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교 신학의 뿌리(3) 초기 한국장로교 신학 배경
한국장로교 신학의 뿌리(3) 초기 한국장로교 신학 배경
시작하는 말
본 글에서는 초기 한국장로교 선교사들의 배경(背景) 연구를 통해 그들이 속했던 미국 장로교단의 신학적 방향과 신학교의 신학 토대 및 영적 분위기를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들 각자가 본국에서 체득한 신학과 사상을 선교사역을 통해 선교지인 한국교회에 그대로 이식했음을 가정해 볼 때 이는 매우 의미 있는 연구라 할 수 있다.
왜냐면 그들이 가진 신학 사상이 선교 활동에 반영되므로 한국교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음은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 글은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뿌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다.
필자는 첫째, 한국에 입국한 초기 장로교선교사들의 역사에 관해 일견할 것이다. 둘째,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미북장로교선교부(PCUSA), 호주선교부(PCV), 미남장로교선교부(PCUS),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PCC)를 중심으로 각국 교단의 신학교의 배경과 신학적이며 영적 분위기를 중심으로 다루고 셋째, 결론으로 초기 한국장로교 선교사들이 본국에서 터득한 신학의 특징을 정리 평가할 것이다.
1. 한국에 입국한 초기 선교사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다양한 교파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장로교 배경을 가진 선교사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의 장로교 배경은 각각 다르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신학적 배경이 없었던 목회자 혹은 선교사 부인 여성 선교사, 의료선교사 그리고 평신도 선교사 등 다양한 부류가 있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은 선교사를 차지하는 선교부는 단연 미북장로교(PCUSA) 선교부였다.
(1) 미국 북장로교회(PCUSA)
미북장로교(The Presbyterian Church of the United States in America) 선교부에서 최초로 파송된 선교사는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이었다. 그는 부인과 함께 1884년 9월 20일 한국에 입국했다. 이어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 元杜尤)가 1885년 4월 5일에 의료선교사 헤론(J.W. Heron, 1856-1890)과 그의 부인이 1885년 6월 21일 도착했다.
알렌은 첫 서양병원 광혜원(廣惠院)을 세워 의료선교를 시작했다. 그리고 원우드는 1886년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하면서 첫 번째 회심자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성만찬을 행했다. 그 후 1888년 3월에 호촌(Lillias Horton, 1851-1921, 원두우와 결혼), 1888년 12월 기일(James Scarth Gale, 1863-1937), 1890년 1월 25일 마포삼열(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이 각각 입국했다.
따라서 1890년까지 한국 입국한 안수받은 목사는 3명으로 원두우, 기일, 마포삼열이었다. 이들의 출신학교를 보면 원두우는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에 있는 개혁신학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출신이며, 기일은 토론토대학(University of Toronto) 출신이다. 마포삼열은 시카고의 맥코믹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출신이다.
(2)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PCV)
호주장로교회(The Presbyterian of Church in Victoria, PCV)가 파송한 첫 한국 선교사는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1856-1890)였다. 데이비스가 한국선교를 결심하게 된 데는 영국교회 선교회 소속 울프(Archdeacon J. R. Wolfe)의 영향이 컸다. 울프는 중국과 인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사역 중 건강도 나빠지고 청불전쟁이 일어나 불안한 정국(政局)에 요양차 고국으로 가는 길에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가서 배를 타고 가려고 했다.
이렇게 한국에 잠시 머물게 된 울푸는 그보다 일 년 전(1884년) 한국에 온 알렌 의료선교사를 만나 한국선교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글로 써서 호주 멜버른 코필드에 있는 성 메리교회의 맥카르트니(Hussey Burgh Macartney, 1799-1894) 목사에게 보냈는데 그 글이 교회에서 발행하는 선교소식지(宣敎消息誌)에 실리게 되었다.
그 글을 마침 데이비스가 읽게 되었고 큰 감명을 받아 한국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데이비스는 이미 20개월의 인도 선교 경험이 있었다. 그가 건강문제로 본국으로 돌아와 요양 중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한국으로 가기 위해 성공회에서 장로교회로 적을 옮겼다. 그리고 1888년 11월 22일 딕슨, 맥크라덴과 함께 호주 선교사로 호주선교회의 인준을 받았고 1889년 10월 2일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에 도착하자 5개월 정도 한국말을 배운 후 사람들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서 부산까지 약 3주간에 걸쳐 300마일의 도보 전도 여행을 강행했다. 그러나 여행 중 쌓인 피로와 폐렴으로 부산에 도착한 다음 날 1890년 4월 5일 한국 입국 6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그의 죽음으로 1891년 백카이(J.H. MacKay) 목사 부부와 미혼인 멘지스(Belle Menzies), 페리(Jean Perry), 피셋(Fawcett) 이렇게 5명이 새로 파송 받아 한국에 왔다.
(3) 미국 남장로교회(PCUS)
세 번째로 미남장로교(The Presbyterian Church of the United Stares) 선교부가 한국에 설치되었다. 한국 선교사로 사역 중인 미북장로교 원두우가 안식년 중 1891년 10월 내쉬빌(Nashville)에서 열린 ‘미국 신학교선교연맹’ 집회에 윤치호(尹致昊, 1865-1945)와 함께 참석 한국선교 강의를 했다. 이때 참석한 리치몬드에 있는 유니온신학교(Union Presbyterian Seminary)의 학생 3명이 이 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아 한국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들이 바로 전위렴(William McCleery Junkin, 1868-1908, 全緯廉) 부부, 이눌서(William Davis Reynolds, 1867-1951) 부부였다. 그리고 한국에는 미혼 여성 데이비스(Linnie Fulkerson Davis), 최마태(Mattie Samuel Tate)와 미혼 남성 최의덕(Lewis Boyd Taie)도 함께 모두 7명이 입국했다. 그들은 서울에 머물면서 한국말과 풍습을 익혔다. 그리고 네비우스 지역분할 정책에 따라 미남장로교는 전라도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으로 인해 1895년까지 선교거점을 마련할 수 없었다. 1895년 최의덕과 그의 자매 최마태가 전주지역에 선교거점을 마련했다. 그다음 1896년 군산, 1898년에는 목포에 선교거점이 세워졌다. 1904년에는 광주에 그러고 1913년에는 순천에 각각 선교거점을 마련함으로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었다.
(4) 캐나다장로교(PCC)
늦게 한국에 입국한 선교부는 캐나다장로교(The Presbyterian of Church in Canada) 선교부다. 캐나다 선교부가 한국에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하게 동기를 제공한 인물은 맥켄지(William J. McKenzie, 1861-1895)였다. 그는 핼리팩스 장로교대학 학생선교협회의 대표로 라브라도 연안을 향해 항해하면서 ‘은둔의 나라’(조선)의 책을 읽고 한국에 대한 선교의 비전을 품었다.
1893년 여름 캐나다를 떠나 그해 12월 12일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서울에 도착하여 황해도 지역 소래로 갔다. 그곳에는 소수의 기독교인이 있었다. 그가 한국의 선교 상황을 소상하게 적은 편지를 캐나다 장로교 총회 선교부에 전달하므로 한국의 최초의 캐나다장로교 총회 선교부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소래에서 지나친 사역으로 인해 장티푸스에 감염 1895년 6월 21일 소천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소래교회 서경조(徐景祚, 1852-1938) 목사가 캐나다장로교 선교부에 편지를 보냄으로 1897년 캐나다 총회는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자는 의견에 인준했다. 그리고 핼리팩스 장로교대학 출신 가운데 세 명의 선교사를 임명했다. 그들이 바로 의사이며 목사인 구례선(Robert Grieson, 1868-1965 具礼善), 부두일(William Rufus Foote, 富斗一), 마구례(Duncan M. McRae, 馬求禮)였다. 이들은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부의 파송을 받은 후 1898년 9월 8일 한국에 도착했다. 그 후 캐나다 선교부는 함경도지역을 맡아 선교를 시작했다.
