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30) 인간의 타락, 범죄, 형벌(2)

제6장 3,4항
3항 그들은 온 인류의 시조였으므로 그들로부터 보통 생식법으로 출생하는 모든 후손들에게 이 죄의 죄책이 전가(轉嫁)되었고 또 동일한 죄에서의 죽음과 부패한 성질이 유전되었다.
4항 이 근본적인 부패 때문에 우리는 모든 선에 대해서 싫증이 나며, 무능해지고, 반발하고, 전적으로 모든 악에 기울어지게 되었다. 이 근원적 부패로부터 모든 실제 범죄가 생긴다.
웨스트민스터 제6장 3항과 4항은 최초로 죄를 지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어떤 결과가 미쳤는가를 가르친다. 이 고백이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들이다.
- 우리가 전적으로 부패해 있는 원인은 인류 시조로 말미암았다.
- 그 부패 상태의 결과로 모든 실제적인 범죄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우리가 버림받은 상태에 관한 사실들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몇 마디로 진술될 수가 있다.
- 아담이 죄를 범하여 타락함으로 전적 부패하게 되었다.
- 아담 안에서 또 우리들도 죄를 범하여 타락함으로 전적 부패하게 되었다.
- 그래서 우리는 죄악 중에 출생하고(시 51:5) 어려서부터 악하다.(창8:21)
- 그러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왕 노릇한다.(롬 5:12)
달리 말하면 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왕 노릇하느냐고 묻고 싶다면 “모든 사람들 심지어 태어나자마자 죽는 영아들이라도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했느냐고 묻는다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라고 대답되어야 할 것이다. 인류의 대표였던 아담의 죄는 바로 우리의 죄가 되었다. 그가 우리의 대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와 함께 형벌을 받는 것이다. 물론 아담이 상을 받게 됐었더라면 우리도 함께 받게 됐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버림받은 상태에 관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사실들이다.
이것은 아주 간단하게 진술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설명하거나 이해하기란 결코 간단하지는 않다. 이에 대해서 이런 질문이 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 행한 것을 인하여 어떻게 나를 정죄하실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달리 말하면 “내가 아직 존재하지도 않은 때에 내가 아담 안에서 죄를 범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우선 비록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옳은 것만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죄의 전가(轉嫁)에 대한 이 문제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 존재의 집합적인 면을 인식하지 못한 까닭인 듯하다. 성경은 인류를 천사들처럼 각각의 개체로 창조된 존재들이 아니고 한 사람 안에서 창조된 유기적 집단(organic unit)으로 말씀한다. 그래서 인간은 그 자신의 모양과 형상으로 자녀들을 낳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담과 하와는 온 인류의 근원이었으며 대표였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서로의 지체들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행 17:26)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인류의 이 같은 유기적 연합을 육체에만 제한시킨다. 우리는 그들을 영혼 창조론자들(creationists)이라고 한다. 그들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과정에 의해서 부모들은 그들 자신들에게서 새로운 신체를 생산해 낼 수가 있다는 것과 그 다음에 하나님이 새로운 영혼을 창조하여 그 영혼을 신체 안에 넣어 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다.
인간의 영혼 주입이 어떤 사람들은 잉태 순간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잉태된 후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도 원죄의 흔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의해 우리 영혼이 어떻게 죄 있는 것으로 창조되었겠는가? 자녀들이 신체적인 면에서 부모를 닮은 것처럼 영혼이나 정신적으로도 그들의 부모를 닮았다는 많은 증거가 있다. 또한 만일 아담이 그의 자녀들의 영혼을 제외하고 신체만을 낳았다면 그가 그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낳았다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는가?
한편 영혼 유전론자들(Traducianists)은 비록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과정에 의해서 부모는 자녀의 신체와 영혼 둘 모두를 낳는다고 믿었다. 그들은 신체의 본체를 나눌 필요가 생기지 않는 것처럼 이로 말미암아 영혼의 본체를 나눌 필요가 없다고 믿고 있다. 성경에서도 이 같은 견해가 온당하다고 말하고 있다.(히 7:10, 창 47:26)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 것이 있다. 아담의 후손들이 그들의 본성을 아담에게서 물려받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작정 때까지는 실제 존재인물들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범죄를 했을 때 내가 직접 참여했다거나 또는 직접 행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담의 범죄가 내가 한 것이 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대표의 원리에 따르도록 명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제 삶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A의 소행이 B의 소행으로 간주되는 그러한 방법으로 A가 B를 대신하여 행동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아버지는 하나님이 세워 주심을 따라 그 가정의 가장이다. 만일 그가 다른 나라로 이사 가서 거기서 법적 시민권을 얻게 되면 그가 거기서 낳은 그의 자녀들 또한 그 나라의 시민권을 얻게 된다.
