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 교회를 위한 성경적 예배 회복 방안 

   16세기 종교개혁 때 취리히에서 개신교도들에 의해 진행된 성상 파괴(1524년), 이는 개혁자들의 예배 개혁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시작하는 말  

오늘 한국 교회에는 그 어떤 시대 그 어떤 곳 보다 이런저런 온갖 형태의 예배 풍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많은 예배에 대해 오히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우려한다. 이대로는 안 되고 속히 예배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전적인 동의를 한다. ‘목회와 신학’(374호, 2012년 4월호) 특집 논문과 컨퍼런스 보도가 이를 증거 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 모두가 예배가 개혁돼야 한다는 데 모두 동의한다.

그러함에도 한편으로는 ‘이머징 예배’(emerging worship, 열린 예배 대안으로 뜨고 있는 예배)를 비롯한 여러 대안에 대해 개방적이고 또 한편 루터파 모델의 ‘성찬 예배’ 등을 따라갈 때 한국 교회의 예배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심각한 상황이다. 이처럼 여러 필자 또 여러 독자와 함께 한국 교회 예배 개혁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예배 개혁에 대한 우려되는 제안을 피하면서 과연 어떻게 한국 교회 예배가 바람

직한 방향으로 나아 갈 수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예배 개혁의 기본 원칙

– ‘진리와 영 안에서의 예배’를 위하여 –

예배 개혁은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였다. 종교개혁이 이루어졌을 때 첫째로 느낄 수 있었던 건 예배가 개혁되었고 개혁된 새로운 예배 방식을 따라 예배하게 된 것이었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가장 큰 결과 중 하나가 예배 개혁이었다. 그리고 예배 개혁과 함께 교회 전체의 개혁이 일어났고 그에 따라 삶의 개혁과 문화의 개혁이 나타났다.

개혁자들은 무엇보다도 ‘성경에 따른 성경대로 예배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예배 개혁의 기본적 원칙은 성경에 따라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정신에서는 전통을 따라 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물론 개혁자들이 전통적인 것 가운데 성경적인 것은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중요시하고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통이 그랬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성경의 원칙을 따른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도 예배를 개혁한다고 할 때 이 원칙이 천명되어야 할 것이다. 개혁자들과 그 후예들은 이를 ‘진리 안에서의 예배’(worship in the truth)라고 했다. 그들은 또 이렇게 ‘진리 안에서’, ‘진리를 따라’하는 예배는 반드시 ‘성령님 안에서’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 예배가 ‘성령 안에서의 예배’(worship in the Spirit)가 되도록 해야 한다. 개혁자들과 그 후예들은 또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과 진리 가운데서 예배하는’(요 4:24)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예배에 대해 특히 예배 개혁에 대해 우리도 참으로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도록 집중을 해야 할 것이다.

2. 개혁자들의 모범적 예배 개혁

우리가 이 원칙에 따른 예배 개혁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일단 개혁자들의 예배 개혁 모범을 깊이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개혁자들의 개혁이 다 완전한 건 아니었다. 개혁자들 간에도 서로 달랐고 역사의 과정을 걸치면서 성경에 덜 충실한 예를 제시한 이들도 있었고 좀 더 성경에 충실한 예배 방식을 제시한 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후대라는 유리한 역사적 고지에 서 있는 사람으로 여러 개혁자 중 가장 성경에 충실한 예를 제시한 이들이 어떤 이들인지 생각할 수 있고 이에 근거해서 우리도 나름대로 성경에 충실한 예배의 방식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도 앞서 말한 것이 큰 원리로 작용해야 한다. 즉 여러 개혁자의 예배 개혁 제시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성경에 충실한 것인지를 찾아야만 한다.  

일단 이 모든 일이 진공 상태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신약교회의 예배가 유대교 회당 예배를 기초로 신약적 변화를 의식하면서 회당 예배를 변용하여 초대교회의 예배 방식을 찾아 예배해 갔던 것과 비슷하다. 이것은 주어진 신약 계시에 따라서 예배 방식이 변화해 나간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이 주신 계시는 우리의 예배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다. 구약의 제사로부터 감사의 예배에로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중세 천주교회의 방식대로 예배하던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에 따른 예배로 개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도 성경 계시를 따른 예배 변혁의 하나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현대 천주교의 예배도 어느 정도는 그와 연관될 수 있는데) 중세 천주교의 예배는 예배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점에서는 개신교의 예배와 같으나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예배에 유용할 것 같은 요소들은 다 넣어 사용하는 형태의 예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때 특히 구약의 성전 예배의 요소를 가져온 것이 많다. 빛을 비추는 성소의 ‘등대’처럼 예배 때 빛을 비추는 ‘촛대’를 동원했고, 성소에 특별한 향을 피웠던 것처럼 예배 때 향을 피우기도 하고, 시편에 나오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을 따라서 ‘층계 송’(올라가는 노래) 등을 부르기도 했는데 이 모든 것의 가장 핵심 요소로 인도자를 사제(司祭, priest) 즉 제사장(祭司長)으로 하여 그가 하는 행위가 ‘미사’(피 없는 제사)가 되도록 한 것이다.

