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어떻게 다른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b) 

시작하는 말  

일부 성도들 가운데 흔히 오해하는 교리가 성령에 관한 교리이다. 어떤 분은 성령을 하나의 힘(power)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성령은 어떤 힘이 아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 바로 그분이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 삼위 일체 하나님이시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령도 믿지 않고 성자 예수도 우리가 믿는바 성삼위 중 이위(二位)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가 ‘우리 보다 먼저나신 피조물’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골로새 1:15절 말씀에 의거한다고 하지만 성경은 항상 문맥을 따라 해석해야 한다. 골로새 1:16을 보면 저들이 피조물이라고 믿고 있는 그 예수는 바로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이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된 것이 하나도 없는 조물주 바로 그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시다.

1. 성령세례

(1) 일생의 단 일회적인 사건    

성령세례는 곧 구원을 말하며 일생에 중생할 때 단 한번 경험하는 사건이다. 우리가 중생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될 수 없는 일이다. 고린도전서 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했고, 로마서 8:9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라고 했으니 성령을 받는 것은 구원을 이룩할 때 경험하는 일회적(一回的)인 사건이다. 베드로가 한번 설교하였을 때 3,000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 그들 모두는 성령의 역사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목사가 손을 머리에 얹고 안수해야 성령이 임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다. 안수는 안수 받는 사람에게 특별한 일을 위임할 때 맡은바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특별한 은혜를 더하기를 기도할 때 안수 한다. 안디옥교회는 사울과 바나바를 구별(區別, set apart)하고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했다.

구약의 왕, 제사장, 선지자들은 기름 부어 안수를 대신했다. ‘메시아’란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인데 그 메시아는 헬라어로는 그리스도(Christos)이고 그 메시아 즉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다. 그러기에 성령 세례는 중생하고 구원을 얻은 다음에 다시 두 번째로 받는 축복이 아니다. 중생할 때 일생에 한번 받는 일로 참다운 성도라면 누구나 처음 믿을 때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2) 성령세례에 대한 오해

오순절파와 순복음파는 성령세례를 중생과 별도로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중생은 자기 본인의 힘으로 되고 그 다음 성령세례를 받으면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잘못이다. 성경에 성령세례가 구원을 얻은 다음 두 번째로 받는 축복이란 말은 없다. 에베소서 4:5에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라고 했다. 세례는 하나뿐이다. 그 세례는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즉 유기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聯合) 할 때 받는 것이다.

로마서 6장에는 성도가 세례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되어 다시는 죄 가운데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혼이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의(義)에 대하여 산다는 말씀이 나온다. 이 말의 설명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찾아 불 수 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이 있고 열매를 맺는다. 사람이 중생(重生, born again)하여 예수를 믿는 것은 바로 우리가 가지(枝)로서 포도나무에 접붙임 받는 것과 같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연합으로 붙어 있으면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다. 이것이 바로 중생의 의미이고 이것이 바로 성령세례의 의미이다.

(3) 예수님과 성령세례  

예수님의 사역은 1)우리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것(代贖)과 2)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예수를 믿게 하는(重生) 두 가지 사역이다. 요한복음 1:29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한 구절에서 우리의 죄를 없애는 일을 하시고 또 세례 요한이 한 말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는 불로 세례를 줄 것이요.”라고 한 대로 그는 성령세례를 주어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말이다.