또한 통치자가 왕이건 대통령이건 그들은 그들이 통치하는 국가 전체를 대표한다. 만일 이 통치자가 다른 나라와 전쟁을 시작하면 그 국가와 그리고 그 국가의 모든 국민도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상대방 국가는 그 국가의 통치자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국가 전체와 교전 중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아담을 전(全) 인류의 대표로 세우셨기 때문에 아담의 소행은 또한 아담의 후손 그들 모두의 소행이 된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책(罪責)이 그들에게 전달되었던 것처럼 또한 전가(轉據)되었다.(그들의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담이 범한 최초의 죄만이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행하여진 행위였다는 것이다. 즉 이는 아담의 이 최초의 시험 외에 다른 것들에 대해서 아담은 더 이상 인류의 대표 노릇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시험기간 범한 최초의 죄 이외 다른 죄들은 그의 후손들 책임으로 돌려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그의 임기를 마치면 더 이상 그 나라의 국민들을 대신하여 대표직을 행하지 않는 것처럼 아담도 한 번의 죄로 그의 대표 행위는 끝났다. 그러나 하나님과 아담과의 행위언약과 대표의 원리에 의해 아담의 최초의 그 행위 한 번으로 아담 자신은 물론 그의 후손인 우리 모두가 부패하였고 유죄(有罪)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우리 자신의 모든 행위를 우리 자신이 책임지는 것처럼 아담의 모든 행위들도 아담 자신이 책임을 졌다.
이처럼 아담의 최초의 죄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인 전 인류가 손상을 입고 말았다. 즉 우리의 조상 아담과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영과 육의 모든 기능과 기관이 전적으로 더럽혀진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계속적인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신앙고백서가 말하는 ‘실제적인 범죄들’이란 아담의 원죄의 뒤를 이은 모든 죄를 의미한다. 그리고 신앙고백서는 모든 다른 죄들이 그 최후의 죄의 당연한 결과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 15:19)
제6장 5,6항
5항 이런 본성의 부패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중생한 사람들 안에도 남아있다. 그리고 그 부패함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받고 억제되고 있다 할지라도 본성 자체와 본성에서 비롯되는 모든 행동들은 참으로 완전히 죄이다.
6항 원죄와 자범(自範) 죄 등 모든 죄는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에 대한 위반이요 율법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그것 자체의 성질 때문에 죄인에게 죄책을 가져다 준다. 죄책으로 말미암아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를 받게 되며 그리하여 사망을 당하되 동시에 영적, 육체적 그리고 영원한 모든 불행들을 아울러 당하게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제6장 5항과 6항의 고백이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들이다.
- 부패가 금생애서 신자들 안에 남아 있다.
-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것이 용서된다.
- 신자들 안에서 그것이 점진적으로 제거된다.
- 그 부패와 그것의 산물들은 신자의 경우일지라도 참으로 죄이다.
- 이 부패로 말미암아 산출되어진 것뿐만 아니라 이 부패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우리가 해방을 확실하게 받게 되지 않는 한 그리고 받게 될 때까지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 마땅할만큼 참으로 죄이다.
제5장 2항-6항에 있는 도표를 통해 신자 안에 있는 옛 본성과 새 본성간의 상관성을 이미 진술했다. 우리는 신자들을 옛 사람과 새 사람의 두 개의 인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이 같은 생각은 성경에 명백하게 선언되어 있는 가르침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별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3,4,6)
바울 또한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골 3:9) 이 같은 이유로 바울은 주저함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도다.”(롬 7:22) 또 시편 기자도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 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라고 말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영광스런 진리를 오해함으로써 극단적으로 그릇된 두 견해가 생겨났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1) 완전주의
완전주의에 의하면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일 뿐만 아니라 모든 죄가 없는 새로 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견해는 성경의 한결같고 계속적인 경고의 말씀들과 상반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요일 1:10)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약 3:2)라고 말하고 있다.
또 하나님은 인간의 부패성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고 죄를 짓지 않는 자도 없다.”고 하셨다.(참고, 롬 3:10-18) 하나님의 교훈의 말씀들에 대한 증거는 자기 백성의 고백에 의하여 확증되어 있다. 성경의 가장 뛰어난 자들까지도 자기들의 죄가 항상 자기들과 함께 있음을 시인하였다.(롬 7:14-25, 시 51: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6장 5항에 보면 ‘이러한 본성의 부패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받고 억제되고 있다 할지라도’,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중생한 사람들 안에도 남아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 진술이 옳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떤 사람이 중생한 사람인가를 알려면 모든 부패와 죄가 자기에게는 전혀 없다고 믿는 헛된 망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도리어 그리스도의 용서와 성령의 역사하심을 온전하게 깨달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고자 진지하게 노력하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살펴보면 된다. 성경에 나오는 신실한 신자들은 금생에서 자신들이 완전하리라는 것을 주장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그들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죄에 대하여 끊임없이 싸우는 싸움이 자기들에게 있음을 분형하게 말했다.
