을 영생이라고 규정지으셨다.“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1) 삼위 하나님과 위로

질문 1에서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쳤다. 이를 다룸에 있어서 먼저 성자 하나님 그리고 다음은 성부 하나님 마지막으로 성령 하나님의 순서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순서는 삼위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론(基督論)적인 접근으로만 가능함을 암시한다. 즉 사도 요한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심”(요 1:18)으로 그 독생자 하나님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구원의 진리는 계시된 것이다. 즉 기독론 중심의 인식을 통하여 구원지식을 얻게 되고, 이를 매개체로 하여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우리에게 참된 위로 즉 구원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2) 성경이 말하는 위로와 능력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도록 하셨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건을 통하여 인식하게 하셨다. 이러한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이 사실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확실하게 고백하며 선언하였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즉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이 먼저 시행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 개개인에게 적용하심으로 성도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 가운데 참된 위로를 얻게 하신다. 앞에서 본 갈라디아 2:20의 말씀에서 나타나는 바울의 자기 존재의식은 바로 예수 십자가로 인하여 깨닫게 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확인함으로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자기 스스로의 노력과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자신의 존재가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속한 존재이며 자기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께서 살아 자신은 주님의 것이 되었음을 고백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록 육체를 갖고 살고 있는 인생이지만, 실상은 자신이 존재케 된 원동력은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를 믿는 믿음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즉 그는 결코 현재 자신이 살아가는 삶은 육신적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영적 삶이라고 확고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중요한 소속감을 확인한다. 불신자들은 인생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인생을 만들어 가려고 발버둥을 치고 그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하여 애를 쓰지만, 성도들은 자신을 사 주신 주님을 통하여 살게 된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며 살아가는 자들인 것이다. 신실한 성도는 진정 이렇게 자신을 살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그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된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 주님의 이 말씀은‘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통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알고 살아가는 존귀한 존재임을 가르쳐 준다.

이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십자가의 대속 사건을 믿게 하신 그 은혜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도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라고 고백하였다.

결국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는 그 사랑에 감격하여 기도할 때마다 위로를 얻고, 능력을 얻고, 또한 담대한 확신을 갖고 세상에서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는 더욱 자기 속에 내주(內住)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과 교제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려하며 그 뜻을 이루며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이 진정한 선을 이루어 가는 삶의 모습이요 참된 위로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놀라운 구원의 진리를 이렇게 설명했다.“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6-28)

여기에 성도의 소망과 삶의 의미가 있다. 오늘처럼 소망을 가지고 살기 힘이든 시대 속에서 소망하여본들 그 소망이 어디까지나 막연한 바램에 지나지 않을 뿐임을 잘 알면서도 그저 막연한 기대감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보혜사(保惠師)이시며 위로 자이신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참된 인생을 살아가게 하신다.

바울은 이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로서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1-4)

이는 성령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들어가게 하셔서 나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과 관계 회복을 이루어 그를 통하여 자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 그 분과 깊은 교제를 통하여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 인생의 전체가 복된 삶임을 알게 한다.

성도는 위로의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알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모습이 놀랍게 진술hel고 있다. 바울 사도는“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3-17)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소망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갈 때 이 구원의 진리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삶의 활력이 되며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성도들은 자신을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드려 남은 생애를 불태워 드리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헌신들은 결코 그 어떤 댓가를 기대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에 감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투신(投身)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주안에서 갖는 소망은 무엇인가? 다음의 말씀은 성도로 하여금 진정으로 구속하시고 삶의 목적을 가르쳐 주신 하나님을 위로자로 삼아 살아가는 자들이 가져야 할 목표점을 가르쳐 준다.“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여기에 우리 인생의 목표가 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의 존재의 의미와 성취해야 할 궁극적인 사명이다. 그것은 믿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요, 사명이요, 명령인 것이다.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 영광이 위로가 되고 삶의 원동력이 되고 목적이 되는 것이다.

4. 삼중적 지식으로의 성장
질문 2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 받는 성도가 반드시 알아야 할 영적 지식 세 가지 점을 가르치고 있다. 첫째, 죄와 죄의 비참함, 둘째, 예수의 구원을 받는 방법, 그리고 셋째, 감사의 삶의 방식이다.

사실, 이 세 가지의 영적 지식은 하나의 영적 지식의 세 방면이라 하겠다. 이 영적 지식은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단계적인 지식이 아니라, 각각의 면이 동일하게 나타는 구원의 지식인 것이다. 즉 이 구원의 지식을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깨닫는가에 따라 큰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되며 나아가 온전한 헌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 예를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을 통하여 확인해 보자.

첫째 인물은 구약의 다윗이다. 다윗 역시 항상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가며 비록 죄 가운데 허물로 사망의 음참한 골짜기로 다니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삶이었으나 더욱 더 위로와 안위의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before God) 살아간다는 의식(神前意識)으로 살아감으로 크나큰 기쁨과 위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을 얻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4,5)

다음의 인물은 신약의 바울 사도이다. 그는 고린도후서 1장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고후 1:3-5)

바울은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존재이어서 ‘위로의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구원받은 자신은 주님의 부름을 받아 복음을 전하면서 겪는 고난 속에 오히려 큰 위로를 얻어 좌절하지 않고 전적으로 주께 헌신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사역을 감당하면서 겪는 심한 고난 가운데서도 오직 주님으로 부터 위로를 충만히 받았기 때문이다.

결 론

이제 예수 안에서 누리게 되는 위로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며 무미건조한 세상적인 위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성도는 이러한 위로의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주신 것임을 알아 더더욱 구원 진리의 지식을 습득하는 일에 몰두해야 할 것이다. 성도는 이런 목적으로 위하여 살아가는 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깨끗하게 단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도 요한의 다음 말씀을 듣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나아가 사도 바울이 간절히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한 바와 같이 온전한 구원의 삶을 위하여 모두가 항상 기도하고 사모해야 할 것이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글쓴 이 / 박병은 목사(덴버 둘로스교회) < 다음에 계속 >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삿 2: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