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

개혁주의 인간론

개혁주의 인간론

– CREATED in GOD’S IMAGE –

   본 소책자는 화란 출신의 미국 개혁주의 신학자 앤서니 후크마(Anthony Andrew Hoekema, 1913-1988)의 조직신학 3부작 인간론, 구원론, 종말론 중 인간론(Created in God’s Image)을 요약한 것이다. 요약이기 때문에 원저자의 의도를 다 전달 할 수 없다는 것을 저자와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다만 저자가 강조하는 핵심 사상을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편집자>

서론 

칼빈은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이 말은 바른 신지식(神知識)이 없으면 인간에 관한 바른 지식도 얻을 수 없으며 인간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올바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교의학(敎義學)에서 하나님의 구속 경륜(經綸, economy)에 관한 그리스도론, 구원론, 성령론, 교회론 및 종말론의 주제는 다 인간에 관한 올바른 지식의 바탕 위에 전개되기 때문에 인간론의 연구는 교의학에서 필수적이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경이 인간에 관해 가르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하나님과 피할 수 없는 관계(關係)에 놓여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바로 이러한 관계를 부인하는 모든 인간론(人間論)은 잘못 된 것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우리는 일반 철학자 또는 사상가들이 논하는 인간관과 기독교적인 인간관을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하며 중세기에 비기독교적인 사상과 혼합된 인간론을 가졌던 스콜라주의의 인간론도 거부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직도 우리의 생각 속에 비기독교적 인간관의 잔재들이 남아있지 않은지 살펴보고 올바른 기독교적 인간 이해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올바른 인간관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이 누구인가 바르게 이해 할 수 있게 되며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도 좀 더 밝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인류 역사 속에서 인간이 철학의 이해를 통해 답을 얻고자 하는 질문들 가운데 중요한 질문의 하나이다. 이를 위해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인간의 본성(本性) 혹은 본질(本質)에 대한 논의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시대적 구분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이에 접근해 볼 수 있다.

첫째, 고대와 중세 철학자들 대부분이 받아들였던 “인간은 이성적(理性的) 동물이다.”라는 명제이다. 소크라테스를 시작으로 당시 철학자들은 인간이 모든 다른 생물들과 동일하게 ‘생명의 원리’인 영혼을 지니고 있지만 특별히 ‘사고(思考) 능력’을 담당하는 지성적(知性的) 영혼(靈魂)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인 한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으며 몸에 의해 ‘나’와 ‘타자’가 구분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바로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의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체계가 지배적이었던 중세 말기 유럽의 사조(思潮)는 근대 초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신체의 사멸 이후에도 영혼의 존재를 인정했다.

둘째, 열정(熱情), 감정(憾情), 감성(感性)을 내세우는 근대 철학자들의 이론이다. 이들에게서 이성(理性)은 참과 거짓의 구별 능력 혹은 계산과 추리하는 능력으로 제한된 의미를 지닌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사실 인간의 본성을 열정의 문제로 다룬다. 그에게서 ‘생명의 원리’로서의 영혼의 본질은 ‘생각하는 것’으로 바뀌며, 생명의 원리는 몸의 ‘심장’에 부여된다. 이때 ‘생각하다’는 단지 ‘반성 작용’만 아니라 감성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서 결국 ‘의식’(意識)을 말하는 의식철학(意識哲學, Consciousness philosophy)이 시작된 것이다. 즉 인간을 ‘세계’와 ‘자아’(自我)를 의식하는 존재로 본다.          

근대철학자들에게서 인간에 대한 이해는 지성, 이성, 감성, 기억, 상상력 등의 정신 능력에 대한 논의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이제 철학자들은 보편적 인간보다 개인에 관심을 갖게 되며 데카르트에게서 시작된 주체로서의 인간 규정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게서 한 획을 긋게 된다.

셋째, 인간의 본성 자체를 부정하는 현대 실존주의(實存主義)이다.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에 의해 시작된 고전 철학에 대한 반론은 실존주의로 이어지는데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이 ‘실존’한 후에 각자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가는 존재로 간주한다. 이들 가운데 특별히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신(神)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개인을 중시한다. 그리고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신(神)을 거부하며 인간은 자신의 뿌리까지도 뽑아버릴 수 있는 즉 자신을 무화(無化)시킬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이해했다.

