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한국장로교 신학의 뿌리(2) 초기 한국장로교 선교사들

PART Ⅱ

한국장로교 신학의 뿌리(2) 초기 한국장로교 선교사들

시작하는 말

이 글은 한국장로교의 신학적 전개 과정을 역사적으로 서술하고 이를 평가하려는 것이다. 특히 1938년까지의 한국 교회 교리사(敎理史)에 있어 보수주의 신학의 추이(推移)에 집중하려고 한다.  

이 같은 연구는 다음의 여러 가지 이유로 필요하며 한국 교회 교회사(敎會史)라는 주제는 한국이나 영어권 학자들에게 있어 이제까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오직 단 하나의 예외가 있을 뿐이다.(김양선의 ‘한국기독교해방 10년사’를 말함) 이 주제에 관심을 쏟아야 함이 마땅한데도 현재까지 그렇게 하지 못한 채 한국 교회사(敎會史)의 약술(略述)에 그치고 있다.

이같이 깊이 있는 연구가 부족했기에 한국 교회의 신학적 경향(傾向)에 대한 영문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일 뿐 아니라 한글로 된 자료 역시 많이 부족한 편이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한국 교회의 신학적 쟁점에 관한 서론적인 개괄(槪括)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깊이 연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한국 교회사 초기는 보수주의적 기독교,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역사였다. 이 시기의 한국 교회 역사는 장로교 신앙을 가지고 이를 전수한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어느 교회든 그 교회 신학은 그 교회에 처음 복음의 씨를 심은 자들에 의해 형성되게 되어 있다. 초기 한국 장로교회 형성기에 교회를 주도한 선교사들은 건전한 신학을 지닌 자들이었으며 이런 신학 위에 교회의 정초(定礎) 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미국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해외 선교부(The Board of Foreign Missions)의 총재였던 브라운(Arthur Judson Brown, 1856-1963)은 1911년까지 입국한 한국 선교사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 바 있다.

“이 나라 문호 개방 후 25년 동안 입국한 선교사들의 전형적 모습은 청교도(淸敎徒, puritan)형이었다. 그들은 뉴잉글랜드의 선조들이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에 안식일을 지켰던 것처럼 엄격하게 안식일을 지켰다. 댄스, 흡연, 카드놀이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앙자들이 빠져서는 안 되는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신학과 성경 비평학에는 강한 보수주의였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전천년설 견해를 아주 중요한 진리로 생각했다. 또 성경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은 아주 위험한 이단으로 여겼다.

미국이나 대영제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대부분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이 평화로이 공존했으나 한국에서는 현대적인 견해를 지닌 소수의 무리가 활동하기에 험난한 앞길을 맞이했다. 특히 장로교 선교단체에서는 더욱 그러했다.”(Report of A Visitation of Korea Mission,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1902)

브라운의 이러한 평가는 보수주의 신학에 대한 이해가 결여(缺如)되어있기는 하지만 초기 한국 교회 신학 성격을 적나라하게 강조하고 있는데 1890년에 선교지 한국에 도착한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1864-1939, 馬布三悅) 박사는 동료 선교사들에 대해 훨씬 더 동조하면서 1909년 한국의 신학적 경향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한국의) 선교회와 교회는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 구원받는 복음을 받는 철저한 믿음과 열정적인 복음주의 정신을 굳게 붙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선교지로서의 한국 교회는 초창기에 훌륭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교회 지도자들의 영향을 다년간 받았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교육 때문인지 그들의 신학적 입장은 철저히 보수주의적이었다. 출판되지 않은 전성천(全聖天) 박사의 논문에서 자세하게 또 명백히 반대 의사를 표명하면서 이 교육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구(舊) 프린스턴 신학이 활발한 지역 출신들이었다. 뉴잉글랜드 출신의 몇몇 감리교 선교사들만 예외적이었다. 네비우스(John Livingston Nevius, 1829-1893) 박사와 그의 한국인 동역자들이 이러한 사상적 조류에 따라 교육을 받았으므로 그들 역시 극보수주의자이며 근본주의자였다는 것은 당연했다.”

미국 장로교 한국 선교부가 1922년 펴낸 ‘연례보고서’에서 이런 한국 선교사들 교육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당시 한국에서 사역하던 40명의 선교사는 7개 신학교 출신으로 분류된다.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16명, 맥코믹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11명, 샌프란시스코신학교(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 4명, 뉴욕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of New York) 3명이었다. 또 출신 성경학교는 약 10개로 학교로 분류할 수 있는데 무디성경학교(Moody Bible Institute)가 으뜸이었고 그다음은 뉴욕 성경신학교(The Biblical Seminary of New York)였다.

한국의 선교사들은 이렇게 대부분 보수적인 신학교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한국 교회의 여러 방면에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 메시지에서 또 목회 방법론에서 한국 교회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 장로교회에 복음주의(福音主義)와 보수주의(保守主義) 사고방식을 배양시켜주었다.

1890년 이른바 네비우스 방법을 한국 복음화를 위한 기본 선교정책으로 채택했다는 점에서 이 신학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방법의 핵심은 자립(自立)도 아니었고 자치(自治)도 아니었다. 이 방법의 중심은 성경을 모든 교인의 행위 규범으로 강조하는 데 있었고 성경을 연구하여 믿는 이들의 가슴에 적용케 하는 정교한 ‘성경연구반’ 체제에 있었다.

