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그리스도인과 낙태
낙태 딜레마(abortion dilemma)
현대 그리스도인과 낙태

시작하는 말
낙태(落胎, abortion) 논쟁은 일반적으로 복잡한 문제이다. 그것은 의학적, 법적, 신학적, 윤리적, 사회적, 개인적인 양상(樣相)들을 포함한다. 또 그것은 인간의 성(性)과 재생산(再生産)과 이어지고 종종 무척 고통스러운 딜레마(dilemma)와 연관된 첨예화된 감정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논제에 관련된 개인적인 의사결정이나 공공의 의사토론으로부터 단지 이 문제가 이같이 복잡하다는 이유로 인해 피하거나 벗어날 수는 없다. 낙태문제는 두 가지 요인(要因)이 우리들의 논제의 절정으로 유도한다.
첫째, 낙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 생명의 존엄성’ 문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유지하시며 거두시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는다.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시며 또 우리는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했다.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외 없이 죽을 때는 욥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된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이처럼 생명을 주시고 거두심은 창조주 하나님 주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 없이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 매우 교만한 일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낙태는 저주받을 극악한 죄악이다. 사람들은 단지 생명을 죽일 뿐 아니라 하나님보다 우월하다는 교만을 드러낸다. 왜냐면 이런 자들은 자기들이 마치 인간 생명의 주인이나 되는 것처럼 누가 살 사람이며 누가 죽어야 할 사람인지 결정짓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착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손에도 하나님 같은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고 이렇게 외친다. ‘나는 하나님 없이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 앞에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사악한 죄이다.”
둘째, 낙태는 하나님 법칙일 뿐 아니라 인간의 법칙도 연관되어 있다.
아무리 태아(胎兒)가 미성숙해도 그가 살아 있는 인간(人間)이란 점은 모든 사람이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생아(新生兒)와 태아의 관계를 어떤 방법으로 공식화하든 둘 다 인간이라는 점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무자비(無慈悲)하게 자행되는 낙태는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 존엄성(尊嚴性)에 대한 모독이다.
프랜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의 ‘도대체 인류에게 어떠한 일이 발생했는가?’(Whatever Happened to the Human Race)라는 책과 에버렛 쿠프(Everett Koop)의 영화에서 낙태뿐 아니라 영아(嬰兒) 살해와 안락사(安樂死)와도 관련이 있다고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 침해로부터 가치관과 주장에 있어 일치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까지 더듬어 올라갔다. 그러나 만일 논란의 중심인 낙태문제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挑戰)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이 문제에 초연(超然)할 그리스도인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1. 낙태에 대한 대중 인식의 혁명
우리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중요한 이유는 최근에 일고 있는 낙태에 대한 대중 인식(認識)의 혁명적 급속한 변화 때문이다. 의사들이 고대 헬라의 히포크라테스선서(Hippocratic Oath, B.C. 5세기)에 실제로 선서를 했든지 안 했든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의사들이 다음과 같은 히포크라테스선서 내용을 당연히 받아들였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나는 나의 능력과 판단에 따라 나의 환자에게 이롭다고 여기는 처방을 따르고 심신에 해롭고 유해 한 어떤 것으로부터 멀리할 것이다. 나는 비록 부탁을 받을지라도 그 누구에게도 생명에 치명적(致命的)인 약은 주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조언 역시 하지 않을 것이다. 이같이 나는 또 어떤 여성에게도 낙태를 유발할 피임용 펫세리(pessary to procure)를 주지 않을 것이다!”
히프크라테스 선서의 어떠한 구절들은 아주 고색창연하여 제네바 선언(Declaration of Geneva, 1948)의 “나는 임신(妊娠) 그 시각부터 인간의 생명에 대한 지고(至高)의 존경을 간직할 것이다.”라는 문구와 유사한 문장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1% 미만인 일본 같은 나라에서 인간 생명에 대한 존엄성의 성경적 관점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일본의 1948년 낙태법령(abortion legislation, 낙태 자유화 법령)에 의한 낙태통계에 그리 놀라지 않는다. 그 ‘낙태 자유화 법령’ 이후 8년 동안 5백만 건이나 되는 낙태가 행해졌으며 1972년에는 그 숫자가 연 150만에 이르렀다.(2018년 현재 한국은 이보다 훨씬 더하다. 연 추산 낙태가 100만 내지 최대 200만이다. 편집자) 이에 비해 전통적 기독교 계승자인 서구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일본처럼 급격한 낙태 증가는 없었다.
영국은 어떤가? 1929년 영국 ‘유아 생명 보호법’(Infant Life <preservation> Act)이 산모의 생명을 구하려는 훌륭한 신앙심에서 취해진 행동이었고 여전히 낙태는 영국에서 불법(不法)으로 남아 있었다.
1967년 데이비드 스틸(David Steel)이 제안한 ‘낙태법 개정안’(Abortion Amendment Act)은 사람들에게 대단히 조심스럽게 접근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즉 임산부(姙産婦)가 다음과 같은 상황일 때는 두 명 이상의 신앙심 깊은 의사의 진단을 받아 낙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 임신 중인 여성의 생명이 위험할 때
- 태아가 육체적 정신적인 건강이 손상될 위험이 있을 때
- 태어날 아이가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기형성이 예상될 때
낙태법 개정위원회(Abortion Law Reform Association)는 이 법안 통과를 놓고 무척 걱정했다. 그러나 순조로이 이 법안은 통과되었다.
1966년 이 낙태법 개정이 이루어지기 전 영국과 웨일즈의 국립보건소에서 시술한 합법적인 낙태(legal abortion)는 6,100명이었다. 그러나 법이 개정된 후 1968년에는 24,000명이었고, 1973년에는 167,000에 이르렀다. 1967년 이 낙태법 개정법안이 통과된 이래 1983년까지 모두 2백만 명 이상의 합법적 낙태가 자행되었다.
미국은 낙태에 대해 어떤가? 1970년 텍사스에 사는 한 여성이 집단 강간을 당한 후 임신하게 되자 낙태를 원했으나 ‘주낙태금지법’(State anti-abortion legislation) 때문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주(State)와 맞서 싸우기로 한 후 헨리 웨이드(Henry Wade)라는 변호사에게 의뢰했다.(사건명, Roe Wade Case) 1973년 1월 미연방대법원이 이 사건을 놓고 표결한 결과 7:2로 텍사스 ‘낙태 금지법’이 위헌이라 판결이 나왔다.
이 판결에 따라 임신 3개월(12주) 이내 낙태를 금지한 조항이 삭제되고 임신 후 4개월(16주)에서 9개월(36주)까지는 임신부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과 관련해서만 규제했다. 이것은 결국 암시적(暗示的)으로 임산부가 언제든지 원하기만 하면 낙태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다.
그 결과 1669년 미국의 합법적 낙태 숫자는 2만 이하였으나 1975년에는 백만이 넘었고 1980년에는 150만을 넘어섰다. 태아 1,000명 중 300명이 낙태된 것을 의미한다. 즉 매일 4,250명이 넘는 태아들이 낙태되었고 매시간 당 177명, 매분 당 3명씩 낙태된 것이다. 미국 수도 워싱턴 D.C는 유아 출생보다 태아 낙태가 3배나 더 많아졌다.