이처럼 인간(人間論, Anthropology)을 유형별로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다. ‘관념론적 인간론’ : 인간은 근본적으로 정신이며 인간의 물질적 육체란 인간의 근본적 본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생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주의적 인간론’ : 인간은 오직 물질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외의 정신적, 감성적, 영적 삶이란 인간의 물질적 구성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이 외에 ‘사회주의적 인간론’, ‘행동주의적 인간론’, ‘문화 인류학적 인간론’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요약 : 이상의 견해들을 종합평가하여 요약하면 각 견해는 매우 일방적이어서 인간 존재의 여러 가지 면들을 희생시켜가면서 오직 인간의 한 단면만을 강조하고 있다. ‘관념론적 인간관’은 오직 인간의 영혼, 정신, 이성에만 강조점을 두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적 구조의 실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반면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나 스키너(Burrhus Frederic Skinner, 1904-1990)의 ‘물질적 인간관’은 인간의 정신적, 영적 측면의 실체를 부정하면서 오직 인간의 육체적인 면만을 절대화 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런 인간관들은 하나님 대신 피조물의 한 단면만 숭배하기 때문에 우상숭배의 죄책을 벗어날 길이 없다. 성경이 인간에 관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하나님과 피할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제1장 인간론의 중요성

– The Importance of the Doctrine of Man –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신지식(神知識)’을 목표로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 외에 다른 주제들은 신학에서 다룰 수 없는가? 인간을 신학의 주제로 다루는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가 성경에서 아는 하나님은 독야청청(獨也靑靑)하는 하나님(God in Himself)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啓示)하셔서 역사와 현실 속에서 인간과 더불어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초월적 하나님에 대해 그 존재와 속성을 사변적(思辨的)으로 기술(記述)하려는 시도보다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와 교제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요지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를 위한 계시’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創造)에 의한 피조물(被造物)로서 그 앞에 서 있다. 이 같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바른 이해의 길이 열린다. 즉 하나님이 신학의 유일한 주제이신 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학의 한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신학의 각론들 중 인간론만큼 비성경적인 외적 영향을 많이 받은 성경교리도 드물다. 인간론은 생물학, 문화인류학 등에 의해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신학과 일반학문과의 충돌문제가 가장 심각하게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인간론은 성경적으로 세심하게 정립 되어야 한다. 즉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사변적 이해와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통한 주관적 이해라고 하는 양극단의 방식을 지양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인간론을 올바르게 전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 기독교 인간론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성경적 관계성’을 밝히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과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성경적 관계성에 대해서는 언약(言約)이라는 독특한 성경적인 개념을 설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이중적 이해는 인간이 처음 피조(被造)되었을 때의 모습과 아담 타락 이후의 모습을 아는 것이다.

제2장 피조 된 인격체로서의 인간

– Man as a Created Person –

인간에 대한 크리스천의 기본적인 견해는 하나님을 창조주(創造主)로 믿는 것이며 이는 곧 인간이 자율적(自律的) 혹은 독립적(獨立的)으로 존재할 수 없는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말해 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중략) 하나님이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1,27)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사건의 중요한 요점중 하나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속해있다는 것이며 성경은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에 의해 보존되고 지속되는 것이다.(느 9:6 참조)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독립성을 지닌 인격체(人格體)라는 것이다. 벌두인(Leonard Verduin, 1897-1999)은 이 같은 인간을 ‘선택권을 소유한 피조물’이라고 표현했다. 즉 인간은 피조물인 동시에 하나님의 인격체 곧 ‘피조 된 인격체’인 것이다.      

인간에게 이러한 의존성(依存性, dependence)과 자율성(自律性, freedom)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해야만 하는 동시에 인격체로서 누리는 선택(選擇)의 자유가 동시에 가능한가 하는 점은 신비로울 뿐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사고로는 이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인간에게는 ‘온전한 의존’과 ‘인격체로서의 자유’가 서로 공존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이 같이 인간이 피조 된 인격체라는 사실은 신학의 다른 면들에 있어서도 암시해 주고 있다.

첫째, 인간이 최초로 죄를 지은 것은 곧 그가 선택권을 가진 인격체라는 사실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허락된 의지, permissive will)

둘째, 사람이 타락한 후에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인간은 이 구속 과정에서 성령의 힘을 입어 자발적으로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인격체로서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새로운 창조, a new creation)

셋째, 인간은 피조물이므로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자신을 성화시켜야 하며 또한 인간은 인격체이므로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룸으로써’(고후 7:1) 책임적으로 이 성화의 과정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넷째, 인간은 피조물이기에 창조주 하나님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하나님의 보호가 없이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우리는 인격체이기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셔서 우리를 보존하는 것이다.(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제3장 하나님 형상(1)

– The Image of God : Biblical Teaching –

(1) 구약의 가르침

구약성경 창세기에 세 번에 걸쳐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란 구절을 사용하고 있다.(창 1:26-28, 5:1-3, 9:6)