선구자적 선교사인 마포삼열 박사는 미국 장로교 한국 선교부 설립 50주년 기념일에 있었던 논평에서 바로 이것을 강조했다. “본인은 한국 교회의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을 유일하고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여기는 태도가 지난 50년간의 한국 복음화에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확신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네비우스 방식이 성경을 그 핵심으로 강조한다는 사실은 이 방식의 성향이 보수적이었음을 말해준다. 한국의 네비우스 방식의 역사를 저술한 곽안련(Charles A. Clark, 1841-1913, 郭安速) 박사는 그의 저서 ‘The Nevius Plan For Mission Work Illustrated in Korea’에서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1893년부터 1901년 사이의 한국선교 방법론을 중점으로 다루고 있는 제6장에서 그는 성경이 초기 한국선교 방법론에서 중심을 차지했음을 강조하고 다음과 같은 한 선교보고서를 인용했다.

“다른 나라에서처럼 성경은 복음화의 가장 지대한 요인이었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성경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중략) 지금도 그렇듯이 한국의 모든 교회는 성경 지식에 젖어 있었다.” 곽안련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초기 한국 선교사들 대부분 스코틀랜드 옛 언약자들(Old Covenanters)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믿고 가르쳤던 것처럼 성경을 믿고 있다. 그들은 이 사상을 한국 교회에 깊이 심어주었다. 이것이 현재까지도 너무 견고한 나머지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책이 교인들에게 금물(禁物)이었다. 그들은 기독교 복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유일한 ‘계시의 메시지’로 여긴다. 그들에게 기독교 복음은 ‘위대한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 선교사들과 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담대하게 증거 했다. 여기에는 아무 거리낌도 없고 수줍어 어물거리지도 않았다.”(Charles A. Clark, op. cit. Seoul : 친, 137, pp. 121f.)

미국 장로교의 분열과 통합의 역사(1706-1973)

여기서 곽안련 선교사는 한국 교회 성장과 교육에 있어 성경의 중요성을 인정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한국선교의 성경 중심적 성격이 바로 보수주의 신학에 관련됨을 지적했다. 특히 초기의 선교방식에 대해 종종 제기됐던 질문과 대답을 고찰하는 마지막 장에서 이 관계를 더욱 강하게 지적했다. “왜 그렇게 보수주의 신학 형태 즉 성경 중심의 신학이 필요한가? 좀 더 자유주의적인 신학도 이 같은 결과를 낼 수는 없는가?” 이렇게 자문(自問)하고 결론적으로 네비우스 방식의 중심에 놓여있는 보수주의 신학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재확인했다.      

“전 세계적으로 성경 중심의 교회는 예배하는 성도들이 가득 차 있으며 교회의 많은 사람이 변화 받는다. 보수주의자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들이 회개하고 중생함을 받는다. 그러나 소위 자유주의 교회들은 그렇지 않다. 이 같은 현상은 연구 가치가 있는 과학적 사실이다. (중략)이 때문에 한국 선교사들은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필자는 책 두 권을 연구서로 추천하고 싶다. 스피어(Robert Elliott Speer, 1867-1947)의 ‘Finality of Jesus Christ’와 루이스(Edwin Lewis, 1881–1959)의 ‘A Christian Manifesto’이다. 이 책들은 비록 방법론에 있어 ‘새로운 방법’이 ‘옛 방법’보다 효과적일지라도 교리만큼은 ‘옛 방법’이 더욱 효과적인 이유를 필자보다 더 훌륭히 설명해 줄 것이다. 자유주의 방법은 종종 구식 방법보다 좋을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기독교 메시지의 중심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할 것이다.”

한국 교회 초기 선교사들의 필수적이며 복음적인 사상적 특징은 다른 데에서도 나타난다. 1907년에 최초로 한국 교회 노회가 조직되어 개회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인도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이 신생(新生) 한국 교회의 신조(信條)로 채택되었다.(한국 장로교 12신조 – 편집자) 백낙준 박사는 이 신조가 개혁파 교리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했다. “이 신앙고백은 철저한 칼빈주의적 경향을 지닌 12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졌다.”

이 신조에 강조된 칼빈주의는 평양신학교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배양되었다. 이 평양신학교의 역사와 신학은 더욱 연구가 필요하다. 벌써 1888년에 신학 교육을 위해 한국 학생들을 선발했지만 1901년이 되어서야 잠정적이나마 커리큘럼이 작성되고 학기 제도가 규칙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 되었다. 1907년 평양신학교는 공식적으로 장로회신학교로 인준되었다. 그래서 당시에 한국장로교에서 사역하던 4개 선교부의 대표를 포함한 장로교 위원회에서 운영하게 되었다.    

늘어나는 학생 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평양신학교의 연구 과정이 확대되어 1916년에는 여섯 명의 교수 자리가 마련되었다. 또 부족한 교수(敎授)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계간으로 ‘신학지남’(神學指南)이라는 신학(神學) 잡지가 1918년에 창간(創刊)되었다. 또 1922년에는 일 년에 9개월을 학습하는 3년 과정의 신학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렇게 3년 과정이 시작되자 선교사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데만 전력할 수 있도록 학교를 운영하는 선교부에 요청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신학교육에 관계를 맺어 온 마포삼열 박사가 이 신학교의 교장으로 1907년에 선출되어 1924년까지 그 임무를 수행했다. 볼레어(Herbert E. Blair, 1904-2000) 목사는 평양신학교의 신학을 다음과 같이 약술했다.

