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61)

생존을 위해 신뢰와 의존을 고백하며 구함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신 8:3)

제50주일(125)     

요절 :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9)

문 125 네 번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우리의 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내려주시며, 그리하여 오직 주님이 모든 좋은 것의 근원임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복 주심이 없이는 우리의 염려나 노력 심지어 주님의 선물들조차도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함을 알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어떤 피조물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신뢰하게 하옵소서.  

설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계속 생각해 보고 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 데 앞부분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기도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써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기원하며 그 나라의 백성으로써 참여하는 의미가 있다. 두 번째 부분은 ‘죄가 관영한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위한 기도이다.

이 두 번째 부분은 다시 세 가지 주제를 다룬다. 첫째, 생존문제 일용할 양식(마 6:11), 둘째, 정신문제인 인간관계 속에서 지은 죄를 용서를 구함(마 6:12), 셋째, 영적인 문제인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마 6:13) 즉 주님은 우리의 육신의 필요와 정신적인 자유와 영적인 보호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오늘은 첫째, 생존을 위한 간구로 이는 주기도문 전체에서 네 번째 간구이다. 이 기도는 우리의 육신을 위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중 우리 육신을 위한 가장 실제적인 기도라 하겠다. 그 이유는 기도하는 각자의 필요를 위해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신 이유

주님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신 이유가 무엇일까? 육신(肉身)을 가진 사람은 양식을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지금도 이 세상 곳곳에는 양식이 없어 굶주림 가운데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동물의 세계’라는 TV프로그램을 볼 때 느끼는 것은 동물들에게는 사방에 널려있는 것이 먹이지만 그 모든 것을 항상 다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먹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먹히기까지 한다. 그런 것을 보면서 이와 유사한 일들이 인간사회에서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된다. 모든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동분서주(東奔西走)하고 있는가! 먹고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인간은 오로지 먹는 문제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사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수고한 만큼 그 대가를 얻지 못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죄를 짓고 두려워 떨고 있는 에덴동산의 아담을 찾아오셔서 그 행위를 추궁하실 때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자백하기는커녕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하고 그 책임을 아내와 더 나아가 하나님께 돌리며 극구 변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이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땀 흘려 일해도 땅이 저주를 받아 그가 일한 만큼의 대가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하시니라.”(창 3:17-19)

결국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불순종의 죄를 지은 인간은 자신의 삶의 터전인 땅에서 종신토록 힘써 땀 흘려 노동을 해야만 했고 그 결과로 얻는 양식은 평생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수 없을 만큼 열악한 것이었다. 그 결과로 오늘날까지 모든 인간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수고하고 땀을 흘려 일해야만 하게 됐다. 그러나 인간이 처한 이런 상황을 잘 아시는 주님은 이렇게 땀 흘려 일해야만 하는 인간의 수고의 대가가 온전하게 주어질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2. ‘일용식’의 의미

그러면 주님이 가르치신 ‘일용할 양식’이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은 이 일용할 양식을 문자 그대로 하루하루 먹을 먹거리라고 말한다. 물론이다. 일용할 양식은 하루 먹을 양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때 이 말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육체적, 물질적, 지적 그리고 영적 능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르치신 바는 “하나님,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필수적인 요소들 즉 음식과 지식과 능력을 주세요!”하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 역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셔야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 기도 속에는 이보다 더 깊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살아갈 인간의 필요들을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b)고 하셨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생존을 위해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입을 것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이다.            

3. ‘일용할 식’을 구함에 있어 핵심적 문제 

주님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그 배경에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었다. 물론 마실 물도 없었다. 농사도 지을 수 없었고 길쌈을 맬 수도 없었다.(참고, 마 6:26-29) 그 결과 생존을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께 구하는 길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께 간구하기 보다는 그들이 처한 상황만을 탓하며 그런 상황에 처하게 했다고 하나님과 인도자 모세를 원망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급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급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 도다.’”(출 16:1-3)

그들은 애급에서 430년 동안의 노예생활을 겪으며 감당할 수없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살던 지난날의 비참했던 것을 다 잊어버리고 출애굽과 함께 주어진 자유의 소중함도 망각했다. 오히려 그들은 있지도 않았을 애급에서의 추억을 언급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불평을 들어보면 그들이 얼마나 사실과 달리 과장되게 불평하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과연 그들의 말대로 그들이 애급에서 고기 가마 곁에서 고기와 떡을 배불리 먹었을까?