  • 창세기 1:26-28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동물들은 ‘각기 종류대로’ 창조함을 받았지만, 사람만은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 성격의 선언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는 구절의 동사가 1인칭 복수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사람의 창조가 하나님의 집단적 작업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장엄 복수형’(하나님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복수형)이라고 한다. 또 다른 해석은 하나님과 천사의 협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에 불과한 천사가 사람을 창조할 수 없으며 더욱이 인간이 천사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해석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수형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인간 창조의 독특성)

여기서 사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담’이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람’을 의미한다. 또 종종 ‘인류’(人類, humankind)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을 따라’에서 표현된 ‘형상’(形像, image)의 히브리 원어는 ‘첼램’이며 이것은 ‘자르다’ ‘베다’라는 동사로부터 유래된 단어로 어떤 형상을 조각하는 광경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모양’(模樣, likeness)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 ‘데무쓰’는 ‘…와 비슷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형상’과 ‘모양’은 의미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 창세기 5:1-3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어떤 학자들은 인간이 죄로 타락할 때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성경의 근거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損傷)되었다고는 말 할 수 있다.

창세기 5:1을 타락 이후 인간에 대한 묘사로 볼 때 타락으로 인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다. 아담이 ‘자기 모양’과 ‘자기 형상’ 대로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담이 타락 후에도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의 아들 셋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 창세기 9:6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홍수 이후 노아는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이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약속하시기를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는 일이 없을 것이며 오히려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한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땅을 보존 시킬 것’이라고 하셨다.(창 8:20-22) 창세기 9장 첫 부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과 땅과 만물들을 보존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규례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 규례들 중 하나님은 살인 행위를 금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 하나님을 반영하고 있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기 때문에 살인 행위는 곧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말살(抹殺)하는 행위가 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여 부패하고 악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2) 신약의 가르침

신약 성경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특히 타락한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 야고보서 3:9-12

야고보는 동일한 혀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을 저주하는 사람의 걷잡을 수 없는 변덕스러움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저주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모습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저주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지음 받았다’는 동사는 ‘게고노타스’인데 ‘…이 되다’ ‘만들어 지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동사 ‘기노마이’의 완료 분사형이다. 헬라어 완료시제는 계속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과거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3:9의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의 분명한 의미는 과거의 언젠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며 그리고 아직도 그 형상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을 저주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히브리서 1:3        

“아들은 하나님의 광채시요 그 본채의 정확한 형상이라.”(The Son is the radiance of God’s glory and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 여기서 ‘정확한 형상’(exact representation)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카락테르’인데 이 단어는 ‘눌러 찍어내다’, ‘주조(鑄造)하다’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흔적, 성격, 특성 등이 그대로 하나님의 정확한 형상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히 4:15)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상태의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 보이는 모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보다 하나님의 형상을 더 잘 볼 수 있는 길은 없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고 듣는 것이 곧 하나님이 사람을 향하신 의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길은 사람과 동물을 비교해 인간만이 갖고 있는 능력과 재능들을 ‘신적 형상들’로 간주하여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하신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삶의 중심부에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삶의 중심부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인간을 향한 사랑이었다. 즉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빼어 닮은 형상이라면 ‘하나님 형상’의 심장은 사랑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만큼 사랑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또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시는 몇몇 구절이 있는데 이 같이 사람이 평생 새로워지고 바꾸어져 나가야만 하는 존재라면 이 말은 이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으로 인해 부패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닮게 된 이유는 아들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 중에 뛰어난 맏아들이 되시기 위함이다. ‘아들의 형상’을 닮는다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향한 예정하신 목표이며 목적이다.

  •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옛 시대와는 달리 은혜언약 시대의 우리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반영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점점 자라가야 한다는 사상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옷 입는다는 말로도 표현되고 있다.

로마서 8:29과 고린도후서 3:18이 함께 증언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이 얻는 구속의 목표는 그들이 온전히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닮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목표라고 로마서 8:29이 말하고 있는 반면에 고린도후서 3:18은 이러한 변화가 이생에서 계속되는 과정이며(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다), 이런 변화는 성령의 역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 하나님의 형상의 종말론적 의미

신약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종종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되는 개념이다. 우리의 최종적인 성화(聖化)는 곧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처럼 닮는 것이며 하나님을 완전하게 닮는 것이다. 신약성경에는 이러한 일을 우리가 또한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이신 예수처럼 되어가는 일로 표현하고 있다.(고전 15:49) 이 같은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성경의 증거에 충실하게 된다면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말해야 할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喪失)될 수 없는 인간의 한 측면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본질과 실존의 한 부분으로 인간이 인간되기를 멈추지 않는 한 도저히 상실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둘째,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죄로 타락하게 되었을 때 굴절(屈折)되고 일그러지게 되었으며 성화의 과정을 통해 회복되고 새로워지게 되는 그 무엇이다.                  