“성경관이 강조된 교과서이며 연구 과제들이다. 모든 목사에게 큰 신학적 영향을 끼친 이 신학교는 신학의 영향력이 선교사 교수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영향력이 서서히 장로교 총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역사적 칼빈주의 배경을 가진 ‘웨스트민스터 신앙표준’(Westminster Standards)을 수납하며 장로정치를 채택한 장로교 교인들은 구(舊) 프린스턴신학교처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심치 않고 받아들였다. 이런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그 중심이 있는 복음과 이에 대한 바울의 초자연적 해석을 선교사들이 가르쳤고 한국 교회는 이를 서슴없이 받아들였다.”(사진, 평양신학교 초대교장 마포삼열 박사, 1907)

또 성경에 대한 이 같은 강조는 1920년에 작성 채택된 평양신학교의 교리적 기초에도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이며 따라서 모든 행위의 기본이 됨을 신실하게 받아들인다. 또 성경을 진실로 신뢰하고,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며, 성경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이 안에 있는 복음의 구속(救贖)을 완전하고 단순하게 전파하려고 열정적으로 노력할 복음 사역자들을 교육하고 훈련 시키는 것이 이 신학교의 목적이다.

둘째, 또 그리스도의 참된 사도로서 양들을 먹이고 인도할 목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한 영혼의 승리자로서 그리고 주안에 거룩한 성전(聖殿)을 공교하게 짓는 미장이로서, 영적 도덕적 지적 사회적 책임을 깊이 인식하는 목회자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훈련 시키는 것이 이 신학교의 목적이다.

셋째, 또 자국민과 타국민을 복음화시키기 위해 헌신적 책임을 기울일 수 있도록 하게 하고, 이 땅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굳게 설립하도록 학생들에게 복음 전도의 참된 영혼과 개인적 책임감을 가르치고 북돋아 주는 것이 이 신학교의 목적이다.”(Quoted in Kim Chang Yup, op. cit., p. 54.)

1936년까지도 선교사들이 여전히 평양신학교의 신학을 좌우했고 지도했다. 아마도 세 명의 선교사에게서 그 영향을 가장 명확히 들 수 있을것이다. 그들은 바로 마포삼열(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 馬布三悅) 박사와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1902-1941, 郭安蓮) 박사와 이눌서(William Davis Reynolds, 1867–1951, 李訥瑞,) 박사이다.(사진, 신학지남 창간호 사설, 1918) 

마포삼열 박사는 미국 맥코믹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후 1890년에 한국에 왔다. 그는 아주 뛰어난 재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열정적인 순회 전도자요 천부적인 상담자였으며 평양신학교 설립자요 조직자이며 수년 동안에 이 학교를 인도해온 빛이었다.          

비록 곽안련 박사보다는 별로 글을 많이 쓰지는 않았으나 그는 상담과 지도력으로 영향력이 지대(至大)했다. 그의 영향은 분명히 보수주의적이었으며 칼빈주의적이었다. 장로교 총회 종교교육부 발행 ‘표준성경주석’(標準聖經註釋, 1937년 초판 되어 지금도 중판되고 있다.) 서문(序文)에서 마포삼열 박사는 다음과 같이 놀라운 말을 쓰고 있다.

“독자들은 본 주석편집자들의 견지(見地)를 알아볼 권리가 있으니 진리 서술(敍述)에 있어 아무리 공평한 태도 취하는 자라도 그의 견지(見地)가 항상 그의 기록에 착색(着色)되기 때문이다. 본 주석(註釋)의 견지는 우리가 보통으로 보수적(保守的)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본 주석의 집필자들은 성경 전부가 하나님의 영감(靈感) 된 말씀이며 믿음과 행위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법칙이라고 믿는다. 저들은 성경의 어떤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다른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믿지 않는다. 저들은 성경의 어떤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더 가치(價値) 있으나 원저자(原著者)들의 쓴 대로 모든 부분이 다 참되며 모든 부분이 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신 바라고 믿는다.

그리고 본 주석의 집필자들은 성경 전부가 만서지중(萬書之中) 최대서(最大書)요 하나님의 참된 말씀임을 믿을 뿐 아니라 또 성경에 계시 된 진리의 체계(體系)가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요리문답’(要理問答)에 선히 개지(槪指)되어 있다고 믿는다. ‘웨스트민스터 교리적표준’(敎理的標準)은 한국 장로교회의 신조(信條)를 구성(構成)하는 바 본 주석의 집필자들이 이 신조(信條)를 믿음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교훈(敎訓)되었음을 믿기 때문이다. 본 집필자들은 성경이 이 신조(信條)의 모든 내용을 완전히 지지(支持)한다고 믿는다. 성경에는 어떤 일부분을 단독으로 취출(取出)하여 고찰(考察)할 때에 이 교리 체계의 어떤 부분들에 모순(矛盾)되는 듯한 구절들이 있으나 그런 구절들은 항상 해석으로 성경의 다른 교훈과 조화되며 ‘웨스트민스터 교리표준’을 지지하는 것임이 발견된다.”