전 세계를 통해 합법과 불법 낙태 총수는 1968년 3천만 명∼3천 5백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다. 지금에 이르러는 더욱 증가했음이 틀림없다. 이런 수치들은 너무 엄청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2018년 현재 UN은 5천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편집자)
나는 프랜시스 쉐퍼와 에버렛 쿠프가 책과 영화에 ‘무죄한 자들의 학살자’(The Slaughter of the Innocents), 존 포웰(John Powell S.J)이 그의 감동적인 책 제목을 ‘낙태, 그 소리 없는 대학살’(Abortion, the silent holocaust)이라고 붙였을 때 그들이 절대로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존 포웰은 자신의 논지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전쟁 사상자’(War Casualties) 도표를 함께 제시했는데 대략 미군 전사자(戰死者) 수만을 계산을 해보니 한국전쟁 5만여 명, 월남전쟁 6만여 명, 세계 1차대전 12만 5천여 명, 세게 2차대전 55만여 명이었다.
그러나 놀라지 말라. 1973년부터 1981년 초까지 미국서 행해진 합법적 낙태는 1,200만 건이 넘었다. 이는 1,200만 명의 태아가 소리 없이 살해된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낙태라는 악(惡)의 합법화는 접어두고라도 이런 끔찍한 대학살을 그것도 전혀 저항할 수 없는 자궁 속 태아를 상대로 한 대학살을 묵인하는 사회는 그 어떠한 사회이든 문명화(文明化) 과정에서 자연도태(自然淘汰) 되고 말 것이다.
대로마 제국 몰락(沒落)의 주요한 표징(表徵) 중의 하나는 성인 남녀가 실컷 서로의 육체를 즐기고 그 결과로 원치 않는 아이가 출산(出産) 되면 쓰레기 버리듯이 신생아(新生兒)를 집 밖이나 들판에 내버려 들짐승의 밥이 되게 하거나 죽게 한 것이다. 현대사회가 그 원치 않는 태아를 낙태시켜 사체(死體)를 고대 로마인들처럼 시 외곽 쓰레기 더미에 버리는 대신 병원 소각로(燒却盧)에 던져 태워버린다고 해서 로마 제국보다 더 문명화가 되고 덜 부패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현대인들의 낙태는 상업화(商業化)되고 적어도 어떤 의사나 병원은 태아 시체(屍體) 팔이로 상당히 돈이 잘 버는 것으로 사업화(事業化)되었다는 점에서 고대 로마 제국에서 있었던 아이들을 내다 버린 행위보다 더욱 사악한 것이다. 더욱이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은 인간답고 문명화된 사회의 하나의 필수(必須) 불가결(不可缺)한 특성이라고 한다면 현대사회는 가장 낙후된 미개사회(未開社會)인 것이다.
2. 낙태문제의 주요 쟁점
낙태에 대한 느슨한 정책을 견지(堅持)하는 사람들과 엄격한 정책을 견지하는 사람들은 서로 반대 위치에서 그들의 논쟁을 시작한다.
낙태 찬성론자(pro-abortionist)들은 ‘임신(妊娠) 여성의 권리’를 강조하여 주장하며 특히 ‘여성의 선택 권리’를 강조한다. 그러나 낙태 반대론자(anti-abortionist)들은 ‘태아(胎兒)의 권리’를 강조하고 특히 우리와 꼭 같은 태아의 생존권(生存權) 강조한다. 전자는 낙태를 소급력 있는 피임약보다 약간 더한 것으로 여기고 후자는 낙태를 영아(嬰兒) 살해(pre-natal infanticide)보다 조금 못한 것으로 여긴다.
낙태 찬성론자들의 호소는 대개 사람들의 동정심(同情心)을 유발하는 것인데(또한 여자들의 권리라고 여기는 정의(justice)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임산부(姙産婦) 나 그 외 가족이 원치 않는 임신이 나중까지 방치되었을 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상황을 제시한다. 반면 낙태 반대론자들의 호소는 특히 정의(正義, justice)에 대한 것으로 스스로 방어할 수 없는 미출산 아기(unborn child)의 ‘생존의 권리’를 방어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낙태 반대자들 이들이라고 해서 동정심이 전혀 결여가 된 것은 아니다. 낙태를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아기를 출산함으로 임신한 여성이나 그의 가족이 부담해야 할 다음과 같은 부거운 짐과 부담을 예상하며 충분히 이해한다. 즉 무계획한 출산이 가져올 고통과 심지어 비극까지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임신 중인 여성은 이미 자녀가 많고 궁핍한 가족에 의해 지쳐버린다. 먹여 살려야 할 또 하나의 아이를 갖게 된다는 것은 재정적인 절름발이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가족은 단순히 또 하나의 아이에 대처할 수 없게 된다.
또는 그녀 자신이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이어서(그녀가 과부거나, 이혼녀이거나, 또는 그녀의 남편이 병중이거나 실업자이기 때문에) 또 아이를 갖는 것은 그 가족을 파멸시킬지도 모른다. 또는 그녀의 남편이 폭력적이거나 잔인하고 알코올 중독자 심지어는 정신병자라서 그 아내는 감히 또한 아이를 그의 영향에 들어가도록 허락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또는 그녀는 미혼이기 때문에 한쪽 부모만이 있는 가정에서 그녀와 그녀의 아이가 견디어야 할 치욕 또는 불이익을 감수할 수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혹은 그녀가 학생이라서 계속된 임신이 그녀의 교육과 전공공부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 또는 아마 그녀의 임신은 간통 그리고 강간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비극들은 계획되지 않고 원치 않는 아이의 문제를 첨가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커다란 문제가 된다. 또 그녀가 풍진(rubella, 風疹)에 걸렸거나 태아기를 정밀 검사를 해서 그녀의 아이가 불치병에 걸렸거나 어떠한 다른 결함이 있지 않을까 두려워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왜 이런 난감한 상태의 상당수 여성이 그들에게는 유일한 탈출구로 보이는 낙태를 선택하며 왜 상당수 의사가 낙태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자유롭게 법을 해석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며 그의 진리, 정의, 자비의 권위 아래 살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이같이 단순한 실용주의자(pure pragmatist)들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낙태에 대한 어떤 성경의 원칙들이 관련되어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동정(同情)은 단순히 감정이 아닌 신학적(神學的)이고 도덕적(道德的)인 지침(指針)이 필요하다. 만약 우리의 동정이 진리(眞理)와 정의(正義)를 그 대가로 희생해 가면서까지 행해야 할 동정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동정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낙태의 핵심적인 주요 논쟁점은 신학적이고 도덕적이다. 태아(胎兒, foetus)는 자손(子孫, offspring)에 해당하는 용어로 인간 본성에 관련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머니 자궁 속 태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왜냐면 낙태에 대한 우리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태아에 대한 우리의 평가 결과이기 때문이다. 비록 다른 원칙적인 문제들로 유전공학(genetic engineering), 인공수정(in vitro fertilization), 태아실험(embryo experimentation) 등과 관련이 있기는 하나 이런 문제들을 여기서 다루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영역에서도 역시 그 주요 논점은 동일하다. 즉 자궁 내에서든 시험관에서든 어디서든 인간으로 발전할 수 있는 하나의 수정(受精)된 난자(卵子)가 하나님 앞에서 그 지위(地位)는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임신 3개월(12주) 이내의 태아가 단지 하나의 조직 덩어리, 물 한 방울, 자궁 내 종양이기 때문에 치아나 종기나 편도선처럼 뽑히거나 제거될 수 있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되고 지독히 혐오(嫌惡)스런 것이라고 반발한다. 그러나 어떠한 이들은 우리의 이런 반발을 무시해 버린다. 예로서 힌델(K. Hindell)과 마델린 심즈(Madelaine Simms)는 의학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초기 태아’(胎兒, embryo)와 ‘전기 태아’(foetus)는 단지 산모(産母) 신체의 일부이지 아직 인간은 아니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태아는 단지 산모에게 속한 것일 뿐이고 어떠한 의미로도 태아가 자신의 권리를 지닌 인간으로서 간주 될 수 없으며, 산모로부터 독립되어 있다고도 간주 될 수 없고, 태아를 제거하는 것은 어떠한 다른 불필요한 조직을 외과적으로 제거하는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의미는 없으므로 낙태 여부(與否) 결정이 전적으로 여성에게 달렸다고 주장한다. 태아는 산모 신체의 일부분이므로 그녀의 선택에 달린 것이라는 말이다. 또 그 밖의 어떤 사람도 이 일에 대해 발언권은 없다. 자유롭게 된 여성은 아이 낳도록 강요할 수 없고 그녀 자신의 재생산력과 그 과정에 대해 절대적인 자율권이 있다는 것이다.