초기 장로교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해 시행한 사역은 각 선교부가 차이가 있었다. 미북장로교(PCUSA)는 알렌을 중심으로 한 의료사역, 원두우를 중심으로 한 문화사역, 마포삼열을 중심으로 한 성경학교 사역으로 일관되었다. 호주 장로교회(PCV) 선교사들은 경상도 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전도를 통한 교회를 세웠다. 미남장로교(PCUS) 선교사들은 전주, 군산, 광주, 순친 목포 등을 선교거점으로 정하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설립하였다. 캐나다 장로교(PCC) 선교사 푸트, 택래, 그리어슨은 1898년에 입국하여 학교 사역, 주일학교 사역, 여성사역, 성경 번역사업, 문서사업, 사회운동 등의 사역을 전개하였다.
이런 가운데 적어도 1900년 이전까지의 선교사역의 중심은 미북장로교(PCUSA)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왜냐면 미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한국에 입국해 선교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893년 장로교 공의회가 결성됨으로 각 선교부의 대표들과 한국인 대표들이 모임으로 협력과 양보의 정신으로 사역을 펼쳐갔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한국에 입국한 초기 장로교선교사들의 본국 배경을 살피는 것이다. 이제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진들의 본국 신학을 검토하도록 하자.
2. 초기 장로교선교사들 신학교 배경
(1) 미국 북장로교
1884년 최초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미북장로교(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PCUSA) 선교부는 순수 복음 선교사, 의료선교사, 여성 선교사 그리고 선교사 부인들로 1884년부터 1910년까지 25년간 총 166명을 파송했다. 이 가운데 목사는 모두 52명이었다.
미북장로교 선교부가 해외에 선교사들을 파송할 무렵 미국은 신학적으로 그 영향력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진보적인 면을 보이고 있었다.
첫째, 미국 장로교 내에 보수파인 구학파(Old School)와 진보파인 신학파(New School)가 서로 대립(對立) 관계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양파의 대립 양상은 미국 장로교회 분열기인 1837년에서 1870년의 분열과 재연합의 역사 가운데 극명하게 드러났다.
양파는 서로 상이(相異)한 신학 사상을 가졌기에 계속 논쟁을 거듭한 결과 교회 분열을 초래했다. 그것은 교리와 정치제도에 관한 문제였다. 보즈만(Theodore D. Bozeman)은 구학파의 장로교 신학을 “강한 신조주의 지만 확고한 복음주의이다. 자신들이 죽은 정통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호전적이다.”라고 평했다. 구학파와 신학파의 중요한 차이점은 칼빈주의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한 충성도이다. 양파 간에는 이 문제를 놓고 항상 긴장 관계에 있었다.
1828년 예일신학교(Yale Divinity School)서 테일러(Nathaniel William Taylor , 1786-1858)의 졸업식 설교는 정통신학을 벗어난 신신학(New Divinity)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인간 구원에 있어 칼빈주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강조하며 원죄(原罪)를 달리 해석했다. 그것은 아담의 후손에게 전가(轉嫁)되는 죄(罪)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정통 칼빈주의 신학 사상으로 무장된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그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핫지와 데일러의 신학 논쟁이었다. 이로 인해서 양파(兩派)의 분명한 선이 그어지게 되었다. 구학파는 교리(敎理)에 더 강조점을 두었으나 신학파는 도덕적(道德的) 사회적(社會的) 관점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둘째, 부흥운동 논쟁이 시작되었는데 이 논쟁의 핵심은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75)의 새로운 수단(New Measures)에 관한 문제였다. 피니는 인간 의지(意志)로 얼마든지 회심(悔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진보적인 신학파들은 동의했지만 구학파인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신학파들이 교회 부흥에 성공함으로 미국에 새로운 피니신학이 형성되게 되었다.(그 부흥이 성경적이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 편집자)
셋째, 성경관 논쟁이다. 그 후 양파(兩派)의 상이(相異)한 신학적 논쟁의 대표적 사건은 뉴욕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찰스 브릭스(Charles Briggs, 1841-1913)의 학설이었다. 그는 독일 성경 고등비평(高等批評) 신학의 영향을 받아 1880년대의 논문과 1881년의 강연을 통해 정통신학과 성경관에 정면으로 도전 장로교 안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미북장로교는 이 사건을 좌시할 수 없었으며 1892년과 1893년 총회는 성경 원문의 무오성을 선언하고 동년에 브릭스 교수를 장로교에서 정직(停職)시켰다. 한편 1887년 총회는 신앙고백과 교회기구에 있어서 개정위원회를 설립했다. 1887년과 1888년 총회에서 이 안건이 다루어졌고 1889년 총회에서는 이를 좀 더 확대하여 15개 노회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개정(改定)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받아 결국 1903년 총회는 그 개정안을 채택하였다.
이는 정통 보수주의 신학이 조금씩 변질(變質)되어 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미국 장로교회의 정통신학은 독일의 비평신학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에 의해 계속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프린스톤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중심으로 한 교수들은 소위 프린스톤 신학 체계를 형성해 진보적인 비평신학을 방어했다.
1890년 필립 샤프는 “개정은 진행되고 있었다. 몇 년 전에는 성경 번역을 개정하더니 이제는 신조를 개정하려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당시의 진보신학의 무차별 공격을 표현한 말이다. 구(舊) 신조의 방어자는 워필드(B.B. Warfield, 1851-1921)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조’로서의 중요성을 역사적, 과학책 그리고 신앙적, 영적인 종교의 금자탑으로 표현하며 옹호했다. 그가 신조(信條)의 개정을 반대한 이유는 첫째, 개정하려는 시도는 또 다른 개정의 시도를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둘째, 교회의 이런 상태는 결국 장로교회를 파괴(破壞)로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개정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여전히 일부 보수적 신학교가 현대주의(現代主義, Modernism) 사상에 대해 매우 방어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워필드의 프린스턴 신학체계를 이어간 사람은 메이첸(John G. Machen, 1881-1937)이었다. 그는 전투적 자세로 현대주의에 저항했다. 이로써 당시 북장로교는 밀려오는 현대주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맥코믹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와 프린스턴신학교 학생들은 보수신학으로 무장된 건재한 교수들에 의해 현대주의 신학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는 요람이었다.
① 맥코믹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1924년까지 한국의 평양 장로회신학교 초기 교수진 대부분은 그 출신 신학교가 맥코믹신학교였다. 따라서 한국장로교 신학의 뿌리 이해를 위해 맥코믹신학교를 연구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사진, 맥코믹신학교, 1900년경)
1827년 맥코믹신학교 설립 목사는 크로우(John Finley Crowe, 1787-1860)였다. 물론 설립 당시 학교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학교가 발전 해 인디애나주 하노버대학(Hanover College) 안에 신학부(神學部)가 되었다. 후에 이 학교의 이름이 여러 번 변경되었으나 맥코믹 장로회신학교로 확정된 해는 1886년이다. 따라서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모두 맥코믹신학교 이름으로 졸업한 이들이라 하겠다.
한국선교 초기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로 1888년부터 1902년에 한국에 입국한 숫자는 14명이다. 이들 중 평양신학교 교수진은 신학과 교회 정치를 담당한 마포삼열(S. A. Moffett, 1864-1939), 기독교 윤리, 신구약 주해를 담당한 소안론(W. L. Swallen, 1865-1954), 설교학을 담당한 곽안련(C. A. Clark, 1878-1961) 그리고 후에 합류한 편하설(C. F. Bernheisel, 1874-1958), 배위량(William M. Baird, 1861-1931) 등이었다. 이들이 졸업한 해는 각기 다르나 본국에서 이들을 가르친 교수들의 학풍은 거의 같았다.