           

미국 장로교 한국 선교부에서 마포삼열 박사와 더불어 한국 교회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인물은 곽안련 박사이다. “한국에서 그리스도 사역을 위해 곽안련 박사와 같이 그렇게 풍부하고 다채로운 공헌을 한 특권이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1902년 맥코믹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고 곧바로 서울 선교부로 왔다. 1908년부터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에 함께 참여하기 시작했고 1922년에는 전임(專任)하게 되었다.

마포삼열 박사와는 달리 곽안련 박사는 신학 저술의 분야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평생에 한국어로 50권, 영어로 6권을 저술했다. 그의 교과서 ‘설교학’(說敎學)과 ‘교리학’(敎理學)은 지금도 재판되고 있으며 신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다.

앞서 마포삼열 박사의 저술이 총회 발행 주석에 포함되어 있다고 했는데 곽안련 박사의 저술은 레위기, 민수기, 사무엘, 에스라, 느헤미야, 욥기, 시편, 6권의 소선지서, 공관복음에 이르고 있다. 죽기 직전 그는 옥중서신과 출애굽기의 완성편 원고를 제출했고 여호수아 원고 한두 장 끝냈었다. ‘신학지남’의 적어도 1/3이 그의 글이었다.

곽안련 박사가 한국 신학에 어느 정도 기여(寄與)했는지 판단하기 이전에 이 책들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체적 인상을 말하면 신학을 사회복음과 미국 근본주의로 분류할 때 그는 근본주의에 속한다.

‘선교의 재고’(Re-Thinking Missions)가 출판된 지 5년 후인 1937년 그는 초기 선교사들 대부분이 보수주의 성향을 개괄하던 중 미북장로교 선교부가 초안을 잡은 1926년 ‘신앙고백서’를 자못 기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사(校舍)와 학생들(1916)

“이교 신앙이나 다른 비기독교적인 종교에도 권할만한 점들이 있다고 인정한다. 그렇지만 기독교에는 역사상 독특한 무엇을 지니고 있다. 기독교는 사람을 영원히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초자연적(超自然的) 종교라고 믿는다. 또 기독교와 타(他) 종교와는 타협할 수 없다고 믿는다.” 이 말은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말이다. 그런데 그 감정(感情)은 곽안련 박사의 감정이기도 하다.                

곽안련 박사의 주석은 근본주의적이지만 불공정하거나 학적으로 가치 없는 근본주의는 아니었다. 그의 주석들은 ‘국제비평주석’(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과 같은 책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복잡한 비평이나 주(註)를 붙이지 않았다. 교회 자체의 해석학적 전통이나 설교학의 전통이 거의 없는 아직 유아기적 교회에서는 그 같은 진보된 비평주석이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비평적인 문제들과 이에 대한 현대주의자들의 접근 방법을 아주 명확히 인식했다.

그래서 곽안련 박사는 이것들을 독자들에게 세심히 지적해주었다. 물론 이에 대한 보수주의적인 대답도 제공해 주었다. 어느 특정 비평 학자를 언급하지는 않으나 부활 기사에 대한 조화(調和)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그리스도 부활 사건에 대한 성경 기록이 통일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주석들이 있다고 솔직히 밝힌다. 그런데 길게 서술된 그의 결론은 간단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14면에 달하는 누가복음 주석 서론에서는 저자 문제, 초대 교회의 증거 문제, 명칭 문제, 저술 시기 문제, 저술장소 문제, 저술 목적 문제, 저자의 문체 문제 같은 내용을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또 사본 비평의 문제도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말미(末尾)에 사본 문제를 간단히 취급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조심히 다루고 있다.

그는 오랜 비평의 전통과 문제의 역사를 지닌 서구 교회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직 유아기 한국 교회를 위해 썼다. 이런 이유로 그의 방법론은 긍정적인 설명이 대부분이며 비평은 간간이 빛을 비출 수 있을 정도로 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한국에서 사용되는 주석 방법이다.

평양신학교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많은 공헌 한 또 다른 인물은 장로교 소속의 이눌서(李訥瑞, Reynolds) 박사이다. 그는 안수받던 해인 1892년 6명의 동료와 함께 미국 장로교 한국 선교부를 설립했다. 한국에서 45년간 일하는 동안에 그는 순회 선교사, 성경 번역가, 신학교 교수로 일했으며 책도 저술했다. 브라운은 그를 가리켜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장로교 선교사 가운데 훌륭한 선교사 중 한 분이다.”라고 했다.

평양신학교의 그의 영향은 그가 조직신학 교수로 초빙되었던 1924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937년 은퇴할 때까지 그 직책을 훌륭하게 수행했고 그 후 같은 선교부 동료였던 구예인(John Curtis Crane, 1888-1964, 具禮仁) 박사가 그 직책을 이어받았다. 1896년 이눌서 박사는 한국인 목회자와 목회 준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완전히 말씀으로 가르치며 기독교의 기본적 사실과 진리를 가르치라. 나는 말씀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어느 박식한 한국 기독교인의 말에 무척 감동한 바 있는데 그는 아무개의 책은 성경연구를 별로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그 아무개가 바로 내가 아닌가?”

