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서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33) 은혜의 수단인 말씀과 성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33)
은혜의 수단인 말씀과 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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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 주일(문 65-68)

요절 :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문 65 :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사에 참여할 수 있다면 이 믿음은 어디로부터 옵니까?

답 :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성령께서는 거룩한 복음을 전파하심으로 우 리의 심령 속에 믿음을 일으키며 거룩한 성례를 시행하심으로 믿 음을 확증하십니다.

문 66 : 성례란 무엇입니까?

답 : 성례는 거룩하고 가시적인 표(標)와 인(印)입니다. 성례는 하나님께서 복음의 약속을 우리에게 더 충분히 선포하고 인치시기 위하여 사용 하시려고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 복음의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십 자가 위에서 단번에 성취하신 희생제사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 스럽게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영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문 67 : 그렇다면 말씀과 성례 둘 다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인 십자 가위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에 대한 우리의 믿 음에 초점을 맞추도록 의도되어져 있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통하여 가르치실 뿐만 아 니라, 우리의 전체 구원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리스도의 한 번의 희생제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성례로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십니다.

문 68 : 새 언약에서 그리스도께서 몇 종류의 성례를 제정하셨습니까?

답 : 거룩한 세례와 성찬 두 가지입니다.

지난 23번째 주일에는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하여, 24번째 주일에는 믿음과 행위에 관하여 공부했다. 25번째 주일에는 믿음이 발생하게 하는 기초에 대하여 다루고자 한다. 여기서 다루게 되는 것은 말씀과 성례(聖禮) 인데 이 두 주제는 죄인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로 ‘은혜의 수단’이라고 한다. 이 두 주제는 구원의 근거로서 믿음의 시작이 된다는 점에서 이를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1. 주제의 중요성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좋은 믿음 갖기를 원한다. 이 때 좋은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일까?

좋은 믿음하면 구약의 아브라함을 생각하게 된다.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가장 확실한 이유는 그가 백세에 얻은 아들인 이삭을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여 단번에 번제물로 드린 것이다.(창 22:1-18) 만약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좋은 믿음을 갖기 위한 조건이 아브라함처럼 아들과 같은 최고의 희생제물을 드려야만 한다면 누가 좋은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제물을 받으셔야만 그 사람의 믿음을 좋은 믿음이라고 하시는가? 중요한 것은 성경이 믿음에 관하여 말할 때 그 어느 곳에서도 그런 헌신을 요구하시며 믿음을 측정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혼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은 단순히 정성을 드리면 하늘이 감동하여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도구나 수단이 아니다. ‘믿는다.’(to believe)는 말 속에는 믿는 내용이 있고 대상이 있다. 영어는 그래서 ‘내가 너를 믿는다.’는 말을 ‘I believe in you.’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자신이 믿고 있는 바에 대한 내용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 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이 주제가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께 나갈 수 있으며, 믿음으로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모든 은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엡 6:23)

2. 성령 하나님의 말씀 사역

요리문답은 질문 65에서 ‘믿음의 기원’을 가르친다. 의롭다 인정받게 되는 수단으로서의 믿음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한마디로 “성령(聖靈, Holy Spirit)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니 당연히 독단적으로 우리에게 믿음이 발생하도록 어떤 일이든 하실 수 있다. 그런데 이 점만을 강조하면 신비주의(神祕主義)에 빠지게 되고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에 대해서만 강조하면 주관적인 주지주의(主知主義)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 속에 믿음이 발생(發生)하도록 하시는가? 확실한 것은 이 믿음을 성령께서 그저 주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발생하도록 그 어떤 수단(방법)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다. 그 수단이 바로 말씀 전파(설교)와 성례이다. 이 가운데 먼저 말씀 전파에 대해 살피고 다음 시간에는 성례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1)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어떻게 시작되면 그 믿음은 어떤 혜택을 주는가? 소위 믿음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에 관한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像)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證據)”(1절)라고 했고,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3a) 즉 믿음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행하는 갖가지 종교적인 어떤 고행(苦行)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바를 삶의 현장 속에서 확신하고 증거하며 살아가는 행위라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 속에서 믿음이 발생하는 것은 어떤 조건과 수준 그리고 업적과 공력을 갖추어 있을 때 그에 대한 보상(報償)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전적인 은혜로운 선물이라고 설명한다. 이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고 바울은 설명한다.