물론 부자 주인을 만난 종들은 어쩌다 한두 번 그런 혜택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들의 신분은 노예였다. 그들이 가마 곁에 않아 고기를 구워먹고 떡을 부추와 고추와 같은 양념을 풍성하게 넣어 맛있게 먹었을 리가 만무이다. 이렇게 불평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모세는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출 16:8)라고 그들의 불평을 책망하며 그들이 하나님께 대적했음을 지적했다. 그런데 백성들의 이 같은 불평을 생각해 볼 때 백성들의 불평은 다음 몇 가지의 핵심적인 문제를 담고 있음을 알게 된다.

(1) 이들의 불평은 양식의 문제가 아닌 믿음의 문제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을 다 들어 주셨다. 하나님이 백성들이 처한 상황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는 그러한 불평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라고 지적했다. 그 이유는 겉으로 보면 음식의 부족으로부터 오는 생존의 위기 같지만 실상은 그들을 구원하셔서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가고 계시는 구원자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때문이었다. 즉 믿음의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을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적(異蹟)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을 하며 배교(背敎)했다. 그들은 이제 출애굽한지 불과 두 달 보름이 지났음에도 감격 가운데 나온 그 애급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불평과 원망 과 선동을 하며 구원자 하나님을 대적(對敵)하고 있는 것이다. 고로 본질은 음식문제가 아니라 믿음문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하나님이 그들의 생존을 위한 양식의 필요를 모르셨을까? 하나님은 당연히 다 아시고 그들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셨을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그 척박하고 황량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오직 하나님이 공급해 주셔야만 살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즉 문제는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 그런 불평과 원망과 대적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2) 이들의 불평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을 무시한 때문이다. 

이제까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한한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 각종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를 통해 그리고 홍해 도하(渡河) 사건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경험했고 그 가운데 그들은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이런 능력과 권세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긍휼이 많으신 여호와 하나님은 패역하고 원망과 불평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지 않고 긍휼히 여기셨다.

즉 하나님은 만나(manna-what is this?)와 메추라기를 양식으로 주셔서 그들이 생존에 아무런 문제가 없게 해 주셨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출 16:12-14)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침에는 만나와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주셨다. 이 만나는 깟씨 같고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아서(출 16:31), 다양한 방법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긍휼의 하나님은 한 두 번이 아니라 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광야 생활 40년 동안 그들의 양식으로 삼게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출 16:35)    

4. 하나님의 만나 공급의 원칙

만나는 기적의 음식이었다. 그냥 먹고 살아가도록 주어진 식재료가 아니었다. 만나는 매일 백성 한 사람이 하루에 먹을 수 있는 한 호멜씩 공급해 주셨다. 그 만나로 백성들은 다양한 요리를 해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만나는 하루가 지나면 자동적으로 썩고 햇빛 아래서는 말라 버리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나 6일째 아침에 거둔 만나는 7일째에도 썩지 않았기 때문에 음식으로 먹을 수 있는 기적의 식재료였다.(참고, 출 16:24) 

또 이 만나는 언약의 두 돌 판과 함께 언약궤 안에 오랜 동안 두어도 썩지 않고 보관되어 있었다. 대제사장은 지성소의 언약궤 앞에 설 때 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진설병을 먹을 때 마다 이 만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백성들의 생존이 하나님이 공급 해 주신 그 만나에 있었음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생각할 문제는 이 만나를 공급해 주시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칙이다.

(1) 균등(均等)과 배려(配慮)의 원칙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 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 지니라.’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출 16:16-18) 모든 사람들이 각자 정해진 한 오멜(omer, 2.2리터) 씩을 가족이 필요만큼 거둘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많이 거둔 자도 적게 거둔 자도 균등하게 먹을 수 있게 하셨다.  