이눌서 선교사는 그 아무개가 아니었다. 이 같은 것이 초기 한국의 신학 교육과 한국 신학이었다. 이 시기에 나타난 신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넓은 의미로 엄격한 보수주의였다. 그래서 초기 한국 교회의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비평가들에 강경(强硬)하게 대했다. 그래서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적 장로교의 기관이라는 한국신학대학교(한신대)의 신학과 강사 강원용(姜元龍, 1917-2006) 목사는 이 같은 초기 한국 장로교 신학을 가리켜 ‘막무가내의 근본주의’라고 혹평(酷評)했다.

그러나 신학적 발전을 주도했던 선교사들이 강원용 목사의 말처럼  그렇게 거칠지 않았다. 1934년에 있었던 미국 장로교 한국 선교부 50주년 기념식에서 곽안련 박사는 선교부의 보수주의 특징을 언급했다. 그는 한국 선교사역이 큰 성과를 거두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보수주의를 들고 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한국선교에서 큰 성과를 거두도록 허락하신 비결이었다.”            

또 마포삼열도 박사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국 선교부의 복음주의 메시지는 확실하다. 선교부 산하 선교사 대부분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검이라는 강한 확신을 하고 있으며,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시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시고 하늘에 오르사 다시 오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강한 확신을 지녔다.”

최근에 이런 신학적 강조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 연합장로교(PCUSA) 에큐메니칼 선교와 국제위원회 실행 위원장인 스미스(John Smith)는 하나의 신학 사상을 강조하는 선교사들이 한국에 집중된 것이 현재의 한국 교회 분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이렇게 말했다.

“만약 보수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만을 강조했더라도 이와 동일한 결과가 초래되었을 것이다. 기독교 복음 가운데 하나의 특별한 주장에 국한된 가르침 때문에 지금까지 교회가 당했던 어려움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 같은 극단적 보수주의는 개혁파 전통 가운데의 다른 조류에서도 분리되고 고립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국내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사상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을 세우게 되었다. 일제시대(日帝時代)도 일본 신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계속한 사람들은 의심을 받았다. (중략) 그래서 한국 교회는 보다 더 자유주의적인 기독교 신앙의 비평을 대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으며 또 외국의 극단 근본주의자의 공격에도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          

이러한 스미스의 주장은 한국장로교의 초기 근본주의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 견해를 가진 전형적인 것이다. 보수주의 사상은 자유주의 신학의 지식에서 볼 때 교회를 고립시킨다느니, 교회를 분열시킨다느니, 한가지 사상의 조류에 극도로 국한되었다느니, 자유주의를 향해 교회의 문을 열기를 꺼려한다는 등의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자유주의자들의 이런 비판에 거의 동의하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부분적으로는 1918년부터 평양신학교의 후원하에 발간하기 시작된 ‘신학지남’을 그가 자세히 읽지 않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신학지남’은 정식 신학 교육이 아직도 낯선 교회를 염두에 두고 쓴 논문들이지만 당대의 비평 동향을 평가하려는 진정한 의욕이 나타나 있다. 일찍이 1923년 구약연구의 자유주의적 경향을 평가한 월슨(Robert Dick Wilson, 1856-1930)의 논문이 번역되었다.

다음 신학지남(神學指南)에 제시된 논문 제목들은 아직 유아기적 한국 교회에 자유주의적이건 보수주의적이건 간에 새로운 서구 사상을 소개하려고 의도된 것들이었다. ‘인도주의 신종교담’(新宗敎談), ‘바울 종교의 성립’(메이첸 저서 번역), ‘사회복음의 신학’, ‘신화적 속죄론’(贖罪論), ‘옥스포드 그룹의 의의(意義)와 그 활동’, ‘게노시스 기독론’(Kenotic Christology), ‘창조주의자(創造主義者)와 진화론주의자(進化論主義者)가 합의할 수 있는가?’, ‘에밀 부르너에 대한 평론’, ‘칼 빨트 계시관 비판’과 같은 논문들이 있는데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이 맹비난하는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고립주의라는 비난은 사실과 다르며 성립되지 않는다.

이같이 현대 사상을 다루고자 하는 열정은 한국장로교 교계에서 사용한 최초의 조직신학 교재에 특별히 반영되고 있다. 비록 구예인(John Curtis Crane, 1888-1964, 具禮仁) 박사가 쓴 이 교재는 1954년에야 출판되었으나 평양신학교 초기의 신학을 잘 나타내주는 것으로 자유주의 사상 혹은 부정적 비판주의 사상을 취급하고 있다. 1937년 구예인 박사가 조직신학을 담당하게 되었을 때 이미 현대 신학적 경향에 대응하는 개혁파 신앙을 수립하려는 열정이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조직신학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시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학생단체에 참여했고 현대신학 사상에 명백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현대 사상의 빛에 비추어 개혁파의 입장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게 긴급했다. 이런 과업을 보다 더 잘 준비하기 위해 필자는 프린스턴에서 부룬너(Emil Brunner), 파이퍼(Otto Piper), 카이 징가(John E. Kuizenga) 스테이스(W.T. Stace, 인식론) 및 여러 교수 밑에서 일 년간 수학했다. 또 뉴욕 유니온신학교에서 틸리히(Paul Tillich), 모펫(James Moffatt) 및 여러 교수의 강의실을 찾아다니고 여러 신학 잡지를 뒤져서 발견된 현대 사상가들의 광범위한 서적들을 섭렵(涉獵)했다.”

