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55) 탐심의 경향성을 경계해야

44 주일(113)     

요절 :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

문 113 : 하나님께서 제10계명에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계명 어느 하나라도 어긋나는 지극히 작은 욕망이나 생각을 조금도 마음에 품지 않는 것이며 언제든지 우리 마음을 다하여 모든 죄를 미워하고 모든 의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해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무엇이든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이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십계명에서 마지막 명령으로 마음의 탐심(貪心)을 다루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앞의 9가지 계명을 다룰 때도 바로 마음의 문제로 접근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열 가지 계명을 지켜 나갈 때 형식적인 태도가 아닌 진실(眞實)과 정성(精誠)의 마음으로 준수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1. 마음의 문제

“네 이웃의 물건을 탐내지 말라.”는 십계명의 열 번째 명령은 제8 계명 “도적질 하지 말라.”는 명령을 생각나게 한다. 이웃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이 곧 탐심이며 다윗과 같이 유부녀 밧세바와 불륜을 저지른 것이 제7계명에서 금지한 간음(姦淫)이다. 뿐만 아니라 제9계명에서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 역시 탐욕 때문에 벌어지는 죄가 아닌가! 그리고 밧세바와의 불륜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그녀의 남편을 고의적으로 간교하게 죽인 다윗의 행위는 곧 살인죄와 연결이 되며 이는 곳 탐심의 결과로 빗어진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십계명의 마지막 10번째 계명은 모든 계명과 연결되는 것으로 결국 이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출발되는 죄임을 깨닫게 된다.

이와 관련된 좋은 예는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형과의 유업을 나누기 위해 예수님을 찾은 동생의 경우를 찾아 볼 수 있다. 동생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한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그때 예수께서는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반문하시며 결정적인 교훈을 주셨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3-15) 주님께 간청하는 동생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억울하여 탄원한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마는 주님은 유산분배(遺産分配) 문제로 형제 우애를 해치는 부도덕한 행위의 근원이 바로 탐심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지적하셨던 것이다. 이 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탐심은 십계명의 제6계명부터 제9계명까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뿐 아니라 전체 십계명과 연관을 갖는다. 사도 바울은 이 탐심을 우상숭배(偶像崇拜)라고 가르친다.(골 3:5) 이는 곧 제2계명 즉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것과 직접 연결이 된다. 또한 탐심은 제1계명과도 관련이 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 찌니라.”(출 20:3)는 이 명령은 하나님의 백성이 오직 그 마음에 하나님과 함께 다른 신(神)을 두지 말 것을 명하는 것으로 이는 행복을 위하여 여호와와 외에 다른 신적 존재를 소유하려는 영적 탐심을 갖지 말 것을 명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창조주 보다 다른 피조물을 더 좋아하여 하나님 대신 섬기는 행위 즉 탐심이 우상숭배인 것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의 10번째 계명은 모든 십계명을 푸는 열쇠와 같은 기능을 하는 계명인 것이다. 즉 결국 탐심 때문에 하나님을 상대화 하고, 우상을 섬기고, 거짓 예배를 드리며, 형제와 이웃을 속이고, 탐내고, 미워하고, 성적 범죄와 나아가 살인까지 범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제10계명은 십계명의 키(key)라고 할 것이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7-39)고 하시며,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40)는 설명과 부합한다.  

이렇게 십계명의 10번째 계명은 탐심의 문제를 다룸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어떤 계명이라도 어기려는 마음의 충동을 억제하고 생각을 버리게 하여 모든 계명을 준수할 마음을 갖도록 강력한 작용을 하는 것이라 하겠다.

2. 구체적 현실을 어떻게 풀어 갈 것인가?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은 흥미롭게도 단순히 이론적으로 명령하고 있지 않다. 이 명령은 명제적인 명령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자주 발생할 수 있는 경우들을 나열하면서 무엇이 탐욕의 죄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은 매우 실제적이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 20:17) 

하나님께서 나열하신 이 경우들은 일상에서 언제나 벌어질 수 있는 상황들을 적시하고 있다. 즉 이웃의 아내, 남녀 종, 소, 나귀 등과 같이 남이 갖고 있는 소유물들을 탐하지 말라는 직접적인 명령이다. 특히 출애굽기의 명령(출 20:17)과 신명기의 명령(신 5:21)과 비교해 보면 신명기에서는 ‘남의 밭’이 추가 되어 있는데 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출애굽 신세대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에 모세가 첨가한 것이라 생각된다. 어떻든 여호와 하나님께서 열 번째 계명에서 구체적으로 열거하시며 금지 명령을 하신 것은 백성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여 명하신 매우 현실적인 금지 명령이라 하겠다. 즉 명제적일 뿐 아니라 실제적인 구체적 실천을 요구하시는 명령인 것이다.    

3. 광야생활의 교훈을 묵상하자.

신명기 8장에서 주어진 말씀은 출애굽 광야생활에 대한 교훈으로 매우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신명기 8장 말씀에서 모세는 출애굽 신세대들에게 이렇게 교훈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신 8:2-4) 