선물이란 주고 싶은 사람이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선물 은 받을 사람이 요청한다고 주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어떤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것으로 뇌물(賂物)이 된다. 성경은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즉 은사(恩賜)라고 가르친다. 이는 우리에게 그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그저 사랑으로 베푸시는 것이요 호의(好意)로 주시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임을 가르쳐준다.

(2) 믿음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은사(선물)로서의 믿음은 그렇다면 어떻게 주어지는가? 어떻게 믿음이 생기는가? 질문 65번은 다음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말씀 선포, 둘째는 성례이다.

성령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수단을 사용하셔서 죄인들의 심령 속에 믿음이 생기게 하시고, 그 믿음을 강화시켜 주셔서 성도가 확신 가운데 구원의 삶을 영위하도록 하신다. 이러한 내용을 요리문답 65-68문항에서 이 두 가지 주제를 다루되 65문에서는 말씀 전파를 나머지 문항에서는 성례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있다.

3. 은혜의 수단인 말씀의 신실한 선포

(1) 거듭남의 믿음이 발생하게 되는 원리

요한복음 3장에서 거듭남(born again) 즉 중생(重生)의 교리를 배울 수 있다. 예수께서 직접 이 거듭남의 진리를 가르치셨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요 3:3,5)고 하셨다. 그리고 이 거듭남은 “마치 바람이 불 듯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시고 임의로 일하셔서 발생하게 하신다.”고 하셨다.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니고데모는 비록 그가 당대 최고의 지식층에 속한 사람이었음에도 수준 이하의 질문을 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요 3:4) 이 같이 영적으로 어린아이 수준이었던 그에게 예수님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 3:10)라고 책망하시며 거듭남의 도리를 말씀하셨다.(참고, 요 3:11-21)

이렇게 영적(靈的) 거듭남은 인간의 지식수준과 사회적인 신분과 그 어떤 능력으로도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영적 거듭남이 오직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만 가능한 신비스러운 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2) 거듭나는 믿음의 발생 과정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말씀 사역 속에서 임의로 청중들 가운데서 벌어진 거듭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b)

이 말씀에서 보듯이 성령께서는 임의로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이는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믿음이 시작되도록 하심을 잘 보여준다. 이는 지금도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는 그 말씀에 대한 반응이 일어나도록 우리 속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이렇게 반응하게 되는 우리의 심령 속에는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믿음이 발생하게 되는 데 이 역시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이 두 사실에서 성령께서 말씀을 사용하실 때 그 말씀을 통하여 듣는 자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도록 하시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다음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8-10) 이렇게 구원의 믿음이 생기는 원리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 우선 말씀을 들어야 한다.
– 그 후 들은 그 말씀의 내용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
–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주님 의 사랑임을 받아드리고,
– 그 사실을 마음으로 고백할 뿐 아니라, 널리 입으로 시인하여 증거 할 때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말씀을 전파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은 비록 택함을 받은 자라도 말씀을 듣고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참고, 롬 10:13-15) 그러므로 믿는 성도들과 교회는 신실한 말씀 전파를 통해 불신자들이 말씀을 듣고 거듭나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마련하는 데 힘써야 한다.

(3) 말씀 전파의 장애물

한편 불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부르기까지는 큰 어려움과 장애가 있다. 그 이유는 인간 스스로 자신의 의지와 주관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말씀 전파의 효력에 대하여 낙심했던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실토했다.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롬 10:16b, 사 53:1) 이사야 선지자가 아무리 구원의 도리를 전해도 이를 듣고 반응하는 이가 드물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도 바울도 겪었다. 그가 복음 즉 예수 십자가와 부활을 전파하여도 이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믿는 자들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럴까?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의 마음이 강퍅하여 들은 말씀을 믿지 않고 배격했기 때문이다. 만약 믿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예외 없이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여셨기 때문이었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거듭나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되는 데 이런 일은 사람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셔야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실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사모하는 자들은 항상 시편 저자의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사도 바울은 이런 사역의 난제를 고백하면서도 끝까지 말씀 전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 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이처럼 성령께서는 성도를 예수 안에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삼으신다. 그 도구가 바로 ‘진리의 말씀’이다. 그러기에 선포된 말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참으로 더디고 드물게 효력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말씀은 전파되어야 한다. 이유는 말씀을 듣지 않고는 그 어떤 믿음도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 선포 사역이 비효율적이지만, 오직 말씀으로만 거듭남의 역사가 가능하기에 말씀 전파 사명을 받고 충성스럽게 헌신하는 자들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지혜로 하지 않고 전도라는 미련한 방식으로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을 받아드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 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고 고백하며 복음 전파 사역에 적극 헌신하였다.(참고, 고전 1:17-25)