그는 신학의 기본적인 유형과 접근방식을 정통 장로교의 개혁파 신학자들에게 빌어왔으나 현대신학에 대담하게 대비하였다. 그는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 1873-1957)이나 칼빈과 더불어 바르트, 부르너, 틸리히,  파머(H.H. Parmer), 템플(William Temple)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어떤 때는 그 경향만을 설명했고 어떤 때는 부록으로 하여 다루었으며 어떤 때는 주장의 중심을 파악할 수 있는 부분만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항상 그들의 주장을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며 그들 자신이 강조할 점에서 그들의 신학을 아주 잘 부연(敷衍)하였다.

그러면서도 구예인 박사는 비판적이었다. 사실 그는 전체적으로 아주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 비판이 항상 정확하지는 않았고 종종 신앙과 이성(理性)과의 관계에 대한 프린스턴적인 전통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도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신(新) 정통주의의 상대주의를 공격하고, 개인 경험에 근거한 논증을 공격하고, 불명확한 논증을 공격했다.

“과도한 역사적 고등비판을 시인하면서 거기 속한 암시된 결과를 피하려고 성경과 내가 경험으로 알게 된 ‘하나님 말씀’을 분별해 보니 즉 예수도 성경 해석에 실수했다고 하면서도 또 예수는 친히 성육신했다고 한다. 부루너는 예수의 처녀탄생까지 부인하면서도 동시에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이 반대하여 비평하기를 ‘역사를 부인하면 그 도리의 기초가 없는 것이라.’라고 할 때 그는 참지 못하고 말하기를 ‘비판자는 너무 사실에만 구애(拘礙)되었다.’라고 대답했다. 이로써 종교의 실제는 역사에 달린 것보다도 개인의 경험(經驗)을 의지하게 되니 결국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의 철학을 비평하면서도 그 주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제10장 예정(결론) ‘버려둠’에서 구예인 박사는 대부분 현대 신학자가 보편(普遍) 구원설의 어떤 형식을 지지(支持)한다고 간파했다. 그 예로 부룬너, 템플, 파머를 들고 있으며 이 장 전체를 신(新) 보편구원설에 할애하고 있다. 현대신학에 대한 이 같은 태도가 그의 교실 강의에서는 실재로 어느 정도로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찍이 1940년에 그가 ‘신학지남’에 브룬너(Emil Brunner, 1889-1966)와 그의 성경관을 주제로 글을 썼다. 그러나 이것이 새로운 사상으로부터 한국 지도자들을 지킬 것을 추구한 정책이라는 인상은 주지 않는다. 초기의 신학에 대해 이 점을 비판하는 현대 비평가는 역사적 객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자유주의적 신학 경향의 지배를 받은 것같다.  지나친 보수주의 생각을 혹평하려는 그들의 열망은 비(非) 에큐메니칼적 자유주의 견해를 증진 시키려는 열망에서부터 생긴 것이다.

한국 교회 초기의 보수주의 특징은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 그 이상(以上)이었다. 신학적으로 한국 교회는 개혁파 신앙 즉 칼빈주의의 독특성을 예리하게 인식했다. 이는 아주 놀라울 정도이다. 예를 들어 일찍이 1937년 박형룡 박사는 뵈트너(Loraine Boettner, 1901-1990)의 ‘개혁주의 예정론’을 번역 출판했다. 1929년에는 메이천의 ‘신앙이란 무엇인가?’가 번역되었다. 구예인 박사의 ‘조직신학’은 알미니안신학과 칼빈주의신학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표준성경주석’ 서문에서 마포삼열 선교사는 초기 한국 교회 선교사들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넓게 말해 초기 선교사들의 열망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보수주의 신학 즉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장로교 신학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독특한 칼빈주의 신학을 강권하려는 선교사들의 열망이 항상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정확한 신학적 정의와 개념을 끌어낼 수 있는 신학은 수년이 걸려 발전된다. 한국 교회는 신학에 있어 그럴만한 시간과 배경이 없었다. 또 그런 신학은 성숙 된 연구를 위해 적합한 분위기도 필요하다. 그러나 초기의 한국 교회는 성숙(成熟)한 연구를 위한 시기가 아니었다. 그때는 추수하는 시기가 아니라 모를 심고 제자를 키우는 시기였다.                  

모든 한국장로교 선교사들이 색깔이 분명한 칼빈주의를 강조했는지 문제가 될 수 있다. 1905년에 있었던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의 연합 회의에서 “‘한국 그리스도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한국 국교회를 설립하기에 알맞은 시기라는 것이 오늘 비공식적으로 선교사들이 모인 의의일 것이다.”라는 말이 제기되었고 거수(擧手)로 만장일치를 보았다.