위의 선교사들 재학 당시 1888년 맥코믹신학교 교수는 대부분 보수주의 신학을 견지한 학자들이었다. 1859년 부임한 역사신학, 목회신학, 교회정치를 담당한 할세이(LeRoy J. Halsey), 변증학, 험증학을 담당한 스킨너(Thomas H. Snner), 성경역사와 교회사 담당 그레이그(Willis G. Craig), 신약문헌, 주해를 담당한 말쿼스(Dav C. Marquis), 교회를 담임하면서 수사학, 목회신학을 담당한 존슨(Herrick Johnson)이 있었고 뉴욕의 유니온신학교 출신으로 구약문헌과 주해를 담당한 커터스(Edward L. Curtis) 그 밖에 캐리어(Augustus S. Carrier)등 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교수진이 동일한 신학적 입장을 견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 당시 교수진들의 신학은 1910년 맥코믹신학교 시카고 이주 50주년 개교기념 행사에서 피셔(Daniel W. Fisher, 1838-1913)가 언급한 것처럼 자신이 1881년 이사장으로 있을 때 이사들과 교수진 안에 보수적인 사람도 있었고 좀 더 온건한 자유적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유능한 사람들을 영입했다고 했다. 이런 사실은 당시 교수진의 신학(神學)이 한 가지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이호우 교수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당시 교수진을 진보그룹과 보수그룹 두 부류로 구분하고 있다. 진보그룹으로 존슨(Herrick Johnson, 1832–1913, 수사학과 목회신학), 스티븐슨(J. Ross Stevenson, 교회사), 제노스(Andrew C. Zenos,교회사), 로빈슨(George L. Robinson, 구약학)이 있었다. 보수적인 그룹으로는 스킨너(Thomas H. Skinner, 조직신학), 그레이그(Willis G. Craig, 성경역사, 교회사), 말쿼스(Dav C. Marquis, 신약문헌)으로 나뉘었다. 이중 존슨(Herrick Johnson)은 맥코믹신학교 교수 중 가장 진보적이었다. 그는 1903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개정 운동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그는 적극 구학파에 대항한 인물로 1889년에 ‘프레스비터리안’(The Presbyterian) 지(誌)에 실렸다.
물론 1888년 교수진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이후 교수진에 참여한 스티븐슨(J. Ross Stevenson)과 제노스(Andrew C. Zenos) 역시 비평신학을 견지한 신학파에 속한 인물이었다. 이 두 교수는 1888년 이후 맥코믹신학교에서 교수했다. 특히 제노스는 학생들에게 신구약의 비평신학을 가르쳤고 이사야서 문제를 독일 고등비평 관점에서 소개하였다. 스티븐슨은 1897년부터 1902년까지 제노스는 1895년부터 교수했다.
따라서 한국장로교 선교 초기에 입국한 그리고 평양신학교에서 교수한 마포삼열, 소안론, 배위량 등은 이들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외 평양신학교 교수들은 대부분 구학파 전통에 우뚝 서 있었다. 우선 이들의 신학은 매우 성경적이면서 구학파 전통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또 목회의 실제적인 면을 강조했다.
할세이(Leroy J. Halsey, 1812-1896)는 그의 저서 ‘살아있는 기독교인’(Living Christian)이라는 책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성경적이며 실제적인 답을 주고자 했다. 특별히 영적인 삶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성경은 교리보다는 삶에 관심을 가지고 구원에 대한 본질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성장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임을 그는 거듭 강조했다. 그는 역사신학, 목회신학, 교회정치 교수를 담당했으나 성경 중심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으로서 학생들에게 전했고 실제적인 문제를 가지고 도전했으며 목회에 적용할 수 있도록 교수했다.
스킨너(Thomas Harvey Skinner, Jr. 1820-1892)는 1881년부터 1892년까지 조직신학 교수로 구학파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책 ‘Questions in Theological Course of the Seminary of the Northwest’에서 그는 1,102개의 문제를 찰스 핫지의 조직신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기초 위에서 전부 다루고 있다. 그는 구학파 칼빈주의 신학의 철저한 수용자였다. 따라서 스킨너 만큼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도 없었다. 그는 1892년 1월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에 대한 조사(弔辭)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신학자로서 스킨너는 폭넓고 정확하고 특별한 신학 문화를 가진 인물이었다. (중략) 그는 유능하고 학식 있고 분명하며 영적이며 존경할만한 그리고 열정을 소유한 교수이며,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조직적으로 주석과 변호를 하며 신앙과 실제의 무오한 규율로서 성경을 믿었다.” 또 그는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정확 무오한 법칙으로 하나님 말씀을 극진히 사랑하고 믿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이는 그를 존경한 학생들에게 그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레이그(Willis G. Craig, 1834-1911) 역시 스킨너의 뒤를 이어 1911년까지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또 모세오경의 저작권이 모세임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개정을 강하게 반대했다. 한편 신약문헌을 가르친 말쿼스(David C. Marquis, 1835-1912)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7단계로 구분하고 분석하여 연구하기도 했다. 이것은 성경을 학문적 접근 보다 실제적이고 실천적으로 접근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학교 학풍(學風)은 학자들을 배출하기 위한 아카데믹(academic)한 교과과정보다는 삶을 강조하고 주님께 헌신(獻身)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대부분 교수의 신학적 성향은 보수주의적인 입장에서 비평신학을 방어하며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변호하는 것이었다. 맥코믹신학교는 이같이 성경 중심의 정통 보수신학에 투철한 학자들과 실천신학적인 목회자를 양성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학생들을 배출했다. 특히 신학교의 신앙생활과 영적 분위기는 교수들에 의해 고무되었고 학생들에게 다양한 영향을 주었다.
첫째, 매일 교수와 학생들의 교제로 구별된 거룩한 삶을 유지했다.
예배는 모든 학생이 정기적으로 어떤 교회든 참석하도록 독려했다. 또 학생들 스스로 기도와 찬양 그리고 성경 읽기 국내외 선교 연구모임을 갖고 학생과 교수들은 영적 헌신을 위한 모임들을 가졌다. 학교 분위기는 학자 배출보다는 복음적, 실천적인 지도자를 배출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신학교 교과과정에서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앙적인 삶과 관련하여 시카고를 방문하는 유능한 설교자 나 부흥사가 있으면 그들을 초청해 듣게 함으로 학생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특히 1876년과 1877년에 가졌던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와 생키(Ira David Sankey, 1840-1908)의 부흥 집회를 통해 많은 학생이 영혼을 향한 관심이 높아졌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국내외 사역자로 크게 활동하게 되었다고 할세이(Le RoyJ. Halsey)는 회고했다.
맥코믹신학교에서 선교 활동을 장려하는 창구(窓口) 역할을 한 단체는 그레이그 박사가 조직하여 지도한 ‘도시선교회’(The City Mission Committee of the Seminary)였다. 이 선교회는 1888년 가을 시카고에서 가장 사회적으로 어두운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레이그 박사와 32명의 학생으로 시작되었다. 그레이그 박사는 매일 저녁 도시 거리에서 기도회와 함께 예배드렸다. 이게 이웃에게 각성(覺性) 되어 주일에는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해 확장되어 갔다. 신학교의 각반에서 2명씩 파송되어 선교회를 조직했고 나중에는 시카고에 있는 다른 신학생들도 동참했다.
이는 맥코믹신학교가 복음적 연합정신(聯合精神)이 강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 선교회가 1891년 가을에는 서부로 확장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더 발전되어 실제로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1892년 졸업생 가운데 20명이 외국선교사로 헌신했고 1886년 이래 1893년까지 졸업생 가운데 42명이 해외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마포삼열이 해외선교사로 헌신했던 신학생 시절에 이 단체의 영향이 매우 큰듯하다.
이같이 한국에 파송된 초기 선교사들이 그들의 재학시절 명예교수였던 할세이를 비롯 조직신학 교수였던 스킨너, 그레이그는 학생들에게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성경에 기초한 보수신학을 가르쳤다. 물론 개중에는 간혹 진보적 사상을 지닌 교수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그들이 학생들에게 미친 영향은 미약했음을 볼 수 있다.
교수진 가운데 영향력 있는 인물들은 구학파에 속한 이들이었다. 교회정치와 성례를 담당한 할세이, 조직신학을 담당한 스킨너 그리고 당시 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담당한 그레이그, 신학문헌을 담당한 말퀴스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 교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충실한 칼빈주의 신학을 지지하였다.