(2) 신뢰(信賴)의 원칙

하나님은 만나의 규칙을 정해 주셨다. 그것은 그날의 소요량을 매일 아침에 거두어 그날 다 먹어야 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출 16:19) 그러나 안식일 전날은 이틀 치를 거두게 하셨다. “제 육일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 씩 거둔지라. (중략)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해 아침까지 간수하라.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육일 에는 이들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출 16:22,23)

(3) 준비(準備)의 원칙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 준수를 위해 그 전날 미리 만나를 거두어 준비해야 했다.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출 16:26)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 명령을 신뢰(信賴)하지 않고 무시했다. 그들은 매일 다 먹어야 할 만나를 남겨두거나(출 16:20), 안식일 아침에 만나를 구하려 나갔다 얻지 못했다. 모세는 이것을 심하게 질책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불순종의 행위를 하나님이 강하게 책망하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 하려느냐?”(출 16:28) 이같이 이스라엘 백성은 긍휼로 허락해 주신 만나의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균등과 배려의 규칙, 신뢰의 원칙, 준비의 원칙을 다 어겼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이 만나 공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의 훈련이 목적이었다. 40년 광야 여정 후 요단강 동편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입성(入城) 준비를 하는 출애굽 신세대들에게 모세는 그동안의 40년의 광야 여정을 회고하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만나의 의미와 목적을 이렇게 말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즉 모세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식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종의 문제였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예수님도 우리의 양식문제의 심각성을 아셨다. 40주야를 금식하신 후 먹는 문제로 시험하는 사탄의 유혹을 바로 이 말씀으로 대응하시며 우리 육신의 양식문제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근본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시며 승리하셨다.(참고 마 4:4)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하늘 아버지께 구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또한 주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사하신 후 이 이적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히 말씀해 주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4-58)

결국 구약의 만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나누는 성찬의 예표적인 사건으로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주님의 이 기도의 가르침은 단순한 양식구함의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하시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5.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가르침의 교훈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의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과 나아가 온전한 의존을 가르치신 것이다. 하나님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 양식을 주신 것은 광야 생활에서 그저 먹이시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하늘양식을 먹고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며 장차 하늘로부터 오는 영원한 안식에 참여시키시기 위함이었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가 하루하루 양식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특히 이민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과 같다. 아무 연고도 없이 이국땅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노심초사 수고하는 이민자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여주시며 명하신 규칙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공급자시며 보호자시며 인도자이신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출 16:12) 그렇다! 오직 우리의 생존권은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하고 오늘의 우리도 순간순간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을 요리문답 125문은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내려주시며, 오직 주님이 모든 좋은 것의 근원임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복 주심이 없이는 우리의 염려나 노력, 심지어 주님의 선물들조차도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함을 알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어떤 피조물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신뢰하게 하옵소서.”라고 대답한다.  

결론

사도 바울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과 사역자들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신 줄 확신하고 비록 감옥에 갇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확신 가운데 자신의 복음전파 사역에 몰두했을 뿐만 아니라 그 확신 가운데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영국의 심슨(A.B. Simpson)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주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다. 부자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은행에 많은 돈을 예치해 두고 아들에게 매번 필요한 만큼 수표(check)를 쓰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부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평생 쓸 재산을 물려주되 그냥 일시에 다 아들에게 주지 않고 은행에 맡겨 둔 것이다. 그리고 아들에게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수표를 써서 아버지에게 요청을 하면 아버지는 그 수표를 받아 집행하는 것이다. 그날그날 필요한 만큼 요청하는 수표! 이것이 성도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구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이다.”  

예레미야는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7,8)라고 했고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4)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의 필요를 아실뿐 아니라 중요하게 여기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만 신뢰하고 의지하며 위해 기도하기 원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계속 교제하기 원하신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자식의 요청을 좋아하듯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히 당신만 의지하고 신뢰하고 말씀대로 살기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바로 그 아버지께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는 곧 영원한 영생에 들어가는 첫 관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함이다. 아멘(*) 글쓴 이 / 박병은 목사(덴버 둘로스장로교회 담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