연합하자는 이런 초기의 열의로 몇 날 후에 ‘한국 복음주의 선교부 총회’를 결성했다. 이 모임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혔다. “본 총회의 목적은 선교사역의 협조이며 궁극적으로는 한국에 단 하나의 복음주의 민족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합기관의 이런 이상(理想)은 실천되지 못했다. 1905년, 1906년은 이런 연합의 열망이 최고 수위에 달한 때였다. 아마도 1907년 연합 위원회 의장이었던 미국 장로교 소속의 수웰런(William L. Swallen, 1865-1954)의 발언은 그러한 열정을 표현한 전형적인 말일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감리교 교리와 장로교 교리를 조화시키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브라운이 지적했듯이 만약 선교사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만 가부를 물었다면 연합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 장애가 있었다. 각 선교 후원 본부가 좋아하지 않는 반응을 보였고 한국인들 사이에 연합에 대한 열망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선교 본부의 반응은 바로 우리들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들이 교회 연합 사상을 관철하려는 그 정도는 자못 놀라운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그리스도교회’의 정치 형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새로운 교회의 신조는 어떤 내용이 될 것인가? 지금 이 나라에서 감리교와 장로교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내용을 모두 포함을 시킬 것인가?” 당시 연합 운동이 신학적으로 엄격한 칼빈주의 선교사들은 교회가 엄격한 칼번주의가 되길 원했었는지 의문시되었다.

선교사들이 모두 다 색깔이 분명한 칼빈주의만 가르친 것이 아닌 또 하나의 증거는 서구의 신학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것이다.(이 부분은 필자의 의역임 ; Another indication of inconsistent Presbyterianism is perhaps to be associated with western Sources.) 서구로부터 선교사들을 통해 온건한 형태의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가 유입되었다. “미국의 많은 근본주의 계통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계시 역사를 일곱 세대로 나누는 것이 미국에서 보수주의적 장로교 일부에 유입된 것처럼 한국 교회의 가르침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서구 문서의 번역 및 출판에 힘입어 한국의 세대주의는 왕성해졌는데 단 서구적 형태 그대로가 아니라 약간 변형(變形) 수정(修正)된 것이었다. 한가지 예를 들면 한국 세대주의는 미국에서 종종 나타나는 강한 율법폐기론과 같은 게 아니었다. 종말론적 해석의 경우도 서구처럼 그렇게 복잡한 경향을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세대주의는 1909년 ‘스코필드 성경’(사진, The Scofield Reference Bible, 1909) 출판 이후로 미국에 널리 퍼진 고도로 형식화된 개념보다는 1878년의 제1차 국제예언협회 정신으로 대변되는 초기 세대주의 태동기 단계에 더욱 가깝다.

세대주의가 전천년설(前千年說)의 중요한 일면으로 간주 되지만 대개 이 세대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이 세대주의를 명확하게 이해를 하지 못했다. 또 서구에서 다양하게 발달 된 세대주의 내용이 전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아마도 세대주의 신학의 가장 큰 영향은 한국 교회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과 단순한 ‘성경 해석법’의 고집일 것이다.

모든 예언의 약속에 대한 엄격한 문자적 해석과 엄격한 문자적 성취라는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원리는 아직 성경연구에 있어 역사적 자료, 언어, 신학을 이용할 수 없었던 교회나 성경을 처음 대한 교회에는 아주 체질에 맞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대주의적 성경 해석방법에서 중요한 ‘미래적인 강조’가 널리 퍼졌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한국인 목사들이 천국의 현재성(現在性)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日帝)하에서 신도(神道, 일본 토착 종교)와 교회와 투쟁에 강력한 역할을 한 것도 바로 한국 교회의 천국에 대한 ‘미래성의 강조’에 있었다. 사실 이근삼(李根三, 1929-2003) 박사는 한국에서 신도(神道)에 대항할 수 있었던 네 가지 주요한 동기 가운데 하나로 한국 교회의 ‘종말론적 기대’와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개인적 헌신을 꼽고 있다. 이근삼 박사는 이러한 ‘종말론적 기대’를 전천년설로 이야기하고 있으나 그의 이런 설명은 역사적 전천년설이라기보다 세대주의에 더 가깝다.            

그는 ‘성경의 종말론적 내용의 문자적 해석’을 말하며 재림 때 실천될 그리스도의 왕권을 말한다. 즉 지상에서는 아마겟돈 전쟁이 있어 이 세상 불신자가 1/3이 죽을 것인데 하늘에서 7년간 있을 그리스도의 파루시아(Parousia, 그리스도의 재림)를 말하고 있다. 또 전쟁과 핍박으로부터 교회가 휴거(携擧, rapture) 된다는 사상은 세대주의의 전형적인 것으로 지상의 불신자들에게는 아마겟돈 전쟁이 있는 데 반해 그리스도와 성도의공중(空中) 잔치가 있다는 것에 나타나 있다.