(2) 무율법주의(無律法主義)
무율법주의 또는 율법폐기론 이라고 하는 우리 신앙의 이 치명적인 견해의 요지는 “나의 옛 본성으로 말미암아 내가 아무리 많은 죄를 짓게 된다고 할지라도 죄를 짓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옛 사람 즉 옛 본성이기 때문에 내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무율법주의는 완전주의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가장 추악한 죄악상을 인정한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은 부인한다. 모든 범죄 행위를 옛 본성 탓으로 돌리고 새 본성의 행위들에 대해서만 자기는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문제이다. 사도 바울의 어떤 말씀들은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7)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롬 723)
그러나 이런 말씀들을 무율법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바울이 자신의 죄악 된 상태에 대해 책임을 지는 방법을 완전히 간과하지 않고 있는 까닭에 틀렸다는 것이다. 바울이 “나는 육신에 속하여 있노라.”(롬 7:14)고 말했다. 이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롬 7:18) 알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의 죄악들이 마치 자기가 지은 것이 아닌 것처럼 그것들을 ‘옛 사람’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는 그의 옛 본성의 찌꺼기들이 자기 안에 살아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들에서 자기의 죄악들이 생겨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 찌꺼기들에 대하여 싸우되 그것들이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계속 싸워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무을법주의 자들은 “나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무을법주의 자는 자신을 속이고 있으며 진리가 그 속에 없다.(요일 2:4) 왜냐하면 남아 있는 부패나 그것의 모든 찌꺼기들이 모두 참으로 그리고 정확히 말해서 죄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진상은 이렇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부패가 지배하나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법이 다스린다.(롬 8:7-14)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죄가 왕 노릇 하나 거듭난 사람은 죄가 비록 그 속에 살아남아 있기지만 그 죄가 그를 전적으로 지배하는 왕 노릇 하지는 못한다.
이에 대해 제2차 세계대전을 비유로 수 있다. 연합군이 노르만디에 상륙하기 전까지는 점령군들이 유럽을 완전 장악하고 있었다. 치고 달아나는 연합군 특공대들이 이러한 점령군 세력에 다소간의 피해를 주기는 했으나 그들의 왕 같은 지배력에 도전하지는 못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경우도 양심이 하는 일은 특공대들의 그 번거로움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양심은 죄가 왕 노릇 하는 것에 저항하기는 하지만 도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연합군이 대거 상륙하자 연합군이 통치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점령군들은 도망쳤다. 점령군의 잔재 세력이 여전히 상당한 피해를 줄 수는 있지만 전처럼 지배할 수는 없다.
신자의 경우도 이와 같다. 신자가 거듭나는 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거하게 되며 그는 그 순간부터 왕 되신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 아래 있게 되고 죄 아래 있지 않게 된다. 바울은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한다.”고 말했다.(롬 6:14) 그러나 혼비백산한 적의 무리들이 완전히 진멸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단지 패주했을 뿐이다. 그 패잔병들은 끈질긴 공격을 계속하여 가능한 한 많은 피해를 입히려고 한다. 신자 안에 살아남아 있는 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 슬프게도 그 저항의 세력이 자신의 육적인 한 부분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설령 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또한 비참하게도 자주 죄의 법을 섬기는 이 같은 모순된 사실 때문에 곤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롬 7:24,25)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악한 사상은 죄가 신자에 의해서 범해지는 경우 그 죄가 덜 흉악하다는 주장이다. 실은 신자에 의해서 죄가 범해지는 경우에 그것은 훨씬 더 흉악한 구속의 은혜를 망각한 배신의 행위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이 함께 하시며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독생 하신 성자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시기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의 치렀는지 잘 알고 그와 연합 된 자들이다. 즉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섭고 인간에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 있으리라.”(히 10:26,2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나 불신자나 그 누구에게든지 모든 죄는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에 대한 위반이요 죄인에게 죄책을 가져다준다. 율법폐기론 자들처럼 비록 죄를 짓고도 죄책을 받지 않는다고 아무리 자기는 말할 할지라도 그 죄의 결과들은 결코 피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피로 대속의 은혜를 입기 전에는 없어지는 게 아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그렇다! 완전한 성화에 들어갈 때가지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육체 가운데 거하고 있는 한 그리스도인 안에 아직도 죄의 잔재들이 여전히 살아남아 공격하며 할 수만 있으면 넘어뜨리려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말하거나 반대로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와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둘 다 성경의 진리를 크게 왜곡하는 것이다.(*) 글쓴 이 / G.I. 윌리암슨 나용화 옮김 개혁주의신행협회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