제4장 하나님의 형상(2)

– The Image of God : Historical Survey –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기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 형상’의 내용에 관한 문제에 이르러서는 분명하지 않게 된다.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야기 시키게 된다.

  •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 구속 과정상에 있어서 인간의 영적, 도덕적 갱신이 ‘하나님의 형상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
  • 장차 오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최종적 상태는 어떤 것인가?

우리는 이에 대해 주후 2세기경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 제공된 몇몇 대표적 유형의 답변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이레니우스

이레니우스(Irenaeus, 130-200)는 소아시아 지방에서 출생했으며 주후 177년 리용(Lyon)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그의 대표적 저술 ‘이단을 반박함’에서 이렇게 말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형상’과 ‘자기의 모양’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 할 때 ‘모양’은 잃었으나 ‘형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후 인간은 구속(救贖)의 과정을 통해 그 잃어 버렸던 ‘하나님의 모양’을 되찾게 된다. 이처럼 이레니우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의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성품 다시 말해서 타락 시에도 상실되지 않는 성품을 의미한다. 반면 ‘하나님의 모양’이란 성령께서 아담에게 덧입혀 주신 ‘신성의 의복’이었다.

이 같은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이 중세까지 계속되는 전통을 확립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서로 다른 것으로 구별한 것은 성경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타락 후에도 보존되는 ‘하나님의 형상’을 합리성으로 간주한 것은 이레니우스의 오류였다. 합리성이 결코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이 될 수 없는 것이다.      

(2)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중세가 낳은 최대의 신학자요 철학자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그의 견해들은 주로 ‘신학대전’(summary of theology)에서 추출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주로 인간의 지성(知性) 혹은 이성(理性)에서 찾고 있다. 달리 말하면 오직 지능(知能) 있는 똑똑한 피조물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즉 토마스 아퀴나스는 특별히 사람의 지성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지성은 인간 속에 담겨져 있는 신적인 특질(特質)이라 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에 의하면 우리의 본성 안에 있는 이성(理性)이 완전 부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성을 통해 어느 정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점이 우리 개혁주의와 다르다. 이런 논리적인 틀 속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이성으로 보았다. 인간의 이성이 완전히 부패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한 인간 안에도 아직 남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 이성이 흐려졌기 때문에 이성을 활용하는데 게으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어둡고 희미해졌다고 했다.

이 같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이성이 아직은 완전하게 부패하지 않았고 단지 불완전해져 버렸기 때문에 인간은 이성(理性)이라는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3) 존 칼빈

중세시대의 이러한 스콜라주의 인간론에 대한 반발로써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의 인간론은 좀 더 성경적 가르침으로 복귀하게 된다. 존 칼빈(John Calvin, 1506-1564)은 ‘하나님의 형상’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영혼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꼭 영혼에만 국한된다고 볼 수 있겠는가? 인간의 육체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빛을 반사하고 있다.      

칼빈은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 중심적인 좌소(座所)가 인간의 정신과 마음 혹은 영혼과 그것들의 능력들 속에 자리 잡고 있기는 하지만 육체를 포함한 인간의 그 어떠한 부분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고 했다. 즉 인간이 전인적(全人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칼빈은 골로새서 3:10, 에베소서 4:24에 근거해 하나님의 본래 형상은 ‘의로움’과 ‘거룩함’과 ‘참된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인간은 타락한 후에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고 타락 이후 남아 있다고 해도 그것은 소름끼칠 정도의 기형물 밖에는 없다고 했다. 이 같이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다고 말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죄인 안에도 아직 ‘하나님 형상’의 잔해 잔재물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 형상’은 어떻게 새롭게 되며 회복 될 수 있는가? 칼빈은 ‘하나님 형상’의 회복에 대해 하나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을 동시에 말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성령의 사역이며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시어 새롭게 하신다, 우리가 새로워진 ‘하나님의 형상’을 받게 된 것은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며 특히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라고 칼빈은 가르친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형상’이 새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성취되는 일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적인 동의이다. 말씀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데 곧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소유함을 의미한다.”라고 했다.