한국의 초기 장로교는 동양적(東洋的)인 결점으로 인해 손상되었다. 최근에 인문주의 학파에 속하는 한국 기독교 비평가들은 한국 고유 종교의 개념을 기독교회가 빌어 사용하게 되었고 기독교의 용어를 지닌 모습과 내용은 토착 종교의 개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만약 한국에 ‘Han-Sam-Wei-I1’(세 종교가 하나다)이라는 중국이나 동양의 다른 나라들처럼 혼합주의 원리가 있다면 또 이 원리가 다양한 종교가 하나의 일관된 체계인 보편설(Universality)의 일부를 형성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하면 기독교도 불교, 유교, 도교처럼 그 보편설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유지할만한 증거가 대개 조직신학 교과서에는 없다. 문제는 지역의 신자들이 그들의 신앙을 어떻게 해석했는지와 관계되는 실제적 의미와 구체적 색깔의 문제이다. 최근에 이 같은 주장이 있었다. 한국 교회의 신학에 대한 미출간 논문에서 기독교 용어를 매체로 교회의 신학에 불교, 유교, 무속(巫俗) 사상이 침투하여 계속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논문의 필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많은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기독교란 한때 왕성했다가 지금은 인기가 없어진 불교를 대신한 종교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견해를 가친 자들은 결과적으로 기독교란 단지 사후(死后)에만 관심을 가진 종교로 이해한다. 또 기독교는 현재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사람 사이의 관계 등)에는 관심 없다고 생각한다. 오직 ‘이 세상을 어떻게 빠져나갈까?’라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런 불교적 사상에서 긴급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 이근삼 박사는 윤리적으로 볼 때 교회가 유교의 터전 위에 건물을 세웠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성경의 ‘의(義)’라는 말이 ‘의식적인 정확성’이라는 유교적 의미로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그리스도는 사람을 영원한 지옥형벌에서 구원하는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나 현재의 삶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수많은 한국 교회 교인들은 생각하기를 기독교는 죄 문제, 용서 문제, 의로운 행동 등을 결정하는 유교적 의미론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이근삼 박사의 이 모든 주장이 어느 정도 옳고 어느 정도 그른지는 말하기 어렵다. 뿌리 깊이 있는 혼합주의를 헌미경적으로 살핀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들 속에 옳은 점도 있다. 여하튼 이러한 주장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여러 가지 증거들을 살펴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또 다른 문제들이 초기 장로교 흐름을 방해했다. 신비주의(神秘主義)는 교회 교육이 약했던 결과로 생긴 초기 이래로 계속된 경향이다. 견고한 칼빈주의 교훈이라면 기독교인들에게 건전한 영적 영양을 주었을 것인데 그렇지 못했다. 이와 더불어 한국 교회의 세속화(世俗化) 경향이 서서히 자라났다. 이런 경향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찬 강조의 부족에서부터 생긴 것이다.”라고 어떤 사람은 말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다른 경향은 일종의 편향된 ‘경건주의’(Pietism)이다. 경건주의자들은 종말적인 의식을 지키는 데는 열심이었으나 참된 성경적 원리인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그들의 책임을 수행해야 할 사회적 국가적 삶을 새롭게 해야 하는 의무는 게을리했다. 보수주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비평가들은 경건주의의 또 다른 약점을 지적한다. 김윤국(金潤國, 전 영락교회) 목사는 경건주의자들의 어쩔 수 없는 현실 도피주의를 말하고 있다.                

교회가 이런 요구들을 전혀 감당할 수 없게 되면 그 자신의 울타리 속으로 깊이 도피하고 만다. 긴급 상황에 대해 어떤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교회 건물 벽 안쪽으로 내향(內向)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의 본질이자 총체라고 느껴지는 것들이란 열렬한 기도, 감동적인 예배, 성경 암송 등이다. 동시에 그들이 지닌 저급한 도덕 수준이나 그들이 사는 사회의 저급한 도덕 수준이 아무런 문제 거리가 되지 않는다.

기도가 열렬한 이상 그리고 헌금을 정성껏 바치는 이상 그리고 예배가 감동적인 이상 다른 그 어느 것도 그들의 영적 행복을 방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사상이 바로 그렇다. 서울에 있는 장로회 신학대학(통합)의 신약학 교수인 이상근 박사도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한국 교회는 사회의 뒤를 따라가지도 않고 옆에서 동행하지도 않는다.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을 잊고 있으며 어리석은 자만에 깊이 빠져 있다. 우리는 우리 현재 상태를 알 수 없고 우리에 대한 세상의 비평을 알 수 없기에 길을 잃고 하나의 행성(行星)인 세계로부터 이탈해 가고 있다.”

특히 신비주의(神秘主義, mysticism)는 요즘의 문헌에서 날카로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는 이들의 신학적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 전체가 교회에 대한 그들의 비판적 태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림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 비평가들이 이 모든 주장이 사회복음이니 자유주의적이니 바르트적이니 하는 전제를 지녔다고 말함으로써 쉽게 매도할 수만은 없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한국 장로교 초기의 횃불은 강력하게 타올랐다. 그렇지만 약한 면도 있었다. 이 두 가지 측면이 후대에 확대되어 나타났다.(*) 글쓴 이 / 간하배(Harvie M. Conn, 1933-1999) 출처, ‘한국장로교 신학사상’(서울, 도서출판 실로암, 1988) pp.1-40.   간하(Harvie M.Conn, 1933-1999), 1933년 캐나다 출생, 1957년 미국 이민, 1954년 미국 칼빈대학 철학, 1958년 펼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TH. M.), 칼빈주의 신학연구 업적 인정받아 1976년 제네바대학 문학박사(D. Litt), 1972년 귀국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 미국 정통장로교 선교부 선교사로 1960년-1971년 한국 사역, 농촌전도, 윤락여성 전도, 장로회총회 신학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