4. 하나님의 말씀인 씨앗의 중요성

문제는 우리 마음속에서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이 어떻게 시작되는가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아주 명쾌하게 진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이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처음에는 예수를 믿지 않고 배척했었다. (참고 막 3:21; 31)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부활 하신 후 그는 변하여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참고 행 12:17; 15:13; 21:18, 고전 15:7, 갈 1:19; 2:9) 그가 그렇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말씀이신(요 1:1-3) 예수의 구속 사역을 친히 목격하고 그의 말씀 사역을 깨닫게 하신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었다. 그 야고보가 자신이 깨달은 이 같은 구원의 진리를 이렇게 진술했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이 말씀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이유는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구원의 핵심적인 진리를 갈파하여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이 진리의 말씀을 씨앗으로 하여 새 생명을 낳으신다. 이러한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의 사역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기에”(고후 4:6)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정말로 죄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믿음의 역사는 창조의 역사와 같은 영역에서 벌어지는 전적인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방불한 것이다. 바로 야고보 선생이 말씀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추시어 그 복음의 씨앗(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새 생명’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성령의 역사로 우리를 모든 진리 속으로 인도하신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매개로 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성령의 사역을 사모함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이 신비스러운 성령께서 오셔서 하실 사역을 명쾌하게 말씀해 주셨다. 이는 단순하게 성령의 역사를 능력과 신비스러운 영적 체험만을 사모해서는 안 될 것을 가르쳐 주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14)

성령 하나님의 중요한 사역은 오직 주님의 말씀을 알려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님의 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겸손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말씀의 내용과 그 의미를 사모하며 기도에 힘써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성도는 그 말씀이 자신의 자존심과 고집을 꺾고 또 죄를 깨닫게 하여 회개하며 날마다 정결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어야 한다.

5. 요구되는 말씀에 대한 신실한 반응

믿음이 발생하는 원리는 지금도 동일하다. 말씀을 듣지 않고는 절대 믿음이 생길 수가 없다. 학생이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거나 교과서 내용을 잘 알지 않으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듯이 바른 믿음은 단순히 정성이나 어떤 행위를 행함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기록되고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얼마나 마음이 신실하게 반응하는가의 달려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마음의 상태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마 13:18-23, 막 4:13-20, 눅 8:11-15)를 통해서 인간의 마음을 4종류로 설명하셨다. 첫째, 길가 같은 마음, 둘째, 돌짝밭 같은 마음, 셋째, 가시덩쿨 같은 마음, 넷째. 옥토 같은 마음이다. 네 종류의 밭은 바로 말씀을 받아드리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주님은 이 비유를 이렇게 설명해 주셨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 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마 13:19-23)
이 비유처럼 우리 마음의 상태가 어떤 상태이냐에 따라 말씀에 대한 반응이 각기 달리 나타나게 됨을 알 수 있다. 즉 거듭남의 원리를 전파되어진 말씀에 대한 마음의 반응에 따라 되어지는 것으로 이는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바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믿음을 갖는 데 있어서 말씀전파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요소이다. 말씀을 듣지 않고는 믿음이 발생할 수 없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결 론

우리 주님이 말씀을 통해 얻게 되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주신 비유가 있다.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소작인과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 비유다. 두 비유는 하나의 공통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보화를 발견하고 최상급의 진주를 만난 두 사람은 그것을 자기 손에 넣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마침내 취득했다는 것이다.(참고 마 13:44-46)

한편 이 놀라운 구원의 진리는 우리 하나님께서 장사꾼이 되셔서 우리를 가장 소중한 보물로 최상품의 진주로 보시고 당신의 아들을 희생하시면서 까지 우리의 죄의 값을 지불 하시고 우리를 사셔서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신 사실을 담고 있다. 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구원사역이 우리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의 말씀은 그것을 사모하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된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확신하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평생 그 복음을 자랑스러워하며 복음 전파에 매진했다. 그 이유는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5-17)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사모하는 자에게 성령의 역사로 믿음을 일으키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능력이 되신다.(*) 글쓴 이 / 박병은 목사(덴버 둘로스장로교회 담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