개혁자들은 본래 천주교도들이었으므로 그 같은 방식으로 오랫동안 예배하던 사람들이었다. 루터는 그런 방식으로 제사를 집례하던 사제였다. 그러다가 자신들의 오랜 예배를 신약 성경의 빛에서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모든 걸 검토하고 바로 잡는 이 같은 모범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과 그 일을 시작한 개혁자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당시 대부분 사람은 오랫동안 해 오던 것이므로 또는 그냥 은혜가 되니까 또는 아무 생각 없이 이전의 예배 방식에 따라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계속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루터는 신약의 예배가 구약의 제사(祭祀, sacrifice)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의 저서 ‘교회의 바빌론 포수’(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에서부터 루터는 성찬이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단번에 자신을 드려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히 10:12)을 생각하면 더구나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고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제사의 영원한 효과를 생각하면 그 결과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8)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에 동의하면서 루터는 기쁨으로 우리를 위해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그리스도께 그리고 함께 이 일을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해야지 결코 제사 드릴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개혁자들의 예배 개혁은 이같이 ‘예배’가 ‘제사’(sacrifice)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임을 강조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사는 것이 거룩한 산 제사 드리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근거해서 주께 드릴 진정한 제사 행위라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라고 한 것이다.

또 루터는 예배당 안에 수많은 성상(聖像)은 “상(像)을 만들어 그 앞에 경배하지 말라.”는(출 20:4,5, 신 5:8,9)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 반(反)하는 것임을 천명하고 예배당 안에 상(像)들을 제거하도록 했다. 이를 가장 급진적으로 실행한 시민들은 쯔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에게서 비슷한 설교를 들은 스위스 츄리히(Zurich) 시의 성도들이었다. 이전까지 수많은 상(像)이 있던 그 예배당에서 계속 예배하면서 예배당 안에 있던 십자가상을 비롯해 여러 상(像)을 다 제거해 버린 것이 예배 개혁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그 나머지는 이전에 해 오던 대로 예배하도록 했다.

그래서 예배 때 촛불도 켜고 향도 피우고 천주교에서 하던 걸 그대로 유지하게 했다. 제사(sacrifice)와 상(像) 문제를 제외한 예배와 관련된 나머지 문제들은 성경이 명확히 규정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는 아디아포라(adiaphora) 문제라고 루터는 생각한 것이다. 오늘날까지 루터파 교회는 이 같은 입장에서 예배하고 있다.  

또 성공회 가운데 특히 예전을 중요시하는 소위 ‘고교회’(高敎會, high church)에서 루터교회처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개신교 예배이기는 하나 개신교 예배 같지 않은 모습으로 예배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무릎을 꿇고 받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찬의 두 요소인 떡과 포도주 모두를 주는 점에서 또 화체설(化體說)을 주장하지 않는 점에서 개신교 예배이다. 그러나 그것을 집례하는 방식과 태도는 마치 종교개혁을 하다가 중단된 듯한 인상을 준다.

개혁파는 루터파 교회 예배도 좀 더 성경적으로 개혁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예배 때 향과 촛불 켜는 것, 예배 중 무릎 꿇는 것, 성찬을 받을 때 무릎 꿇는 것, 예배당 안의 십자가상, 사순절 등은 신약 성경에 예배 지침으로 주시지 않았다고 여겨 예배에서 모두 제거했다. 그들은 신약 성경에 제시된 요소들만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했으니 예배와 같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지침을 내려주지 않았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예배에 대한 명확한 가르침을 주셨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성경 가운데서 주신 예배에 대한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에 따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했다.