학생들의 영적생활은 당시 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무디의 영향이 컸다. 신학교 안에는 경건생활을 실천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며 그레이그 교수가 지도하는 ‘도시선교회’를 통해 실제적인 전도와 가르침의 사역들을 실천했다.
따라서 맥코믹신학교는 정확무오한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보수적이며 경건한 칼빈주의 신학이었으며 동시에 부흥을 갈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넘쳐났다. 전도와 사회봉사를 신학생 시절부터 실천하는 훈련을 했고 신학교의 주된 목적은 목회에 필요한 일꾼을 양성하는 데 있었다.
②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프린스턴신학교는 맥코믹신학교 보다 당시 미국에서 더욱 명성 있는 신학교였다. 하지만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들 가운데는 맥코믹신학교 출신만큼 많은 수는 아니다. 1911년부터 프린스턴신학교 출신 즉 어도만(Walter C. Erdman)이 구약주해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1913년부터 라부열(Stacy L. Roberts)이 구약 및 신약주해를 가르쳤고 후에 함일돈(F. E. Hamihon)이 1920년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왔다.(그림, 프린스턴신학교, 1900년경)

박용규 교수에 의하면 1925년 라부열이 제2대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맥코믹신학교 출신들 일색이었던 평양신학교 교수가 서서히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으로 전환되었고 신학적 입장은 오히려 더욱 보주주의 방향으로 흘렸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초기 장로교선교사들을 가르쳤던 프린스턴신학교의 신학은 어떠한 입장이었는가?
뉴저지 프린스턴신학교는 1812년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1772–1851)를 변증학(辨證學, Christian Apologetics)과 험증학(驗證學, Christian Evidences) 교수로 임명하면서 세워졌다. 그 후 찰스 핫지, 벤자민 워필드로 이어지는 프린스턴 신학을 구축함으로 신학교는 점차 발전해 미국의 보수신학을 대변했고 도전하는 현대사상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한국에 초기 선교사를 파송할 무렵인 1901년 당시 프린스턴신학교 교수진은 그린(William Henry Green, 1824–1900, 동양, 구약문헌), 패튼(William Miller Paxton, 1824-1904, 설교학, 목회신학),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1921, 험증학, 변증학), 데비스(John D. Davis, 1854-1926, 구약사), 위트(John De Witt, 1842-1923, 교회사),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1949, 성경신학) 등이 있었다.
마크 놀(Mark Allan Noll, 1946- )은 1812년부터 프린스턴신학교가 1929년 신학교가 다시 개편되기까지 프린스턴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들로 알렉산더, 핫지, 워필드를 꼽았다. 그는 알렉산더는 개혁파 신학에 입각한 고백주의와 보편주의 철학에 입각한 성경관으로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존중했다고 평가했다.
핫지는 도전하는 현대주의 신학에 대항하는 변증신학이라 했으며, 워필드는 당시 고등비평 신학에 정면으로 방어하는 논증신학을 전개했다고 평가했다. 이들의 신학을 소위 ’프런스턴신학‘(The Princeton Theology)이라고 부른다. 프린스턴 신학은 약 100년 동안 변함없는 단일성(單一性)을 유지했다.
그렇다면 한국에 입국한 초기 장로교선교사로서 프린스턴신학교 출신들이 신학교에서 수업할 그 당시 교수진들의 신학 사상은 어떠했는지 그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당시 구약문헌 교수 그린(William H. Green)은 구약총론 가운데 정경(正經, The Canon)에서 비평신학에 대항해 성경이 영감 된 하나님 말씀이라고 논증하고 있다. 그는 ‘구약의 정경’이라는 항목에서 구약을 정경으로 기록된 책으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성경의 정경은 신앙과 실제의 영감 된 규칙으로 구성된 글 묶음의 용인된 명시이다.” 나아가 ‘정경형성의 비판적 이론’ 조항에서 고등비평의 대부인 아히혼(Johann Gottfried Eichhorn, 1752–1827)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또 다른 저작인 모세오경의 고등비평에서도 철저하게 모세오경의 저자는 모세임을 논증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 6장에서 그린은 고등비평 주장자들의 가설(假說)이 철저하게 비성경적임을 논증하고 있다. 그의 성경관은 철저한 정확무오한 성경관과 유기적(有機的) 영감론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 당시 프린스턴의 성경관은 오직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철저하게 주장하는 신학의 입장을 고수(固守)하고 있었다.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는 핫지에 이어 프린스턴신학의 계승자였다. 그의 임무는 선배들처럼 개혁주의 신학을 철저하게 교육받아 선포하는 일이었고 동시에 정통 칼빈주의를 공격하는 온갖 비평을 논박(論駁)할 수 있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워필드 시대는 그의 선배들보다도 신학적으로 상황이 더 악화(惡化)된 때였다. 그는 수많은 미국 교수가 독일의 비평신학(批評神學)을 배우고 거기에 빠져 돌아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상황에서 성경 무오(無誤)를 방어하는 변증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철저한 방어자였다. 핫지에 이어 성경 영감설을 후학들에게 가르쳤을 뿐 아니라 성경 축자영감((逐字靈感說, verbal inspiration)을 강조했다. 또 “신약 기록자(記錄者)들은 철저하게 성경을 하나님의 책으로 믿었다.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뜻으로 표현되는데 사람으로서의 본성에 위배가 되지 않는 방법을 통해 성경 모든 부분이 인간 저자의 마음을 표현하면서도 하나님의 책이지만 또한 사람의 책으로 주어졌다.”라고 했다. 그리고 성경의 영감에 대해 “성령에 의해 특별하고 초자연적인 영향이 성경 기자들에게 주어져서 그들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한 것으로 무오하다.”라고 했다.
보스(Geerhardus Vos) 역시 성경신학 교수로서 고등비평(高等批評) 신학을 대항하여 ‘모세오경 코드의 모세 기원’이라는 책을 통해 모세오경의 저자가 모세임을 조목조목 논증했다. 이같이 프린스턴신학교의 모든 교수는 철저하게 비평신학에 도전하여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끊임없이 주장했다. 프린스턴 신학은 아치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1772–1851)에 의해 시작되고 찰스 핫지에 의해 체계가 세워졌다. 그리고 벤자민 워필드에 의해 강화되고 유지되었다. 프린스턴 신학의 특징은 이렇다.
첫째, 철저한 성경 영감론에 기초해서 당시에 도전해 오고 있는 유럽의 비평신학에 변호하고 있었다. 이때 프린스턴 신학을 변호하는 이들 가운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워필드였다.
둘째, 구(舊) 학파 신학으로 대표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견고하게 붙들고 있었다. 이것이 성경을 지킬 수 있는 신조(信條)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프린스턴 신학은 맥코믹보다 더욱 철저하게 당시 도전하는 비평신학의 방어자였다. 이런 입장은 프린스턴신학교 교수진들의 일관된 사상과 태도였다.
당시 프린스턴신학교 교수들의 신학은 철저한 성경적 성경관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이며 경건한 칼빈주의 신학 입장에 서 있었다. 적어도 이런 사상은 프린스턴 신학의 교과과정이 개편되는 1929년까지 계속 구(舊) 프린스턴 신학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1900년대에 한국에 입국한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은 다 철저하게 성경무오 사상으로 무장된 구(舊) 학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프린스턴신학교 분위기는 단지 학구적인 면만 강조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회를 통해 학생들이 영성을 유지하게 했다. 특히 주일 아침 신학교 채플에는 교수들이 돌아가면서 설교를 통해 학생들에 도전하도록 격려했다. 주일 오후에는 주어진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통해 경건한 삶을 끌어내게 했다. 그리고 주일 저녁에는 선교회 모임으로 모였고 또 한 달에 한 번은 교수들의 지도하에 연합기도회로 모였다. 그 밖에도 사회를 위한 다양한 사역에 봉사하도록 지도했다.