1983년 6월 ‘미출산 영아 보호협회’가 주관한 히드공원(Hyde Park, 영국) 대중집회 후 우리는 수상에게 탄원하기 위해 다우닝가 10번지에 있는 수상관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런던 중앙관청 꼭대기에서 젊은 여성들이 갑자기 이렇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교회도 아니라네, 국가도 아니라네, 여인의 운명은 그녀의 결정에 달린 것이라네” 분명 낙태 반대자인 우리를 조롱하는 노래였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우리의 집회와 행진은 여인의 운명을 위한것이 아니라 미출산 유아의 운명(낙태)을 위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욕설을 하며 남자는 백만 년이 지나도 아이를 낳을 수 없다며 내게 야유(揶揄)를 퍼부었다. 나는 이런 그들을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면 낙태는 어디까지나 남자보다는 여자들의 문제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임신(妊娠)과 함께 출산할 아이를 보살피는 짐을 진 건 여성이다. 남성들은 이런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그렇다 할지라도 유아(乳兒)에게는 출산 전후로 독립적인 권리가 있는데 런던시 중앙관청에서 날 조롱하던 그 젊은 여성들이 인정하지 않는 건 바로 태아의 이런 권리다. 비록 태아가 산모의 신체 내에서 자라고 있다 할지라도 태아가 산모의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신학적이며 생리학적 사실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그 태아가 산모와 구별된 태아만의 유전자형(genotype)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또 수정에서 출산까지 임신의 전 과정이 의식을 가진 영아를 독립체로 키워 몸 밖으로 배출(排出)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수정(受精)과 출산(出産) 사이 어떤 지점에서 태아가 인간으로 변한다고 가정하고 그 순간을 찾아내려고 한다. 여성의 난자는 수정 후 4-5일 지나면 난세포로 자라고 이 난세포는 수란관(受卵管)을 통해 모체(母體) 자궁벽에 착상(着床)하기 위해 이동(移動)한다. 이것은 태아 발달에 필수적 중요한 단계이다. 또 자연적인 낙태 즉 자연유산(自然流産)이 난세포의 자궁벽 착상 이전에 가장 많이 발생한다. 이처럼 난세포가 자궁벽 착상(着床)을 위한 이동은 단지 태아의 환경 변화일뿐 체질(體質)까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이전 세대는 이 같은 태동(胎動, 태아의 움직임)이 태아의 영혼이 들어서는 순간이거나 적어도 그 증거로 여겨왔으나 확증이 된 것은 아니다.
또 태아도 한 인간이라는 사실은 간혹 태아가 미성숙(未成熟) 상태로 태어날지라도 충분히 모체의 도움 없이 생존할 수 있는 생존능력이 태아에게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의학의 발달은 미숙아로 태어나는 태아의 생존율(生存律)을 점점 높이고 있다.
또 태아가 인간이라는 증거로 출산 자체를 결정적인 순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렉스 가드너(Rex Gardner)가 ‘낙태, 그 개인적인 딜레마’(1972)라는 그의 저서에서 주장한 것이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태아가 발달하면서 점점 더 소중히 여겨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태아가 출생할 때 하나님이 태아의 첫 호흡에 삶을 주실뿐 아니라 사명까지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서 사람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셨다.”는 창세기 2:7을 성경의 증거로 인용했다.
성경은 출생을 ‘새 생명’이 시작된다고 말씀한다. 그런데 성경은 또 여성의 수태(受胎)를 ‘새 생명’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출산 직전 초음파(超音波) 태아 사진을 보면 새로 태어난 유아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이것은 한 인간 존재의 시작이 출생 순간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정자와 난자의 수정(受精)까지 소급해서 생각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대 로마 가톨릭교회 공식적 입장이었다. 예를 들면 교황 피우스 12세(Pope Pius XII, 1876-1958)는 1951년 이탈리아 로마가톨릭 산파협회(Catholic Society of Midwives)에서 한 연설에서 “태아는 비록 태어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어머니와 똑같은 정도로 또 똑같은 이유로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비록 명확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임신한 어머니 배 속의 태아가 어느 시점에서는 사람이고 어느 시점에서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태아는 최초부터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분명히 어머니 배 속의 그 수정체(受精體)는 살아 있으며 분명히 그 수정체의 삶은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많은 의사도 이 사실을 인정한다. 그래서 1967년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낙태에 대한 제1차 세계대회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정자(精子)와 난자(卵子)의 수정(受精)에서부터 유아(乳兒) 출생(出生)까지의 시간에 태아가 인간이 아니었던 시점을 발견할 수 없다.” 즉 태아(胎兒)는 수정되는 그 순간부터 모체(母體)와 완전하게 구별되며 독립된 인격의 한 인간이라는 말인 것이다.
3. 태아가 인간이라는 성경적 근거
나에게 있어 성경의 가장 확고한 바탕은 시편 139편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무엇이나 알고 계시며 어디나 존재하심에 감탄하며 명상 도중 태아(胎兒) 존재에 대해 중요한 진술을 한다. 시편 139편이 발생학(發生學) 교과서가 된다는 말은 분명히 아니다. 시적 심성과 고도의 수사적(修辭的) 언어를 구사한다.(예 15절, 내가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시편 기자는 적어도 태아에 대한 세 가지 중대한 진리를 확신하고 있다.