이 말씀에서 모세는 그들의 조상들이 살아온 40여년의 파란만장한 광야생활을 요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어떻게 다루어 오셨는가? 광야 험한 길을 걷게 하시며 목마름과 굶주림 그리고 지난(至難) 한 광야의 환경 속에서 끝없는 여행과 전쟁 그리고 온갖 시험들을 통과하게 하셨다. 이 모든 과정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그들을 낮추시어 겸손하게 하시고 순전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 것이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마음을 아시려 했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信賴)하는지를 아시려 했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온갖 이적과 기사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경험하여 알게 하셨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 광야의 험난한 여행을 밝히시며 보호해 주셨고, 만나와 메추라기와 같은 기적적인 공급으로 그들이 굶지 않고 노동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생존하도록 역사하셨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확실하게 인식하도록 교육하셨다. 즉 이 모든 광야의 경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교만을 물리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그리고 공급하심과 동행하심을 의지하며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행복임을 온갖 고난을 통하여 터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서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다듬어져 가고 훈련되어 성숙한 모습으로 변해 가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의 여정은 실패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다름 아닌 탐욕(貪慾)에 있었다. 그들의 조상들은 이 탐욕의 유혹(誘惑)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 그 광야에서 모두 죽었다. 그 유혹의 과정을 이기고 그 광야의 힘든 훈련과정을 통과한 이는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모세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모세는 출애굽 신세대들에게 광야생활 속에서 터득한 이 원리를 확실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깨닫는 것이 바로 탐욕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에게 참된 안식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고백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시 119:67,68)

참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탐욕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가 있을까? 우리는 미련하여 광야를 거쳐 여행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난을 통해서만 무엇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를 겨우 알 수 있을 뿐인 것 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이미 십계명의 마지막 명령을 통해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단련을 받아 성숙된 자녀로 구원에 이를 것을 명하고 계신다. 교회가 성경말씀을 잘 설명하며 이러한 교훈들을 바르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4. 우리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시편 16편 말씀은 귀한 영적 교훈들을 풍성히 담고 있다. 저자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4-6)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가! 다윗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임을 철저히 고백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바에 대한 참된 감사와 기쁨 그리고 진정한 만족을 누리고 있다. 그에게 더 많이 가지려는 그 어떤 욕망도 나타내 보이지 않고 있다. 아니 암시조차도 하고 있지 않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동물과 사람의 다른 점은 바로 동물에게는 없는 탐욕(貪慾)이 인간에게는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욕망은 만족이 없고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다. 끝도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게걸스러운 탐욕에 빠져 들어가 패망에 이르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바에 대한 감사와 기쁨 그리고 만족을 누리는 인생을 살았다. 바로 이것이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비록 그가 연약하게 남의 아내를 빼앗는 죄를 지은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 보였으나 이 시편의 고백은 그의 은혜 받은 순수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 시편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는 ‘소득과 기업’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는 현재 우리 각자가 누리고 있는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이 점에서 욥의 고백은 참으로 귀한 교훈이 된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서도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으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 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 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 이다.’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죄를 범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1,22) 참으로 그에게서 탐욕이란 찾아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였다.

한편 우리 주님께서도 탐욕의 최후가 어떻게 될 지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음을 본다.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6-21) 

이 비유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은 ‘탐심이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차지하려고 하는 탐욕스러운 마음’이라고 하겠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마음의 경향성에 대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롬 7:7,8)라고 경고했다.

참으로 이 땅에서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것은 그 어떤 것이든 내가 이루어 가지게 된 것은 없다. 빈손으로 와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신 것임을 알고 그 모든 것에 감사하며 이웃과 주변에 나누어 주며 섬기는 데 사용하여 은혜 받은 자로서 귀하게 쓰임 받는 인생이 되는 것이 참된 성도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5. 땅의 것을 버리고 위엣 것을 추구할 때 계명은 지켜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으로 간사하고 연약하여 자신이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그 어떤 것을 가지고 있으면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랑하고 싶은 생각을 갖게 마련이다. 심지어 이미 자기의 것이 있음에도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빼앗아 더 갖고 싶어 한다. 인간만이 나타내는 참으로 죄스러운 모습이다. 오죽하면 사촌이 밭은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생겨났겠는가?    

열 번째 계명에서 ‘지극히 작은 욕망이나 생각을 조금도 마음에 품지 않는 것’을 명령하며 이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그러한 마음의 경향성이 죄라는 인지 할 수 있을 것인가?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탐심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갖게 되는 온갖 죄에 대한 욕망으로 이는 또 다른 우상이며 이를 탐하는 행위는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 라고 했다. 요리문답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죄의 경향성을 지닌 죄성(罪性)을 가진 마음을 지적하며 교정할 것을 교육한다. 즉 죄성에 오염되어 죄에로 친숙하게 기울어져가는 마음의 경향성 그리고 취향에까지도 열 번째 금지 명령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점검하게 하고 더욱 더 의를 추구하며 살아갈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면 과연 이 모든 탐욕을 과연 성도가 이길 수 있는 것인가? 사도 요한은 이 점에 대하여 진정 거듭난 성도라면 어떠한 자세로 십계명의 말씀들을 지켜갈 수 있는 지를 가르쳐 준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 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 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1-5)

이 말씀은 계명의 문자적인 완수를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하나님을 믿어 고백하며 나아가 그 사랑에 감사하여 헌신하고 순종하는 것은 바로 계명을 준수하게 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즉 이 열 번째 계명을 준수해야한다는 것은 법적인 구속력을 갖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마음의 경향성이 어디로 기울어지도록 돼야 하는 가를 격려하시는 명령이라 하겠다.  

결론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은 탐심에 대한 경고와 함께 우리의 실제생활 속에서 의식적으로 남에 것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함을 가르쳐 준다. 이는 먼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에게 대한 깊은 감사와 만족 그리고 그 것들을 향유하는 기쁨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미 받은 바에 대한 감사와 함께 아웃을 생각하고 나누어 주며 공동체 의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려는 자각과 헌신이 요구된다. 정말로 인간의 탐욕을 끝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는 욥과 같은 믿음을 나타내려 할 것이고 다윗과 같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의 근원이심을 고백하며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터득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우리 모두 이 자족의 비밀을 깨닫고 자족의 마음으로 경건에 큰 유익을 누리며(딤전 6:6) 또 탐욕은 우상숭배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항상 자족에 힘쓰며 주에 일에 진력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글쓴 이 / 박병은 목사(덴버 둘로스장로교회 담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