이런 신앙과 삶의 균형을 갖춘 지도자 훈련을 신학교 재학 중에 학교에서 마련했다. 특히 워필드는 학생들에게 깊은 영적 통찰력을 주었다. 신입생을 위한 강연에서 그는 월버포스(Wilberforce) 감독의 말을 인용하여 마음의 훈련, 손의 훈련, 머리의 훈련을 통해 헌신과 실제(實際) 그리고 지적훈련을 강조했다. 따라서 프린스턴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은 신학 공부를 하면서 철저한 성경의 영감교리, 말씀을 통한 경건 생활 그리고 세계선교에 헌신할 수 있는 실제적인 사역자로 훈련을 받았다.
(2) 호주 빅토리아장로교
① 빅토리아장로교회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는 호주 연방정부가 구성되기 이전의 독립교회로서 1889년 10월 2일에 이 교회의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1850-1946) 남매가 한국에 입국함으로 한국선교가 시작됐다. 당시 호주 상황이 아직은 영국의 통치하의 독립된 식민지였다. 그 후 1901년 호주 연방정부가 구성되면서 호주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Australia, 사진 1900년)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같이 최초 호주 한국선교의 시작은 빅토리아장로교회였으며 한국선교를 주도했다. 호주 선교사 대부분이 빅토리아장로교회 여전도회 연합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이었다. 그 외 청년연합회와 총회 해외선교부가 파송한 선교사들이었다. 그러므로 빅토리아장로교회는 초기 호주 선교사들의 신학과 신앙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교회이자 동시에 왜 한국선교를 시작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호주(Australia) 이민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19세기 영국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이 이주해 왔다. 이주해온 장로교 교인 대부분이 스코틀랜드(Scotland) 출신이었다. 그런데 이미 1843년 스코틀랜드에서 영국 국교회가 분열되어 사역자가 부족했다. 그래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호주 아일랜드장로교회와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가 협력했다.
빅토리아에 유럽인이 정착한 건 1834년 11월이었다. 그리고 최초로 정착한 목사는 클로우(James Clow)였는데 그는 타스마니아에서 와서 바르원 강(Barwon River) 부근 톰슨 집에서 1837년 10월 24일 첫 예배를 드렸다. 또 1838년 1월 28일에는 포비스(James Forbes)가 시드니(Sydney)에서 멜버른(Melbourne)으로 이주해와 첫 사역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스코틀랜드장로교회 여러 교파의 목사와 신자들이 이주해와 각기 다른 교회를 개척하여 유지하다 1850년대부터 연합을 위해 서로 노력하기 시작했다.
당시 빅토리아에는 세 개의 대표적 교단이 있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The Established Church of Scotland), 스코틀랜드 자유장로교회(Free Church of Scotland),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Scotland)였다. 세 장로교단은 10년간 교회 연합을 위한 토의를 거쳐 1859년 4월 7일 ‘빅토리아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라는 이름으로 단일화했다. 그 후 호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장로교단이 되었다.
그 후 1870년까지 호주의 빅토리아는 여러 가지 이유로 수많은 사역자를 이끌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사람들의 성공을 약속하고 또한 정부의 보조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인기 없는 사역자가 직면하는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부양자금은 없었으나 이민 장려금(이민자들이 정착할 수 있는 정착금)이 잘 시행되었다. 이것이 빅토리아가 사역자들이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되게 했다.
빅토리아장로교회는 한국선교 주도권을 가진 교단으로 이미 1860년 빅토리아장로교회 총회에 해외선교부(Foreign Mission Committee)를 조직했다. 1862년부터 원주민 선교에 모라비안 사역자 하겐나우어(F.A. Hagenaur) 목사를 파송했다. 그는 1909년까지 동부 킵스랜드 스트라포드 근처 라마하요크(Ramahyuck)에서 사역을 계속했고 1866년에는 패튼과 코시를 뉴 헤브라이즈 선교사로 파송했다. 패튼은 개혁장로교회 배경을 가진 목사로 이미 섬 전도를 하고 있었다.
빅토리아장로교회는 두 번째 선교지를 한국으로 결정하고 1889년 데이비스 남매를 한국 선교사로 파송했다. 데이비스는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YMSFU(Young Men’s Sabbath Fellowship Union)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에 입국한 지 6개월 만에 천연두로 죽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 호주교회에 한국선교의 촉진제가 되었다.
② 오르몬드대학(Ormond College)

초기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은 호주 선교사 대부분은 멜보른 오르몬드대학(Ormond College)을 졸업했다. 이 대학은 1865년 설립되어 1866년 교장 케언즈(Adams Cairns)의 첫 강의가 시작되었고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이며 설교가인 다이크스(J.0. Dykes)가 방문해 교수했다. 처음에는 교수들 집에서 가르쳤으나 1868년부터는 찰머스교회 부속 건물에서 강의했다.
1876년 이 학교의 교과과정은 도덕과학, 목회신학 그리고 과힉적 변증학이 있었다. 강의시간은 1/3이 늘어나므로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명실공히 신학기관이 탄생 된 것이다. 그 후 1881년에 비로소 이 신학기관이 오르몬드대학의 건물로 옮겨졌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신학훈련이 이루어졌다.(사진, 오르몬드대학 1900년경)
1865년부터 1880년까지 오르몬드대학 중심인물은 케언즈(Adam Cairns, 1802-1881)였다. 그는 보수적 스코들랜드 자유교회의 신학 전통을 그대로 유지 핫지의 ‘조직신학’(Outline Theology)을 교과서로 사용하여 1880년까지 교수했다. 케언즈는 성경의 권위와 속죄론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기초한 예정론을 강조했다. 이러한 케언즈는 적어도 1865년부터 1880년까지 15년 이상 호주 장로교신학 주도 인물이었다.
또 울스터(Ulster)에서 온 맥케이(Andrew Ross Boyd McCay, 1837-1915)는 스코틀랜드 자유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철저한 복음주의적 칼빈주의 사상을 가졌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제2규율서’를 가르쳤으며 그런 사상이 빅토리아에서 그 어느 곳보다 더욱 강력하게 강조되었다.
또 1884년부터 교수한 두 교수는 맥도날드(Murdoch Macdonald, ?-1906)와 렌토울(John Laurence Rentoul, 1846-1926)이다. 케언즈의 뒤를 이은 맥도날드 역시 찰스 핫지의 조직신학 교재를 사용했지만 렌토울은 변증학, 히브리어, 헬라어 주해를 가르쳤다. 그는 비평신학을 학생들에게 소개하므로 보수주의 입장과 자유주의 사이 중도적 입장이었다.
호주에서 장로교신학을 방어하던 케언즈가 1881년에 타계하므로 호주교회는 밀려오는 비평신학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이때 자유주의 신학을 그대로 용납하지는 않았으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호주교회는 부정적이며 비판적 입장이었는데 그가 바로 스트롱(Charles Strong, 1844–1942)이었다.
이때 호주 백토리아장로교 총회는 선언법(Declaratory Act)을 채택하여 교회법, 죽은 유아의 구원문제, 복음을 듣지 못한 이교도들의 구원문제 등 비본질적인 문제에 교리적 자유를 허용했다. 이는 호주교회 안에 자유주의 신학이 밀려들어 온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특히 빅토리아장로교 내 보수적 칼빈주의 신학으로부터 새로운 비평신학에 근거한 자유주의 신학으로 가는 데 있어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앤드류 하퍼(Andrew Harper, 1844–1936)였다. 그는 국제적 명성을 얻은 언어학자이며 구약성경학자였다. 1888년에 오르몬드대학에 강사로 임명되었고 성경에 대한 그의 비평적 접근과 성경의 계시성과 무오류성을 전면으로 부인하므로 영국과 호주에서 물의를 일으켰다.
그는 1901년에 시드니의 장로교 신학교인 성 앤드류 대학(University of St Andrews)의 학장으로 부임하여 오르몬드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자유주의 신학을 소개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오르몬드의 개혁주의 신학은 흔들렸다. 당시 오르몬드대학은 복음주의 계열에 서 있었지만 자유주의 신학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이런 신학적 흐름은 1910년까지는 지속이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 출신 선교사들은 자유스런 신학 분위기에서 훈련을 받은 이들로 평가가 된다.