(1) 하나님이 정교하게 창조하신 태아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13절) 두 개의 평범한 은유는 하나님의 창조 기술 즉 도공(陶工)과 직공(織工)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은 도공이 진흙을 다루듯 인간을 창조하시는 노련한 기술자와 같다.
이와 똑같은 사상이 욥기 10:8에도 나타나는데 욥은 “주의 손으로 그를 만드사 백체(百體)를 이루셨거늘”(RSV), “지으시고 형성하시거늘”(JB)이라고 표현했다. 또 다른 묘사는 그를 조직(組織)한 조직자에 대한 묘사인데(13절) “주께서 나를 조직하셨으니”(NASB)라고 했다. 이와 유사하게 욥은 “주께서 (중략) 가죽과 살로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뭉치셨나이까?”라고 묻는다.(욥 10:10,11) 그 때문에 시편 기자는 계속해서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神妙莫測)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奇異)함을 내 영혼이 잘 아니이다.”(14절)라고 한다.
본문이 비록 태아 발달의 과학적 해석은 아니나 성경 저자들은 태아의 성장이 우연도 아니며 자동적인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창조적 기술(技術)의 신성한 작업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2) 태아의 출생 전과 출생 후 연속성
시편 기자의 두 번째 강조는 태아 존재의 연속성(連屬性)이다. 성인(成人)이 된 저자는 자신이 태어난 후 이제까지의 삶을 회고해 본다. 그는 그 자신의 출생 이전과 이후의 삶에서 그는 자신이 똑같은 사람임을 알기 때문에 태어나기 이전 이후의 그 자신에게 동일한 인칭 대명사 ‘나’와 ‘나를’을 사용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4단계로써 관찰한다.
-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과거, 1절)
-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중략)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현재, 2,3절)
-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미래, 10절)
- 주께서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組織)하셨나이다.(태아기, 13절)
그러나 이 모두에서(출생 이전, 출생에서 현재까지, 현재의 순간에, 그리고 미래에) 그는 그 자신을 ‘나’라고 언급한다. 현재 성인(成人)으로서 자신과 과거 모태 속의 태아였던 자신을 동일한 인격과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그에게는 출생 이전과 이후 자신의 존재 사이에 불연속(不連續)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모태(母胎) 안이든 밖이든 출생 후 태아, 유아, 소년, 성인으로서의 자신이 동일한 사람임을 지각(知覺)하고 있다.
(3)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
내가 말하려는 시편 기자가 자신을 표현한 세 번째 진리는 영적 교제이다. 이는 하나님과 그가 인격적이고 영적 교제가 있음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를 창조하셨고, 지금도 그를 유지하시고, 알고 계시며, 사랑하시며, 영원히 그를 붙드실 분은 바로 주님이라는 고백이다.
시편 139편은 아마도 개인적인 신앙인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서는 가장 세밀하며 개인적인 진술일 것이다. ‘너(하나님)와 나’의 관계가 거의 매 행에 걸쳐 나타나며 1인칭 대명사의 소유격(나, 나를, 나의)이 46회, 2인칭(주님, 주님의)이 32회 나타난다. ‘나-주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나를’의 관계임을 그는 자각했으며, 그를 알고 그를 둘러싸고 그를 붙들고(1-6절), 언약의 신실함으로써 그와 함께하시며 그를 떠나거나 떠나도록 하지 않으시는(7-12절) 하나님에 대한 지각(知覺)인 것이다.
‘교제’란 말은 그 단어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말이기에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유지하시는 관계에 대한 산 증인으로서의 시편 기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교제’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언약’이라는 단어가 좀 더 적절할 것이다. 그것은 진정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유지하시는 ‘단독적 언약’ 또는 ‘은혜의 언약’이 될 것이다. 왜냐면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가 의식적인 관계로써 대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우리를 아시며 사랑하시고 자신을 우리와 관련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격적 존재로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아신 것이며,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사랑을 베푸신 것이다. 그래서 이미 하나님께서 모태(母胎)부터 우리를 아셨고 사랑하셨으므로 태아(胎兒) 때부터 우리 각각은 이미 완전한 인격체(人格體)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생각해야 할 성경의 근본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게 바로 이 세 단어 즉 창조, 연속성, 영적 교제(언약)이다. 태아는 모태에서의 성장도 아니요, 잠재적 인간도 아니며, 비록 성숙하지 않더라도 그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개인적인 인간성으로 충분히 성장할 잠재력을 지닌 이미 독립된 인간의 생명인 것이다.
또 다른 성경 구절들도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하는 인격적 연속성에 대해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나를 모태에서 지으시고’(욥 13:15, 시 119:173), 비록 어떻게 하셨는지 알 수는 없으나(전 11:5), 모태로부터 우리를 인도하시고 따라서 모태부터 나의 주인이셨던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표현되어 있다.(시 22:9,10, 71:6)
선지자 예레미야가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렘1:5) 또 이사야가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사 49:1,5)라고 한 말처럼 개인적이든 이스라엘 백성의 유추이든지 간에(사 46:3,4)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태아(胎兒) 때부터 자신을 아셨다는 즉 태아가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라는 동일한 신념을 공유(共有)하고 있었다.
태아의 출산 전과 출산 후의 연속성에 대한 구약성경의 이런 본문들의 암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셨다고 하는 신약성경의 주장들을 우리로 부인할 수 없게 만든다.(엡 1:4, 딤후 1:9 참조)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된 구절들의 강조는 은혜(恩惠)에 의한 구원이지 행위(行爲)에 의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존재하거나 선행(善行)을 할 수 있기 전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예레미야 같은 선지자의 소명이든 바울 같은 사도들의 소명이든, 갈 1:16 참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련된 구절들의 강조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택뿐 아니라 그들 각자의 사명을 위해 ‘지으시고’, ‘조성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 이전이나 임신 전도 아니고 태어나기 이전 그들이 아직 완전히 형성되기 전 즉 모태에서 조성 중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태아의 출생 전후의 인격적인 연속성은 이러한 가르침에서 조화된다.
또 구약 출애굽기 21:22-25에 두 남자가 싸우다가 임산부를 때려 태아가 조산(早産) 되거나 사산(死産)하게 되면 각각 그 대가를 치르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만약 태아가 조산(早産)하게 되면 벌금(罰金)으로 끝나지만 사산(死産)하게 될 경우는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아야 한다.(이것을 Lax Talionis, 즉 탈리오의 법칙이라고 하는 데 고대 근동의 전형적인 법 형태였다.-역자주)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이렇게 해석한다. 첫 번째 범주의 심각한 상태가 아닌 경우는 태아가 죽은 것을 말하며, 두 번째 범주는 임산부에게 심각한 해를 끼친 경우라는 것이다. 그래서 태아가 죽었으면 단지 벌금으로 끝나게 되는데 이는 태아가 임산부(姙産婦)보다 별 가치가 없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당하지 않은 해석이다. 그 형벌의 규모는 어머니에게든지 아이에게든지 간에 어머니와 아이가 동일하게 평가되는 경우의 그 상해 정도에 대응(correspond)하는 듯이 보인다.