구약을 보면 “영을 부어 주신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가령 요엘 2:28은 베드로가 오순절 때 인용한 말씀이지만 그 외에도 구약성경을 보면 가령 에스겔 39:28,29에도 “이스라엘 집에 영을 퍼부어 준다.”는 말이 있고, 이사야 32:15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예수님은 죄를 없이 해주시고 또한 성령으로 세례를 주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신다. 주의할 것은 요한복음 1:29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에서 “지고 가는”이란 말은 원문 헬라어 성경에서 보면 현재분사(現在分詞, present participle)이다. 구원할 자를 구원해 주신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그 모든 피택(彼擇) 자의 죄를 짊어지고 가신다는 말이고, 그가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는 세례 요한의 말도 현재형 분사이므로 예수님의 사역은 계속해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람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말이다. 즉 이는 단회적(單回的)으로 성령을 부어 죄를 회개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한다는 말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구원’ 받았다는 말로 성령을 받았다는 말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주시고 동시에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하신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는 일이다.(요 14:26, 15:26)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게 하려 하심이다.(엡 1:17, 갈 4:19, 고후 3:18)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 속에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이다.(갈 5:15-25)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대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그가 보내신 성령으로 인해 많은 그의 백성들이 세례를 받고 그리고 죄 없이함을 받는다. 이것이 구원이다. 성령세례는 사람이 거듭날 때 즉 구원을 얻을 때 누구나 처음 단 한번 경험하는 일이며 중생한 다음에 다시 경험하는 특별한 성령의 사역이 아니다.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세례’는 단회적(單回的)며 유일회적(唯一回的)인 성령의 역사이다. 개인적으로는 일생에 중생할 때 단 한번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2. 성령충만  

한편 ‘성령충만’은 다르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자. 먼저 결론을 말하면 ‘성령세례’는 중생(重生)과 관련되고 ‘성령 충만’은 성화(聖化)와 관련 된 성령의 사역(使役)이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오순절에 성령을 퍼부어 주시어 즉 성령님을 통하여 처음에는 120명에게 성령세례를 주셨고 후에는 3,000명에게 성령세례를 주셨다. 이렇게 성령세례를 주어 회개하고 중생한 결과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가? 사도행전 2:4에 보니 ‘성령충만’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의 결과는 ‘성령충만’이다.

성령세례는 주님이 하신 일이다. 그리고 성령충만은 거기 모인 사람들이 받은 것이다. 주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주신 성령을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이 받은 것이다. 세례는 중생할 때 단 한번 주님이 성령의 도움으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일어나는 계속적인 성화의 은혜이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말씀에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에 날마다 닮아가는 사람이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중생하면 그 다음부터 계속해서 성화(聖化)가 시작된다. 성화는 과정이다. 성화는 한 번 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 연속된다. 바울도 빌립보서 3:13에서 “내가 이미 잡았다 함도 아니요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나간다.”라고 말했다. 또 바울은 빌립보서 2:12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룩하라.”고 하기도 했다. 이 말은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이룩하라는 말이 아니라 성화의 과정을 충실하게 힘써 나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한번이고 성령충만은 계속되어져야한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을 받은 사람이 그 증거로 날마다 성화를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행위를 말한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성화가 완성되는 사람은 없다. 성도는 죽을 때 그의 성화가 끝난다.

그러나 성화 역시 성령의 도우심(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음)이 필수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성화는 구원 받은 성도 개개인이 힘써 맺어야 할 열매이다. 성화를 잃어버리면 다시 회복하면 된다. 성도가 성화되지 않으면 성령이 근심하신다.(엡 4:30) 성화를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와 말씀이다. 회개를 통해서 성화가 계속된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하다’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회심(conversion)에는 믿음과 회개가 따르는데 믿음은 미래 지향적이고 회개는 과거 지향적이며 성화와 직결된다. 성령충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성령충만은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은 칭찬을 들으며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한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를 보라. 이들은 칭찬을 받으며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다.(행 6:3-5) 바나바도 그렇고(행 11:24),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도 그러했다.(행 13:52) 

(2) 성령충만은 특정 직무를 담당할 때도 하나님이 내리신다.

누가복음 1:15-17을 보면 세례 요한은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9:17과 22:12-15을 보면 다메섹에 들어가서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는 사울은 그 후로도 사도로 성령이 충만했다.

(3) 성령충만이 임시적으로 주어지는 때도 있다.