(3) 미국 남장로교
미국 남장로교(PCUS,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의 교리적 기초는 철저한 칼빈주의(Calvinism) 신학이었다. 칼빈주의는 칼빈주의 표준문서인 예정론(Supralapsarian type)에 기초하고 있다. 미남장로교 지도자들은 신앙고백과 교리문답 역시 결코 어떤 변화를 원하지 않았으나 1880년대와 1890년대에 불어 닥친 신학적 도전 앞에 직면해야만 했다. 즉 전통적 성경의 연대, 성경의 권위, 성경의 역사성을 비판하는 자유주의 비평신학과 싸워야 했고 신앙고백의 개정(改定)을 경계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들은 장로회(長老會) 주의를 더욱 분명하고도 정확한 진술로 표현하며 더욱 교회의 철저한 조직 형태를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리치몬드의 유니온신학교(Union Presbyterian Seminary) 교회사 교수 존슨(Thomas Cray Johnson, 1859-1936)은 미남장로교의 6가지 구별된 특징 가운데 세 번째 조항으로 죄인을 구원하는 것 가운데 본질적 부분을 진정한 칼빈주의라고 하며 이것을 설교하는 것이라고 했다. 네 번째로는 장로회주의의 완전한 형태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라고 했다. 이는 미남장로교가 대단히 보수적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 하겠다.
미남장로교가 교리적으로 칼빈주의이며 교회적으로는 철저한 장로회주의를 표방했으나 선교는 미북장로교보다 좀 늦은 감이 있다. 미국 장로교 구(舊) 학파와 신(新) 학파 간 연합 후 1856년부터 미남장로교는 해외 선교에 힘쓰기 시작했다. 교회 해외 선교사역은 월슨(John Leighton Wilson, 1809-1886)이 총회에 헌의(獻議)하고 그의 지도하에 시행되었다.
물론 북미 원주민 인디언 선교는 이미 시작했으나 해외 선교는 인슬리(Elias B. Inslee) 목사 가족이 1857년 중국 상하이 지역 선교사로 파송되면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미남장로교 역사상 최초로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한 효시였다. 같은 해에 이탈리아에 선교사를 파송했고 1868년에는 브라질, 1874년에는 멕시코, 그리이스, 1886년에는 일본, 1890년에는 아프리카, 한국은 1892년에 이눌서(Reynolds) 부부, 전위렴(Junkin) 부부, 데이트(Tate) 남매, 데이비스(Linnie Davis)를 파송함으로 시작되었다.
이 같은 미남장로교 해외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70년 남부의 구학파와 신학파가 연합한 이후 총회에서 해외 선교를 위한 조직을 구축(構築)하면서 시작되었다.
① 유니온신학교(Union Presbyterian Seminary)
미남장로교는 1799년부터 1804년까지 부흥운동 이후 교인의 급증으로 인해 목회자를 양성할 신학교가 절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1806년 하노버(Hanover) 노회는 성경에 대한 무지와 오류 그리고 행동에 관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신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편 1812년 버지니아(Virginia) 노회는 노회 안에 신학교 설립을 결의하고 신학교 건립 모금을 위해 호지(Moses Hoge)를 교수로 임명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책임을 감당하다가 1820년 소천했다.
대회는 다시 알렉산더(Archld Alexander) 교수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거절하여 2년 동안 후임자가 없어 신학교 건립문제를 하노버 노회로 넘겼다. 그러자 동부 버지니아의 모든 노회는 대회전에 신학교 건립 프로젝트를 세워 단순하게 한 개의 학과로 신학교를 시작했다. 그리고 1822년 11월 16일 리치몬드 제일장로교회 라이스(John Holt Rice, 1777-1831) 목사를 교수로 임명했다. 그는 열심히 여러 곳에 다니며 모금하여 드디어 1824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신학교가 개교되었다. 이것이 유니온신학교(Union Presbyterian Seminary, in the city of Richmond, Virginia) 설립배경이다.
신학교는 1826년 총회로 귀속되었지만 1827년 하노버노회는 버지니아대회와 북캐롤라이나대회가 공동운영하도록 양도했다. 이때 유니온신학교(뉴욕 유니온신학교와 다름 – 편집자)로 개명했다. 이때부터 신학생들의 숫자가 계속 증가했다. 라이스는 도서관, 강의실, 기숙사, 저택을 마련하는 놀라운 성과를 남기고 1831년 소천했다. 그 뒤를 이어 1831년 11월 백스터(George A. Baxter, 1771-1841)가 조직신학을 담당하게 되었다.
1953년 미국 남부 개혁주의 신학을 대변하는 답네(Robert L. Dabney, 1820-1898)가 교회사와 교회정치 교수로 임명되었다가 후에는 조직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스미스(Benjamin M. Smith, 1811-1893)가 동양문헌 교수로 임명되었을 때 학생은 계속 증가하다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1861-1865) 기간에는 신학교가 쇠퇴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1865년부터 10년은 회복과 성장 기간이었다. 1870년 알렉산더(Henry C. Alexander, 1878-1975)가 성경문헌과 신약해석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883년 밀러스버그교회 모어(Walter William Moore, 1857-1926)가 동양문헌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신학 사상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비평신학적으로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애플비(James Appleby)는 “1883년 모어가 가르치기 시작할 때 그의 신학 사상은 그의 연대기 작가가 표현한 것과는 달리 보수적 입장과 거리가 멀었다.”라고 말했다. 즉 그는 당시의 성경 문자주의와 영감론에 있어 진보적이었다.
같은 해 1883년 여름 조직신학 교수 답네가 은퇴한 후 이어 펙(Thomas Ephraim Peck, 1822–1893)이 임명되었으며, 멤피스 제2교회 목사 라티머(ames Fair Latimer, 1845-1892)는 펙의 이동으로 교회사 및 정치를 가르쳤다. 라티머는 교수와 설교자로 학생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는 진리를 사랑하고 자신의 전공을 폭넓게 연구했으며 통찰력을 가지고 학생들을 교수했다. 그는 학자로서 모든 학생에게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었다.
1891년 알렉산더가 은퇴하고 이어 사우스웨스턴 장로교대학교 명예총장 히스만(Charles. C. Hersman)이 성경문헌과 신약해석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는 철저한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인정하는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으로(1863년 졸업) 1887년 가을 컬럼비아신학교에서 성경문헌 책임교수로 봉직했다. 1888년 사우스웨스턴대학교에서 히브리어, 신약문헌을 담당했고 1891년에 유니온신학교로 이적했다.
1892년 라터머가 소천하고 이어 존슨(Thomas C. Johnson)이 교회사와 교회정치를 담당했고, 욕크빌교회 목사 잉글리쉬(Thomas R. English)가 영어성경과 목회신학 가르쳤다. 잉글리쉬는 전통적 성경연구 틀을 깨고 귀납법적인 성경연구로 학생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런 가운데 유니온신학교에서 40년 이상 교수한 스미스가 1893년 소천했고 그해 여름에 펙(T.E. Pect)이 소천했다. 그리하여 바우한(C.R. Vaughan)이 조직신학과 험증학 교수로 임명되어 1896년까지 가르쳤다.
이처럼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 교수들 신학은 철저한 칼빈주의 보수신학을 견지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유니온신학교 교회사 교수 존슨의 미남장로교의 구별된 특징의 지적은 이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당시 학생들은 신학의 모든 분야에 있어 탁월한 교수들로부터 보수적이며 경건한 신학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유니온신학교의 영적 분위기는 학생들이 말씀, 기도, 봉사, 전도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운영되었다. 매일 아침 채플이 열렸으며 모든 학생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도왔다. 주중에는 반별 기도 모임이 있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서로를 위한 기도 시간을 갖고 서로 우정을 나누었다.