누가는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와 세례 요한 어머니 엘리사벳이 임신하여 서로 만났을 때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눅 1:41)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아이’는 아직 엘리사벳의 복중에 있는 태아(세례 요한)를 가리킨다. 그런데 누가는 갓 태어나 말구유에 누인 예수를 가리켜 역시 ‘아이’라고 했다.(눅 2:12,16)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직 어머니 배속의 ‘태아’(세례 요한)와 갓 태어나 말구유에 뉘이신 ‘아기’ 예수에 대한 지칭이 같은 단어라는 것이다.
사도신경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 즉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葬事) 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라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인데,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예수’가 바로 그의 어머니 동정녀(童貞女) 마리아가 임신했던 태아(胎兒)였다. 태아는 몸 안의 장기(臟器) 같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며 생명체이다. 현대의 의학은 이러한 성경 내용을 확실하게 보증하고 있다.
유전자(遺傳子) 코드(genetic code)가 해석(解釋)된 것은 1960년대다. 이제 우리는 남성 정자(精子)의 침투(浸透)로 여성 난자(卵子)가 수정(受精)되는 순간 23쌍의 염색체(染色體, chromosome)가 형성되며 수정란(受精卵)은 부모와는 다른 독특한 유전자형을 소유하고 그 아이의 성(sex), 크기와 형태, 피부색, 모발과 눈, 기질과 지능이 이미 결정된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한 인간은 수정된 하나의 세포로부터 성인이 되면 37.2조 개의 세포가 된다. 이런 핵결합과 성장 두 시점의 사이에는 45회의 세포분열이 필요하며 그중 41회는 출생 전 태아 때 모태 안에서 발생한다.
태아기(胎兒期)의 사진은 태아 발달의 경이로움을 보여준다. 나는 스웨덴 사진작가 닐슨(Lennart Nilsson 1922-2017, Swedish photographer and scientist)의 ‘한 아기의 출생’(A Child Is Born)이라는 책에서 본 놀랄 만큼 아름다운 사진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다.
- 3주, 3주 반 : 작은 심장은 박동을 시작한다.
- 4주 : 비록 그 태아가 1/4 인치 정도의 크기지만 머리와 몸체의 구별이 가능해지고, 초보적인 눈과 귀와 입도 식별이 가능해진다.
- 6주, 7주 : 뇌의 기능이 감지될 수 있다.
- 8주 : (낙태가 자행되는 시기) 아이의 손가락, 지문, 발가락을 포함한 모든 수족인 분명해진다.
- 9주, 10주 : 아이가 쥐기 위해 손을 사용할 수 있으며, 삼키기 위해 입을 사용할 수 있고, 엄지손가락을 빨 수도 있다.
- 13주 – 첫 번째 3개월이 다 된 13주까지 태아는 완전히 모습을 갖 추게 되고 작은 축소판 아이가 모태에 들어 있게 되는데, 그 아이는 위치를 바꿀 수도 있고 고통, 소음, 그리고 빛에 반응할 수도 있으 며 딸꾹질을 할 수도 있다. 그때부터 아이는 계속 크기와 함에 있어서만 발달한다.
- 5개월 후 6개월째 : (두 번째 3개월이 완결되기 전에 그리고 임신이 아직 2/3가 완성되기 전에) 아이는 모발과 눈썹과 손톱 그리고 젖꼭지 등을 가지며 울 수도, 손을 움켜쥘 수도, 때리거나 발로 찰 수도 있다.(이런 현상은 때때로 낙태가 자궁절개에 의해 수행된 후에도 발생해 의료팀을 곤궁에 처하게 한다.)
아이를 낳을 임산부는 그들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살아 있는 아이를 가진 기분을 느낀다. 사실 부모들은 때때로 그들의 작은 태아에게 특히 어떤 성(sex)이 될지 알 수 없을 때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붙여준다. 그러나 앞으로 엄마가 될 여인은 자랑스럽게 이렇게 말한다. “저 임신 중이에요.” 임신 기간에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 여인은 어머니로서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새 생명을 귀중히 여기며 감사하는 아름다운 모습인가!
4. 현대 그리스도인의 낙태 논쟁
모든 그리스도인 심지어 성경의 권위에 성실히 복종하는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낙태문제에 대한 의견이 다 같다고 하면 그것은 정직한 대답이 아니다. 낙태문제 상호 협력을 위한 신학자들과 의사들 세미나가 1938년 현대 기독교 정신과 기독교 의료단체를 위한 ‘런던연구소’ 후원으로 열렸었는데 이 세미나를 통해 낙태에 대한 분명하고 예리한 의견의 차이가 표면화되었다.
기조연설은 ‘그러면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옥스퍼드 대학의 ‘도덕과 목회신학’ 교수인 올리버 오도노반(Oliver Michael Timothy O’Donovan) 교수가 했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너의 이웃이 누구냐?’라는 예수님 질문에 사람들이 대답을 회피했듯이 ‘사람이 누구인가’를 결정하는 가치 기준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을 강도 만난 사람과 동일시하여 그 사람을 보살핌으로 이 질문에 답을 했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 역시 사색(思索)만으로는 대답할 수 없다. 먼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 누군가를 인간으로 인정하게 된다. 인간으로 인정 후 인격적(人格的) 관계로 접촉할 때 또한 그를 인간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인격(人格)은 누군가를 인간으로 대해야겠다는 마음을 갖는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격이 무엇인가는 인격적인 관계에서만 분명해진다.
태아 인격의 경우는 태아 그만의 고유한 유전자형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지식에 의해서 적절하다는 증거를 찾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 태아를 인격으로 대해야 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며,
둘째, 태아를 인간으로 보살피는 행동이 뒤따라야 하며,
셋째, 아직 태어나기 전부터 이같이 인격적으로 대한 태아가 출산 과정을 거쳐 아이가 되었을 때 서로 인격적 만남이 오게 된다.
이 세 단계는 임신(妊娠) 순간부터 태아 인격성의 실재를 확신하면서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때까지의 점진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킬리대학(Keele University)의 ‘커뮤니케이션과 신경과학 연구소’ 소장인 도날드 멕케이(Donald Mackay) 박사는 ‘시작의 논리’(The Logic of beginings)라는 그의 미간행 수필에서 이 문제에 대해 오도노반 교수의 주장과 같은 입장이었다. 그는 “사물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생존하게 된다. 자동차와 같은 것은 많은 부품이 조립된 것이고, 비구름은 많은 물방울의 응축(凝縮)으로 형성되며, 대기(大氣) 중 가스와 공기의 혼합은 서서히 진행되어 식물과 동물들을 성장시킨다.”라고 말했다.