칼빈은 “성경에 명령하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우리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넘어 교회가 어떤 새로운 규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개인이나 교회나 자의적인 주권 주장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침해이다.”라고 했다. 그는 예배에 대해 “나는 성경에서 도출된 것 즉 전적으로 신적인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한 제도들만을 시인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칼빈의 후예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에 명령 되지 않은 것은 금해진 것이다.”라는 원칙이 준수되었다.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서 정하지 아니한 어떤 다른 방법으로 예배하는 것도 금해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러므로 개혁파 교회들은 성경에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하는 열심에서 천주교 예배 중에서 성경적 근거 특히 신약 성경적 근거를 가지지 않은 것들은 다 제거했다. 이것은 중세 개혁자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오직 성경대로 참으로 예배하기를 원했는가를 잘 보여 주는 것이다.    

3. 현실과 예배와 관련 해 우리가 할 일들

오늘 우리의 예배는 과연 어떤 정황 가운데 있는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피조물로서 마땅히 하나님께 예배해야 함에도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또 소위 교회 공동체의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상당수 사람은 우리가 예배하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다. 또 많은 사람이 그냥 하나님만 예배하면 되지 삼위일체니 뭐니 신경 쓸 것 있느냐고 하면서 그저 예배에 참여한다. 이처럼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사람이 드문 상황에 있는 것이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이다.

종교 개혁자들도 자신들이 바로 그런 상황 속에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과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에 근거해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했다. 그 결과로 예배의 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도 같은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 예배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는 사람들로 만드는 게 우리의 과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일의 하나는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도록 만들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1) 먼저 복음을 순수하고 바르게 선포해야 한다.

개혁자들이 바로 그렇게 했다. 개혁자들은 구원이 (천주교회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공로에 더해 인간 선행의 공로를 근거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성경에서 발견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오직 그리스도 구속의 공로’(solus Christus)를 믿음으로만(sola fide), ‘은혜 + 인간의 행위’가 아닌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성경에서 발견한 개혁자들은 예배도 삶에 관한 모든 것도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최종적 판단 기준으로 삼아 개혁하기를 원했다. 그 결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soli deo gloria) 위해 예배하고 살기 원했다.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방도라는 것이 온 세상에 널리 울려 퍼지고 그 구원의 감격 때문에 이 일을 이루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경배하는 일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의 다른 동기가 일소(一掃)되고 오직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사람들로 세우신 것에 대한 감사 때문에 예배할 때에 바른 예배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 복음에 근거한 구원의 감격에 찬 예배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먼저 개혁자들이 성경에서 발견한 순수한 복음이 다시 이 땅에 강하게 선포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복음에 대한 왜곡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바른 예배를 방해하는 일이라는 각성이 크게 일어나야 한다.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복음이 우리 가운데서 바르게 이해되고 선포되고 믿어질 때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 대한 바른 예배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 다원주의자(多元主義者)들과 함께 하는 예배가 과연 하나님께 제대로 된 예배가 될 수 있는지? 구원이 오직 하나님 홀로 이루시는 것임을 제대로 믿지 않는 예배가 과연 바른 예배가 될 수 있는지? 우리는 심사숙고해야 할 때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엇보다도 바른 복음을 순수하게 선포하는 것을 교회의 근원적 표징으로 말한 이전 교회의 강조점을 따르는 교회가 되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한다.

즉 우리가 먼저 참 교회이어야만 참된 예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참된 교회가 아니라면 아무리 장중한 예전이 집례 되어도 그것은 바른 예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순수한 복음을 제대로 선포하는 바른 교회 되는 일은 참된 예배의 선결 조건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성경적 바른 예배를 위해 먼저 우리 교회가 과연 바른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바른 교회인지를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2) 오직 성령님 안에서의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복음에 근거한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는 성령님 안에서 예배하는 일이 또한 회복되어야 한다. 십자가 공로에 의해 예배하기 위해서는 시공(時空)을 넘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는 성령님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성령님에 의해 십자가 공로에 의지하여 창조와 구원의 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경배는 영적인 경배요 바르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은 신령한 일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성령님께 의존하며 성령님께 순종할 때에만 우리 예배가 바른 예배가 되는 것이다.

(3)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만 예배해야 한다.

그 결과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대로 성경이 가르치는 방식을 따라서 예배해야 하겠다는 의식이 계발되도록 해야 한다. 진리의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요 16:13)이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예배해야 할 바른 방법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가실 것임을 믿고 성경 진리에 따라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해야 한다.

4. 예배 개혁을 위한 구체적 제안들

이 모든 논의에 비추어서 오늘 우리 상황에서 우리가 특별히 유념해야 할 점들 특히 예배 갱신이나 예배 개혁과 관련하여 새롭게 제시되는 것들과 관련 조심해야 할 것들을 간단히 나열해도 다음 같은 점들을 말해야 할 것이다.