수요일 밤 모임에는 학생들이 교수와 교인들 앞에 설교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한편 월요일 아침에는 선교연구를 통해 선교의 열정을 유지했으며 주일에는 자신이 원하는 교회에 가서 교육과 설교를 통해 지역교회를 섬겼다. 이 같은 유니온신학교의 영적 분위기는 학생들에게 영적 영향과 교회 봉사, 선교의 열정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4) 캐나다장로교
① 캐나다장로교 해외 선교부 역사
캐나다 초기 정착민은 주로 영국인들이었다. 이들은 1713년 우트레이트조약(The Treaty of Utrecht)에 따라 캐나다로 이주했다. 유럽에서 프랑스와 영국은 오랫동안 대립 관계에 있었다. 군주정치는 가장 강력한 정치형태였다. 양국은 패권을 놓고 충돌과 전쟁을 계속하는 중 당시 발견한 신대륙 캐나다는 패권을 차지한 영국 영토가 되었다. 그래서 그 당시 뉴 브런즈윅(New Brunswick)을 포함하고 있는 노바 스코시아(Nova Scotia)는 1713년 우트레이트조약에 따라 영국에 이양되었다.
1758년 프린스 에드워드섬(Prince Edward Island)과 캐이프 브레톤섬(Cape Breton Island) 역시 영국에 합병되었다. 이후로 영국 정부의 후원하에 영국과 유럽 여러 오래된 식민지로부터 개신교 교인들이 캐나다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영국교회는 분리주의자들의 양심의 자유를 위해 교회를 합법적으로 캐나다에 설립하기 시작했다. 또 우트레이트조약에 의해 아카디안(Acadians, 캐나다 남동부지방 사람들)들은 프랑스 통제 지역으로 이주할 기회가 열렸다. 그래서 초기에는 프랑스령 지방인 노바 스코시아에 아카디안이 주로 정착했으나 그 후 유럽의 이주민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핼리팩스(Halifax)는 노바 스코시아 지역 센터였다. 1749년 핼리팩스 형성 직후 그곳에 두 개의 교회가 거주민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하나는 영국 국교도를 위해서 다른 하나는 비국교도를 위해서 세워졌다. 비국교도 교회는 개신교 분리주의자들의 교회로 알려졌고 영국 국교도 교회는 성 마태채플로 알려졌다. 그런데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노바 스코시아에 이민 온 사람들 가운데는 다수의 장로교 교인들이 있었다.
1761년 첫 번째 장로교 회중이 노바 스코시아 런던데리(Londonderry)에 정착한 사람들 가운데 지도자는 맥너트(Col. McNutt)였다. 이들은 1764년 뉴저지와 뉴 브룬스윅노회에 목회자를 청원했다. 이때 리용(James Lyon)이 파송을 받아왔다. 그는 런던데리, 투르로, 핼리팩스, 온슬러 등 기타의 다른 지역을 순회하면서 설교했다. 그러다가 1766년 버거(Burgher) 대회로부터 파송 받은 킨록(Kinloch)이 투르로에 2년 동안 사역하다가 스코틀랜드로 되돌아갔다.
노바 스코시아에서 평생 사역한 목사는 몰독(James Murdoch, 1744-1799)이었다. 그는 선교사로 스코틀랜드 반(反) 버거(Anti-Burgher) 대회로부터 파송 받아 왔다. 1767년 핼리팩스에 도착한 그는 처음에는 비(非) 영국 국교교회서 사역하다가 후에 영국 국교인 성 마태교회에서 한동안 설교했다. 그는 홀톤(Horton)에 정착해 콘웰리스(Cornwellis), 윈저(Windsor), 슈벤아카디(Schubenacadie)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1770년 7월 3일은 캐나다 장로교회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날 캐나다 장로교회가 처음으로 목사 임직식(任職式)을 했다. 리용, 몰독, 세템브, 펠프스 등 여러 지역이 합력해 코민고(Brunin Romacas Cominge)를 목사로 세웠다. 그 후 1786년 투르로에서 첫 노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콕(Daniel Cock), 스미스(David Smith), 그래함(Hugh Graham), 존스톤(Johnston), 밤힐(John Barmhill) 등 교회 치리(治理) 장로들과 함께 모여 투르로노회를 조직했다. 이것이 캐나다 첫 번째 노회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1860년 노바 스코시아의 비(非) 국교도 교회 대회와 자유교회 대회는 영국 북아메리카의 저지방 장로교회 대회를 형성하기 위해 연합했다. 그리고 1866년 뉴 브룬스윅 자유교회 대회 역시 그들과 연합했다. 또 1868년 마리타임 지방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노회도 스코틀랜드 교회와 연합하여 마리타임 지방의 장로교회 이름으로 연합했다.
1870년까지 이렇게 여러 지역이 연합의 결과로 캐나다의 장로교는 4개의 그룹이 되었다. 마리타임에 2개 중부 캐나다에 2개였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배경을 가진 교회 2개 그리고 분리주의적 흐름을 가진 자유교회 2개를 의미한다. 캐나다 장로교회는 국가연합의 정서에 따라 이렇게 연합의 분위기를 타고 있었다.
이후 캐나다장로교 전국연합 조직 제안이 서부대회에서 상정되었다. 대회의 의장인 올미스톤(William Ormiston)이 스코틀랜드와 연관이 있는 캐나다 장로교회 대회 의장인 젠킨스(John Jenkins)에게 연합을 제안했다. 그 결과 첫 번째 모임이 1870년 10월 몬트리올(Montreal)에서 개최되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선교사역은 놓칠 수 없는 교회의 사역이었다. 특히 1875년 이 시기의 선교사역은 매우 어려움이 있었다. 캐나다 장로교회가 연합은 되었으나 각각의 교회가 선교 프로그램에 따라 서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두 개의 해외 선교위원회가 존재했었다. 마러타임 지방에 1개, 중부 캐나다에 1개가 있었다. 1886년 연합 해외 선교위원회가 구성됐으나 동부와 서부지역으로 나누어줬다.
1892년에 첫 번째 해외 선교위원회 총무로 맥케이(R.P. Mackay)가 선출되었다. 1898년 한국에 최초로 입국한 공식적인 선교사인 구례선, 마구례, 부두일은 바로 이 해외 선교회 파송으로 내한한 선교사들이며 이들은 노바 스코시아에 있는 핼리팩스 장로교대학 출신들이었다.
② 핼리팩스 장로교대학(Presbyterian College, Halifax)
캐나다에서 핼리팩스 장로교대학(The Presbyterian College, Halifax)은 가장 오래된 학교로 1820년에 설립되었다. 이 학교가 계속 발전하여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지만 달하우지대학(Dalhousie University, Public university in Halifax)이 폐교(閉校)됨으로 이 학교에 부속되어 있던 핼리팩스 장로교대학은 더 이상으로 학생들을 선발할 수 없었다. 그러나 1848년 픽토우(Pictou)의 웨스트 리버(West River)에 다시 신학교(神學校)를 개교하여 학생들을 선발하여 가르치기 시작했다.(사진, The Presbyterian College, Halifax 1878)
한편 스코들랜드 자유교회와 연결되어 있던 노바스코시아대회는 원주민 사역자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고 1848년 핼리팩스에 자유교회 대학을 세워 신학생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때 킹(Andrew King)과 맥켄지(McKenzie)는 세 명 학생을 가르쳤다. 맥켄지가 소천하고 그의 후임으로 롤(Lyall)이 교수로 임병되었을 때 신학교는 매우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 1849년부터 1851년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에 캐나다 장로교회에 동반자 관계를 요구해 왔을 때 신학교는 책과 자금 후원을 받았다.