사물(事物)의 이런 각각의 과정들은 그 과정이 끝나게 될 때 목적이 되는 최종 생산물(자동차, 비구름, 성장한 동물과 식물 등)을 갖게 되지만 그것들이 나타나게 되는 정확한 순간과 그것들이 나타나는 순간에 발생하는 변화의 정확한 본질을 감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바로 이것이 도날드 멕케이로 하여금 태아를 ‘잠재성’(潛在性, potential)이라는 용어로 정의하도록 한 것이다. 확실히 가능하게 하는 조건만 주어지면 모든 과정의 시작은 최종적인 생산물에 도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초기의 단계들에 대한 존재론적인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여러 가지 부품이 적절히 조립되면 그 부품들은 자동차가 되겠지만 적절한 조립이 없다면 그 부품들은 쓰레기 더미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립과정이 없는 부품들을 잠재적인 자동차로 여기지 않는다.
같은 논리로 그러면 과연 수정(受精)된 난자(卵子)를 ‘잠재적 인간’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만약 임신(妊娠)이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그것이 성장 과정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태아가 성장하여 아이가 되는 것이 단지 난자에 속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틀린 말이다. 잠재성은 ‘시작’과 ‘예상 결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인데 그 위험은 목적하는 생산물의 모든 속성과 권리를 벌써 시작에 속한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생산물의 속성과 권리 이 둘의 관계가 직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시작이 아니다.
울리버 오도노반 박사는 난자(亂刺)가 수정(受精)되는 순간부터 태아는 인격을 지니고 있으며 단지 인격적인 관계 속에 그 인격이 성장 과정을 거쳐 점진적으로 발현(發顯)되기는 하나 그럴지라도 태아를 전력을 다해 보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도날드 멕케이 박사는 난자가 수정(受精) 순간부터 생물학적 생명과 놀랄 만한 잠재적 기능(技能)을 가졌으나 두뇌(頭腦)가 자신을 스스로 조절(調節)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했을 때 비로써 인간의 권리를 갖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고명(高名)한 교수 사이의 갈등은 언뜻 보면 화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다른 편의 주장을 완전히 부정(否定)하지는 않는다. 도날드 멕케이 박사는 이미 수정된 난자(태아)의 놀랄만한 잠재적 기능을 부정하지는 않는 한편 태아의 발달을 강조한다. 반면 올리버 오도노반 박사는 태아의 인간 됨에 있어 성장 과정을 부정하지 않는 한편 바로 처음부터 수정체(태아)는 자기만의 고유하고 완전한 유전자형 즉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은 이미 2세기 말에 두 학자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태아는 바야흐로 한 인간이 되려는 존재이며, 너(태아)는 이미 씨앗 안에 열매를 가지고 있다.” 우리 시대에는 폴 람제이(Paul Ramsey)가 또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 그 개인은 미세(微細)한 정보 입자로 존재하게 된다. (중략) 그의 차후 태아기(胎兒期)와 출생 후의 성장은 그가 임신 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존재한 것들이 성취되는 과정으로 묘사될 수 있다.” 즉 태아는 임신하는 그 순간부터 완전한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루이스 스메데스(Lewis Smedes)는 태아의 신분(身分)을 “심원(深原)한 존재론적 모호성(模糊性), 아직 무엇인가 되지 않은 상태와 동시에 그것이 앞으로 될 것에 대해 소질이 있는 모호성”이라고 했다. 이런 말이 나를 다시 시편 139편 기자가 태아 존재의 계속성 즉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사랑을 지각했던 이유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 말씀은 참으로 도날드 멕케이 박사의 태아에 대한 비인격적(물질적인 가공품들, 구름, 가스, 식물과 동물들)인 유추(類推)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 이유는 시편의 미출산 태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찬 인격적 대우 때문이다. 이같이 하나님의 창조와 사랑에 있어 태아에 대한 능동적인 주권적 은총은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이다.
도날드 멕케이 박사는 태아(胎兒)가 아직 스스로 자신을 조절(調節)할 능력과 의식적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발달 된 뇌가 없다는 이유로 임신 된 태아에게 인격(人格) 부여(附與)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태아에게 인격을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나님께 대한 태아의 어떤 기능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태아에 대한 사랑에 가득 찬 의식적인 대우이다. 다시 말해 태아라는 존재의 인격성은 그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그 존재를 인정하시고 사랑하신다는 데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방적 인격 관계를 부모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어린 자녀들이 아직 어리고 알지 못해 부모의 사랑에 적절한 반응을 할 수 없는 그런 때라도 부모는 어린 자녀들을 사랑하고 보살핌과 보호에 혼신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의 자녀에 대한 이 같은 능동적이며 일방적인 인격적인 태도가 은혜를 은혜가 되도록 만든다.
이처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태아)에게 수정(임신)의 순간부터 이미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이라는 독자적인 지위와 장차 물려받게 될 독특한 운명을 하나님이 태아에게 부여하신 것이 은총인 것이다. 다시 말해 태아에게 인간의 모든 실제적이고 잠재적인 이미와 아직의 이중성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더할 수 없는 크나큰 은총인 것이다.
5. 낙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태아도 우리와 꼭 같은 인간(人間)이라는 우리의 결론이 우리의 사고(思考)와 행동(行動)에 어떤 영향을 얼마만큼 미칠 것인가?
우선 태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 놓을 것이다. 존재에 있어 이미 인간으로 시작된 태아의 생명은 성장하여 기능에 완전한 인간이 될 장래성을 지닌 인간 생명이므로 우리는 임신한 어머니와 태아를 하나가 아닌 독립된 두 인격의 인간 존재로서 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의사와 간호사 역시 하나가 아닌 두 사람을 보살피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두 인간 존재의 건강을 잘 돌볼 수 있을 것이다.
변호사와 정치인 역시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미국 ‘아동권리선언’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the Child, 1959)에 명시했듯이 아동은 출산 전에도 출산 후와 마찬가지로 적절한 법적 보호를 포함하여 특별한 보호와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출산 전 태아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적절한 보호를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성경 여러 곳에 스스로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가장 연약한 존재인 태아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태아는 자신의 불편함이나 필요를 호소할 수조차 없으면 무엇보다도 누군가 자신의 생명을 해치려 해도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능력이 전혀 없다. 그래서 태아 스스로 할 수 없는 이런 일들을 그를 대신에 해주는 것이 우리의 책임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 책임을 태아의 부모 된 자들에게 뿐만이 아니라 가족과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과 나아가 사회와 국가에까지 물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태아는 본래적(本來的)으로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인격체이기에 그 누구도 그 인격을 침해하거나 하나님께 속한 그의 생명을 임으로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캔터베리 대주교 미카엘 램세이(Baron Micheal Ramsey)는 1967년 교회 총회에 보내는 서한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태아에 대한 고유한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을 규범적으로 강조해야 한다. (중략) 우리는 인간 태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反影)할 능력의 생명을 지닌 존재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믿음을 세상에 주는 기독교 정신의 커다란 선물 중 하나라고 보며 이것이 태아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태도이다.”