성령충만은 사도나 선지자 같은 항구직(恒久職)을 맡은 사람을 따로 성별하여 세울 때가 아니더라도 임시적으로 어떤 일을 수행하도록 일을 맡길 때 주어진 사실들이 있다.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선지가가 아니고 제사장이었지만 그와 그의 부인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했다고 누가복음 1:5-8에 말한다. 바울도 전도할 때 성령이 충만했고, 베드로도 산헤드린에서 증언할 때 성령이 충만했고, 에베소 5:18에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는데 성령충만은 모든 성도가 받는 것이며 일생동안 지속적으로 받는 은혜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이다. 에베소서5:18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연구하면 성령충만의 분명한 뜻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로 살펴보자.

  •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형은 신약에서 모두 현재 명령이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성령에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헬라어에서 현재 명령은 항상 동작이 반복되는 것을 말하고 정과거(定過去, aorist form)는 한 번 하고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독을 채워라!”(2:7) 하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 주님은 정과거형 동사(定過去動詞形)를 사용하여 말씀했다. 즉 물을 채우는 일을 한 번만 하라는 것이지 자꾸 채우라는 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요한일서 3:9에서도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에서 “죄를 짓는다.”는 말은 현재 동사이므로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이 같이 정확한 뜻은 원어에서 온다.

  • 또 주목할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은 복수형이다.

원문에서 보면 그 동사는 ‘plerousthe en pneumati’이다. 그러므로 ‘복수 수동태 현재 명령’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 의미는 자명하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며,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서 어느 특정한 부류들에게만 하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기독교 지도자 중에 성령충만은 어느 특정한 교파나 교회에 출석하는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고 속이는 자들이 있는데 이에 속으면 안 된다. 이런 사이비 지도자들을 조심하라. 말세의 특징은 ‘속임수’이다.

  •  “성령충만 하라!”는 말은 수동태이다.  

그러니까 “성령이 너의 마음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도록 하라!”는 말이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는 방법은 우리가 기쁨으로 그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절하지 않고 따르는 것이다. 에베소서 5:18에서 술 취하는 사람은 술을 마셔서 취한다. 마찬가지로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가만히 있으면 성령이 우리 마음에 저절로 부어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술 취하는 사람은 술을 마셔야 취하듯 우리도 성령충만을 받도록 사모하고 힘써야 한다.  

구원의 서정에서 중생, 믿음, 회개, 칭의, 양자 등은 모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한 순간에 하시는 사역이지만 그러나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도가 이루어 나가야 되는 일이다. 우리가 그냥 가만히 앉아서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 아니다.

결론

(1)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분명하게 구별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성령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말은 예수를 믿을 때 죄의 용서와 성령의 은사로 그리스도 안에서 외부적으로 그리고 내부적으로 종합적인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그때 받는 일생에 한 번 있는 일 즉 중생(重生, 거듭남,  born again)이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은 다음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또 유기적으로 연합한 다음 우리의 생활을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성경대로 살려는 욕구가 증대해 가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늘 믿음을 지켜나가며 그리스도인의 훈련을 받아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을 우리 안에 이루려고 노력하는데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선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을 죽게 하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영(聖靈)으로 하여금 우리 속에 살게 하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살자.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각자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 속에 계시기 때문이다.

(2) 우리 생활에 성령의 열매가 맺어져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회개와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할 뿐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이 충만함으로 성화되고 성장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충만을 위해 계속 기도해야 한다.  

(3) 모든 성도는 한 가지 이상 성령의 은사와 직임이 있다.

성령님은 항상 각 개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각 사람은   각각 은사(恩賜, gift)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지만 또한 다른 각각의 은사를 받았다. 그 은사들로 성령이 주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한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회개하게 하고, 우리 죄를 없이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지으셨고, 우리는 그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게 하신다.은사는 여러 가지이다. 그리고 봉사하는 직임도 여러 가지이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에게나 한 가지 이상의 은사와 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은사와 직임은 주권적으로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되어 진다. 그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즉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모든 은사를 하나님의 일을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충성하자. 이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자.(*) 글쓴 이 / 김명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