1860년 캐나다 노바 스코시아장로교 연합으로 투르로신학교를 핼리팩스로 이전했다. 1865년 픽토우 아카데미 교수들은 달하우지대학교 스탭으로 합류했다. 이때 픽토우아카데미(Pictou Academy)와 투르로(Truro) 신학교 두 학교가 핼리팩스에서 연합했다. 이 학교가 바로 핼리팩스장로교 대학(Presbyterian College, Halifax) 이다. 이때 스미스와 킹은 은퇴하고 커리가 신학 주임으로 임명되고 맥나이트는 조직신학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875년 폴록(Allan Pollok)이 그 대학에 임명되었고 맥나이트, 커리, 폴록은 1894년 맥나이트가 소천할 때까지 마리타임의 신학생들을 지도하고 영감을 불어 넣어 주었다. 1892년 대회 모임에서 그 대학 교수단의 확충이 필요함을 느꼈다. 초창기 신학적 흐름은 칼빈주의 신학을 고수했음이 틀림없다. 초대교수인 폴록은 클렘파(William Klempa)가 평가한 것처럼 칼빈주의의 열렬한 변호자였으며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서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형성시켰다.(사진, 최초로 캐나다 선교부가 한국 선교사로 파송한 세 가정, 1898)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칼빈주의 신학이 점점 퇴색되어 갔다. 적어도 1890년까지는 성경연구와 해석학에 있어 역사적 비평신학의 거대한 흐름에 침식당할 수밖에 없었다. 핼리팩스장로교대학 역시 이 신학적 변화에 대한 거대한 물줄기를 비켜나갈 수는 없었다. 1900년대 초 이 학교의 교수진은 전체 5명이었다. 교회사와 실천신학 교수이며 교장인 폴록(Allan Pollok), 히브리어와 구약주해를 담당한 고돈(Daniel M. Gordon), 신약 헬라어와 주해를 담당한 팔코너(Robert A.Falconer), 설교학 강사인 카루더(James Carruthers)였다.
폴록은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성경의 권위와 영감도 인정했다. 하지만 고돈은 고등비평을 그대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특별히 이 학교의 일반규정 1항과 3항에 이 학교의 목적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항 : 젊은이들이 주님의 교회 사역에 자신을 드릴 수 있도록 하며, 거룩한 부르심에 자기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유용한 젊은이가 되도록 모든 적합한 방법으로 돕고 격려하는데 당회와 노회는 기꺼이 그리고 주의 깊게 협력해야 한다.
제3항 : 신학에 입문하길 원하는 학생들 또는 사역을 위해 학업을 원하는 학생들은 온전한 친교 속에서 교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며 학업 하는 동안 교회의 모임과 교제에 참여해야 한다.
이는 학교가 좀 더 목회 현장 교회사역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학교의 교과과정은 3년으로 되어 있었다.
캐나다 초기 이민 시절 캐나다 장로교회의 신학은 본국인 스코틀랜드 신학에 종속되어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칼빈주의를 그래도 따라 교리와 정치, 예배를 철저하게 수용했다. 그러나 1880년대에 교단 신학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가설방법론’(hypothesis methodology)이 신학에 도입되어 성경연구와 해석학에 역사비평 방법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고 결국 지금까지 확고하게 고백 되어온 칼빈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890년대에서 1910년까지 수많은 신앙고백 출판물이 출간되었으나 대부분은 신앙고백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 않았다. 이런 신학적 흐름이 적어도 1890년까지는 캐나다에 있는 모든 신학교에서 소개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대에 한국에 입국한 캐나다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은 이미 자유주의화(自由主義化)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정리 및 평가
한국에 입국한 초기 장로교선교사들이 본국에서 신학훈련을 받을 당시 호주나 캐나다는 이미 자유주의적 비평주의 신학이 침투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구(舊) 프린스턴신학 체계의 영향 아래 성경의 권위와 영감을 인정한 보수적 경건주의적 칼빈주의 신학이 우세하였다.
프린스턴신학교는 물론이지만 맥코믹신학교 교수진 역시 성경의 유기적 영감과 칼빈주의 표준 교리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옹호하고 있었다. 이때는 세계적인 선교의 영향을 미쳤던 무디 부흥운동의 말기에 해당했다. 맥코믹신학교 출신의 선교사들은 무디 영향을 많이 받았고 또 그레이그(W.Craig)가 이끄는 ‘도선선교회’ 영향을 통해 선교의 비전(vision)을 세웠다.
그들이 어떤 신학과 사상적 배경 가운데서 신학과 신앙의 훈련을 받았는가는 매우 중요한 주제임이 틀림없다. 왜냐면 선교지에 와서 사역을 펼쳐 나갈 때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본국에서 교육을 통해 영향받은 신학과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사역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역과 신학교에서의 가르침은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라.”는 말처럼 그들은 본국서 배우고 경험한 기초위에 사역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미북장로교를 중심으로 호주장로교 미남장로교 그리고 캐나다장로교 선교사들의 본국 배경을 살펴보았다. 주로 미북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이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교수로 사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타(餘他) 장로교 선교부의 본국 배경을 다룬 것은 미북장로교 출신의 선교사들은 그들과 협력했기 때문이며 이런 사실을 몇 가지로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에 파송된 초기 선교사들이 수학(修學)한 신학교의 학풍은 당시 유럽 비평신학(批評神學)의 도전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건하고 보수적인 신학을 교수한 신학자들이 포진한 신학교 출신이라는 점이다.
당시 자유주의적 비평신학에 대항하여 성경관을 변호하는 구(舊) 프린스턴신학의 체계에서 프린스턴신학교는 학생들에게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전투적으로 변증하는 신학을 전수해 주었다. 맥코믹신학교 역시 프린스턴신학교와 긴밀한 관계 속에 성경을 중심으로 한 보수신학을 학생들에게 전수했다.
하지만 호주 오르몬드대학과 캐나다 핼리텍스장로교대학은 비록 비평신학이 유입되는 과도기였으나 그들이 직접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영향을 줄 만한 기회가 없었다. 이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학풍이 건전한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搖籃)이 될 수 있었던 중요 단서가 된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진에 등용된 선교사들은 대부분 보수주의 신학 배경을 가졌고 동시에 철저한 성경 중심의 신앙으로 무장된 이들이었다.
둘째, 1880년대부터 1890년대는 무디를 중심 한 부흥운동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후보생들에게 전도와 선교의 비전을 통해 자신의 진로를 결정케 하는 중요한 동인(動因)으로 작용했다. 예를 들면 맥코믹신학교의 마포삼열 박사를 위시한 소안론, 곽안련 등은 무디의 영향으로 신학교 내에 조직된 ‘도시선교회’(그레이그 교수 지도)에서 활동하면서 해외 선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뿐만이 아니라 원두우 역시 무디의 영향으로 설립된 ‘전국 신학교연맹대회’를 통해 선교사로 헌신했다. 미남장로교의 존슨, 이눌서, 전위렴 역시 ‘전국 신학교연맹대회’에서 원두우의 영향을 받고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들이었으며 그들도 무디의 영향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이 곧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하는 중요한 동인(動因)이 되었다.
셋째,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은 본국에서 목회와 선교에 철저한 훈련을 받은 경력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선교사역을 시작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모든 교인에게 먼저 전도와 선교 정신(spirit, mind)을 심어 주는 데 최선을 다했다. 당시 부흥의 흐름 속에서 그들은 부흥을 열망한 이들이었고 사회봉사를 통한 교회의 연합사역을 중요시했다. 이것은 그들에게 복음주의 정신이 투철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신학교에서 철저하게 성경 중심의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맥코믹신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사역 중심의 실제적인 사역을 실천할 수 있는 교육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학교 안에서 매일 그리고 매주 진행되는 경건 훈련 및 세미나와 주일에 진행되는 교회 봉사였다. 그리고 그레이그(W. Craig) 교수가 이끈 ‘도시선교회’는 바로 그러한 사실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글쓴 이 / 조정현 박사, 총신대학교 역사교육과(B.A.), 총신대학원 목회학 석사(M. Div.), 총신대학원 신학석사(Th. M.), 철학 박사(Ph. D.), 한국 웨스트민스터 신대원 겸임교수, 총신대 강사, 칼빈대 강사, 논문 – 미국 장로교회사에 있어서 분열 및 재연합에 대한 연구(Th. M.), 미국 붇장로교 선교사들과 평양 장로회신학교(Ph. D.), 저서 – 초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2011) 출처 : 조경현 저, ‘초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 (서울 도서출판 그리심), 2011. pp.4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