이제 실제로 살인처럼 잔혹(殘酷)한 낙태 시술 중 일반적인 몇 가지 방법을 간단히 설명하겠다.
▸ 가장 오랜 전통적 방법은 ‘D & C Surgery’(Dilation & Curettage Surgery)라는 방법으로 태아를 모태 배 속에서 산산이 부수어 긁어내는 것이다. 먼저 태아가 조각조각 잘릴 때까지 자궁벽을 긁어낼 큐렛과 산산이 조각 난 태아를 빨아낼 낙태 흡입기(Abortion Suction) 등의 낙태 기구들을 자궁 안으로 쉽게 밀어 넣기 위해 기구를 사용하여 자궁 입구를 강압적으로 확장한다. 그리고 시술이 끝나면 산산 조각난 상태로 긁어낸 태아로 인해 수술대는 유혈(流血)이 낭자(狼藉)하게 된다.
▸ 두 번째 방법은 낙태 임신 12-16주 때 태아를 감싸고 있는 양수막 안 모체와 태아를 연결하는 탯줄에다 유독성(有毒性) 용액(대개 함염하제)을 주사하는 방법인데 그렇게 되면 태아는 해독물질로 인해 타 죽게 되고 자연적으로 산모 몸 밖으로 배출된다.
▸ 태아가 너무 커서 앞서 방법이 어려울 때는 제왕절개수술(帝王切開手術)과 유사한 자궁절개수술(태아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이기 위해)을 하여 살아 있는 태아를 모체 밖으로 꺼내 처리하는 방법이다.
▸ 또 다른 낙태 방법은 자궁절개수술 대신 태아의 조기 해산(解産)을 유도하는 프로스태글랜딘(Prostaglandin) 호르몬 사용 밥법이다. 이때도 대부분 살아 있는 아이의 분만인 경우가 많다. 68
어머니의 자궁 속의 태아는 수정의 산물(産物) 또는 배우자의 이물질(異物質)이 아니다. 미출생(未出生) 어린 아기이다. 우리는 비록 여성이 임신했다고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한 여성과 한 아이가 함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유도된 인공적인 낙태는 분명한 영아 살해요, 미출산 아이의 교묘한 파괴이며, 순결한 피를 흘리는 것이다.
이런 낙태가 아무리 미사여구(美辭麗句)로 포장되고 그럴듯한 이유를 댄다고 해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신학자들과 의사들의 실제적이고 정직한 대화가 필요하다. 의사들은 신학자들이 낙태의 고통스러운 임상적 딜레마(dilemma, 진퇴양난)와 무관한 상아탑 주장만 내세우는 비실제적인 경향이 있으므로 당연히 이해하지 못하며, 신학자들은 의사들이 신학적인 원칙들을 무시하고 의료의 임상적인 결정과 상용주의 경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당연히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원칙은 ‘미출생 유아보호협회’의 첫 번째 목적인 인간의 생명은 긴급상황 외에는 절대 포기하거나 제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던스탠(G.R. Dunstan) 교수는 ‘정당화될 수 있는 살인’과 비교 유추하여 ‘정당화될 수 있는 유아살해의 윤리’가 있을 수 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인간 태아의 고유한 신성불가침을 인정한다면 이런 주장은 신중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유아생명보호법’(1929년)이 공포된 후에도 낙태 반대자들은 여전히 이를 수용하지 않았으나 영국은 산모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으로 낙태를 합법적으로 인정해 왔다. 그러나 비록 원치 않은 임신의 심한 부담과 심각하다고 느낄 정도로 위험한 산모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상태는 발달 된 현대의학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는 일이다. 성경은 무고한 생명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한 불가피한 경우만 살인을 허용한다. 예를 들면 불의한 자로부터의 자기방어나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위한 전쟁 같은 경우다. 그런데 낙태와 같이 존재하지도 않고 위협받지도 않는 상황에 살인을 허용할 자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또 심각한 불구(不具) 상태로 태어날 태아의 낙태를 허용한 1967년 ‘낙태법’(Abortion Act)의 네 번째 조항은 정당한가? 오늘날 출생 전 촬영과 양수검사로 약 4개월 된 태아의 비정상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 그때의 낙태는 도덕적으로 정당한가?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
글랜빌 윌리암스(Glanville Williams) 박사는 “불구 자녀의 양육을 허용하는 건 낙태로 인해 겪게 될지 모르는 불행보다 훨씬 더 무서운 죄악이다.”라고 했다. 또 그는 생존할 수 있는 괴물 또는 백치아(白癡兒))를 낳게 될 어머니의 비극적 곤경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기형의 새끼를 죽이는 짐승의 어미처럼 산모의 요청에 따른 태아의 우생학적 낙태를 누구도 자신 있게 부도덕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경우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확실히 그 같은 상황은 전율이다. 그래도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이를 허용할 수 없다. 인간 생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유일한 예외를 생각할 수 있다면 태아의 뇌가 없거나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기형(奇形)인 경우 생물학적 비인간(Non-human)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죽도록 방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 예외를 빌미 삼아 낙태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적어도 세 가지이다.
첫째, 인간의 삶의 존엄(尊嚴)이 아니라 삶의 질(質)문제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심각한 장애인 태아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러나 과연 누가 이 문제의 옳고 그름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앞서 말한 1983년 6월 ‘히드파크집회’(Hyde Park Rally)에서 내게 가장 감명 깊었던 연설은 앨리슨 데이비스(Alison Davis)의 연설이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앉아서 나는 척추가 두 갈래인(태어날 때부터 척추 불구) ‘행복한 성인(成人)’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낫고 따라서 내가 죽임당해도 좋다고 말하는데 나는 이 말보다 더 끔찍스러운 말은 생각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녀는 또 “나는 지금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기쁘다!”라고 했다. 결국에 신체적 장애를 타고날지라도 그녀처럼 삶에 대한 의미와 질을 부여하고 살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것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것이다.(송명희 씨가 좋은 예일 것이다. 편집자) 그러므로 정상인이라고 하여 장애인의 삶의 질을 속단하는 것은 교만이다. 우리는 그들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 의무만 있다.
둘째, 선천적 불구라고 출생 전 태아가 죽임당하면 안 되는 것처럼 출생 후 불구 된 아이들도 죽임당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간혹 의사들 가운데는 선천적 불구로 출산한 신생아를 물도 우유도 주지 않고 방치(放置)해 결국은 죽게 하고는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자신을 설득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심각한 것은 만일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가 선천적 불구라는 이유만으로 어른들이 그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출산 후 불구가 된 아이, 자동차 사고로 혼수상태인 어른, 타고난 저능아, 노쇠하여 신체 기능이 다한 사람도 죽여서는 안 될 논리적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런 논리라면 그들은 다 삶이 무가치하고 비생산적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와 국가는 비생산적이라고 판단된 인간은 다 폐기처분 했던 히틀러의 잔인한 제3제국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프랑스의 생물학자 쨩 로스땡(Jean Rostan)와 견해를 같이해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지위가 낮아지거나 삶의 질이 나빠지거나 허약하게 되었기 때문에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없고 보호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생명이란 있을 수 없다. (중략) 나는 우리 사회가 쓸모없고 무능하고 치유 불가능한 병약자들의 생명 유지를 위한 값비싼 대가 지불(支拂)을 명예스럽게 여긴다. 나는 사회의 문명화된 정도를 생명에 대한 순수한 노력과 봉사로 측정하고 싶다.”