(1) 예배가 의식화(儀式化)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예전(禮典)이 복잡해지고 예전화(禮典化)할수록 타락한 예배라고 했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조언을 잘 들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신약 성경에 있는 요소들만 가지고 예배하려고 힘써야 한다.

(2) 말씀과 성례 중심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

개혁교회 예배는 말씀과 성례 중심의 예배라는 것은 개혁자들이 항상 강조해 온 것이다. 종교개혁파 교회는 항상 말씀과 성례 중심의 예배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성례는 항상 말씀과 함께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례는 복음을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내고 인(印)을 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씀과 성례를 다 중요시하나 더 근원적인 것은 항상 말씀인 것이다. 복음이 가려지면 아무리 성례를 열심히 해도 그 공동체는 교회가 아니다.  

(3) 성찬은 성경의 가르침대로만 시행해야 한다.

‣ 성찬 행할 때 무릎을 꿇는 것 같은 건 정말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믿음의 선조들이 성경과 성령에 의존 피 흘려가며 폐지한 것을 되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어떻게 가능한가?

‣ 마찬가지로 성찬의 떡과 잔을 높이 치켜드는 것도 금해야 한다. 중세 때 이런 상징적 행위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성찬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할 수 있으나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성찬의 요소를 ‘높이 드는 것(lifting them up)도 성례의 성질에 반(反)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제정에도 반(反)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으므로(웨신 29:4) 이점은 매우 주의해야 한다.

‣ 또 성찬상이 마치 제단과 같은 의미를 전달하는 형식으로 강대 앞 중앙에 있는 것과 성찬상의 촛불은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 우리 선배들이 피 흘려 폐지한 이런 것들이 아무런 역사의식도 없이 도입되는 건 무시무시 한 일이다. 예배당 강대를 제단이라고 하는 것도 안 된다.

(4) 예배당 십자가 부착도 심각한 문제로 여겨야 한다.

지난날 신앙의 선조들이 회개하면서 말씀을 따라 폐지한 것들이 다시 교회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 또 예배 인도자들이 독특한 복장을 하거나 가운(Gown)을 입는 것도 심각하게 재고(再考)되어야 한다. 예배 인도자는 할 수 있는 대로 평범한 옷을 입는 것이 좋고 일상생활 때도 이상하고 독특한 성직자 복장을 하는 것도 애써 이를 폐지한 개혁자들의 노력을 무위화(無爲化)하는 것이 된다.

(5) 찬송은 예배에 적합한 찬송을 다 같이 불러야 한다.

예배 찬송은 먼저 잘 연습해서 온 회중아 다 함께 찬송하도록 해야 한다. 예배 중 대표기도에 모두가 속으로 같이 기도할 것이며, 특송도 대표로 주께 드리는 것이기에 마음으로 함께 찬송해야 한다. 특송 후 박수치는 건 함께 찬송한다는 의식이 결여 된 것이다. 예배 중 사람에게 박수치는 등 사람을 높이는 것은 엄금해야 한다.  

(6) 예배 시 연속 성경봉독 순서 부활이 필요하다.  

성경을 연속해서 읽는(lectio continua) 예배 순서의 부활이 필요하다. 개혁자들은 중세 때 천주교 교회력에 따라 선택된 성경 본문을 읽기(lectio selecta)를 따르지 않고 성경을 차례로 읽어 가며 공부하고 생각하는 ‘성경 계속 읽기’(lectio continua)와 강해를 강조해 왔다. 오늘 우리 상황에서 교회력을 강조하는 것은 의식이 없는 것으로 지적될 수 있다.

(7) 공(公) 예배는 전 교우가 출석하도록 힘써야 한다.

주일 아침 예배, 주일 저녁 예배, 수요 기도회 등에 교인 모두 출석하도록 하고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같이 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구실로 예배가 이상한 것으로 변질이 돼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는 문화적 요소를 너무 생각한 나머지 참된 예배가 사라지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마치는 말 ‘참된 예배’(경배)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근거로 성령님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다. 지난날 진정한 참 그리스도인들은 마음과 뜻과 정성과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힘썼고, 예배를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고, 그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매일 예배하는 성도로 살았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성령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 회복이다. 우리도 반드시 그렇게 하나님 경배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고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를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요 4:23) (*) 글쓴 이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출처, 2014.6.19. ‘개혁파신학연구소 정기신학강좌’  (편집자 주) 본 기사는 본지 편집에 맞도록 본문을 발췌 요약한 글입니다.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