셋째, 선천적 불구의 태아를 낙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낙태가 ‘인간 생명권’을 놓고 하나님과 경쟁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태아를 죽이고 살린 그런 권리가 없다. 그런데도 인간이 태아의 생사(生死)를 결정하는 것은 신적(神的) 권위를 억지로 자신에게 돌리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모리스 바링(Maurice Baring)은 다른 의사와 나눴던 자신의 대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태아의 임신중절에 대한 문제인데 난 당신의 의견이 필요하오. 아버지는 매독에 걸렸고 그 어머니는 결핵에 걸렸소. 태어난 4명의 아이 중 첫째는 눈이 멀었고 둘째는 죽었고 셋째는 귀먹어리 벙어리였고 넷째는 결핵에 걸렸소. 당신이 이러한 사실을 미리 다 알았더라면 의사로서 어떻게 했겠소?” “난 다 임신중절 수술을 했을 겁니다.” “그래요? 그러면 당신은 베토벤을 죽인 겁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자기 합리화를 경계해야 한다. 사람들은 심각한 장애 아이가 태어나도록 허락하면 참을 수 없는 짐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낙태를 결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불구가 되고 병약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보호와 관심을 보이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우리 모두 낙태 방조죄를 깊이 회개해야 한다.
나는 미국 ‘구호물자원조협회’ 고문단(CARE Trust) 단장인 레이몬드 죤스톤(Raymond Johnston) 박사가 신문 인터뷰 기사에서 한 그의 말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계획적인 대규모로 자행되고 있는 미출산 아이의 파괴(낙태)는 오늘날 영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가장 심각한 큰 범죄라고 본다. 만일 구약의 선지자들이 우리를 비난한다면 이 같은 태아 대학살이 그 첫 번째 비난거리가 될 것이다.”
프랜시스 쉐퍼 박사와 에버렛 쿠프 박사는 ‘도대체 인류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Whatever happened to the human race?)라는 책과 영화를 “20세기의 지난 10년이 기억될 만한 광란, 이기, 욕망, 탐욕의 암흑시대 동안에 생명을 빼앗긴 미출산 태아들, 약한 자들, 병든 자들 그리고 노인들에게 헌정하는 바이다.”라고 했다. 이렇게 우리가 ‘계몽된 서양문명’을 ‘암흑시대’라고 비난하는 게 옳은가? 나는 적어도 낙태문제에 대한 비난만큼은 옳다고 생각하며 예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명하신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한 것이 크게 부끄러울 뿐이다.
둘째, 만약 더 철저한 낙태 반대 정책이 확보될 수 있다면 동시에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의식 또한 철저해야 할 것이다.
희생을 치를 준비 없이 낙태를 반대만 하면 위선이 될 수도 있다. 대책 없는 우리의 반대로 불법적 뒷골목 낙태를 유발(誘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낙태 반대와 함께 임신한 여인이 아이를 갖는 데 대한 거부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개인적, 의학적, 사회적, 재정적인 후원을 약속하고 자진해서 도와야 한다. 왜냐면 주님이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라.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실천하라.”(갈 6;2)고 우리에게 명하셨기 때문이다. 비록 어떤 아기들은 그들 부모의 버림을 받고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지라도 교회가 사랑하며 환영하지 않는 아기는 없으며, 그러기에 우리는 그 어떤 태아의 낙태도 반대하고 그 어떤 아기의 출산도 환영한다는 것을 선포해야 한다.
임신 기간은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여서 엄마가 될 여성의 마음과 감정이 때때로 변화하게 마련이다. 렉스 가드너(Rex Gardner)는 낙태를 거부했던 엄마들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조사자료를 소개했다. 하나는 아기 엄마들의 73% 다른 하나는 84%가 처음에는 낙태하려다 하지 않고 아기를 낳은 게 천만다행이었고 너무나 기쁘다고 했다. 또 아기 때문에 가장 행복한 엄마 중 몇은 이렇게 말했다. “의사 선생님! 선생님은 기억을 못 하실지 모르나 처음에는 낙태를 원했어요. 선생님이 그때 동의해 주시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 녀석이 여태까지 우리 부부가 맛본 기쁨 중에서 가장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거든요.”
많은 가정이 입양을 고대하고 있으며 결혼했으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수많은 부부도 입양을 바라고 있다. 우리는 이 같은 가정에 아기를 입양하는 일로도 낙태와 싸우고 있다.
나는 또 임신 여성들 안전 출산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세계 여러 단체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계획 없이 임신한 여성 상담, 절망하고 있는 임산부 긴급 구제, 태아에 대한 실제적 조언, 출산 전후의 산모들에게 시설 제공과 알선, 고용 알선, 재정후원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오직 태아를 살리려는 일념으로 이들은 임산부들을 돕고 있다.
‘생득권’이라는 조직의 창설자 루이스 썸머힐(Louise Summerhill) 박사는“태아를 낙태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살리기 위해 우리는 임산부를 돕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그들에 의해 태아를 죽이기보다는 태아들을 위한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가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셋째, 더 적극적인 교육과 낙태 반대 운동을 지지해야 한다.
모든 교회는 교인들에게 인간의 자격과 인간 생명의 가치와 그 고귀함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철저하게 지속적(持續的)으로 가르쳐야 한다. 모든 낙태는 원치 않거나 무책임한 성행위로 인한 임신에서 기인 된 것이다. 그러므로 원치 않는 임신을 사전 예방하기 위한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렉스 가드너는 이렇게 조언한다.
“계획에 없는 임신은 종종 사회적인 실패에 기인하기도 하고 빈곤, 실업, 인구과잉과 같은 문제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노력하고 협력해야 한다. 사회악 때문에 일어나는 원치 않는 임신문제가 더 많은 낙태로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마땅히 싸워 대처해야 한다. 사회교육이나 사회적 조치가 비록 실제적이긴 하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복음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며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를 알게 한다.
나는 낙태를 호소하는 여성이나 성적 방종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초래한 남성에게 개인적인 판단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대신 그들에게 ‘사하심이 주께 있으니’(시 130:4)라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생과 산 소망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는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며 그의 성령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내적인 자제력을 주실 수 있다. 그는 또한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자유와 정의로 명명되는 새로운 공동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계신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소망, 새로운 공동체 이것이 바로 낙태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모든 이들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이다.(*) 글쓴 이 / John Robert Walmsley Stott CBE(1921–2011), ㈜ 이 글은 한글 번역본, ‘현대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Issues Facing Christians Today)’,(기독교문서선교회) ‘제15장 낙태 딜레마(’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요약 / 정은표 목사(개혁신앙 편집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