칼빈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말씀에 의해 그분의 진리가 인간 속에 새겨지도록 하는 하나님의 행동이며 동시에 그 말씀에 대한 반응을 통해 나타나는 인간의 행동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새롭게 되는 데는 하님의 은총과 함께 인간의 책임이 뒤따른 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제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새로워지는가? 기본적으로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 회복은 점진적이며 전 생애에 걸쳐 계속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4) 칼 바르트          

신정통주의(新正統主義, neo-orthodoxy) 신학자 칼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 안에 있는 어떤 자질이나 특성이나 본질에서 찾기를 거부했다. 발트는 “인간 안에 어떤 본질이 하나님과 비슷하다는 주장은 인간과 하나님의 근본적인 구별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완전히 다르다.”(total otherness. 전적인 타자)라고 하며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인간의 어떤 자질이 하나님과 비슷하다는 주장은 자유주의의 오류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자질을 혼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을 아는 신지식의 접촉점이 되지 못한다. 인간 안에 어떤 부분이 하나님과 닮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안테나의 역할을 하는 접촉점(接觸占)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실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절대적인 은혜로 찾아오셔서 관계를 수립할 때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견해와 다른 것은 지금까지는 인간의 본성 안에서 하나님과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했던 반면에 바르트는 인간의 자질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역량(power)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며 인간은 그러한 자기 초월의 역량을 상실했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기능을 하는 역량은 인간 안에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 먼저 주권적으로 은혜로 관계를 수립할 때에만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은혜의 종교를 강조)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역량을 상실했다는 이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것이다.

바르트의 이 견해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지속적인 회복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찾아오셔서 관계를 맺어주실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 위기적인 사건과 관계 속에서 인간을 찾아오신다. 인간이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은혜로 인간을 찾아오실 뿐이다. 그래서 마치 탄젠트가 원을 접하듯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시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수립된다. 그것을 인간은 전혀 어쩔 수 있는 여지가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보다 일시적인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성령의 내재를 거부한다. 지속적인 성령의 내재를 경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성령이 찾아오셨다가 떠나신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찾아오실 때에만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가 있고 그분을 섬길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바르트의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과 끊이지 않는 지속적인 교제를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그의 견해는 교회론과 성화론 등에 있어서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이 바르트는 어떤 본질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면에서 이해한다는 점에서 아주 독특하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의 ‘하나님의 형상’론은 성경적 인간론과는 많은 거리가 있는 것이다.      

(5) 에밀 부루너

바르트와 함께 신정통주의 신학자 소위 변증법적 신학을 대표하는 에밀 부루너(Emil Brunner,1889-1966)는 ‘하나님의 형상’을 ‘실질적인 형상’과 ‘형식적인 형상’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과 사랑으로 바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역량을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했다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본적인 구조는 인간에게 남아 있다. 비록 실질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역량은 상실했지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본 구조는 남아 있다고 본 것이다.

저자(안토니 후쿠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부루너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부루너는 결국 첫 아담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배격하는 것이며 따라서 제2의 아담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역사성에 대해 심각한 회의(懷疑)를 제기하게 된다.

둘째,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부루너의 입장은 결국 그가 주장하고 있는 창조와 죄 사이의 구분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게 한다.

셋째, 부루너는 인간의 죄악성에도 불구하고 형식적 의미(자유성 이성, 양심, 언어 등)의 ‘하나님의 형상’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상, 양심, 자유 등은 죄에 의해 부패되고 왜곡되지 않았단 말인가?

(6) 벌카워                

화란 신학자 벌카워(Gerrit Cornelis Berkouwer, 1903-1996)는 그의 저서 ‘인간론’(Man: The Image of God)에서 바르트나 브루너의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이 이성이나 지성에서 발견된다는 사상을 반대했다. 그것은 인간의 하나님과의 필연적인 관계성이 강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벌카워는 ‘하나님의 형상’을 광의적 측면과 협의적 측면으로 나누려는 시도와 정당성을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의문을 제시하면서 이를 배척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을 광의적 측면과 협의적 측면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성, 도덕성, 자유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성경적 근거가 없는 사색적 추상에 빠지게 된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본질 혹은 존재라고 묘사하기 시작한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성을 일종의 부록으로 전락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한 시도는 성경과 전혀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성을 항상 중심부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만일 협의적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되었고 광의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만이 남아있다면 결국 우리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상반된 형상을 취급하게 된다.

넷째, 협의적, 광의적 형상으로 구별 짓는 일은 죄로 인한 인간의 파격적 부패를 가볍게 생각하는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별 특히 광의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속에 아직도 죄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광의적 협의적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누는 일은 특히 광의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 속에 속한 것과 속하지 않은 것을 임의적으로 결정짓도록 유도한다. 광의적 형상에 속해 있다는 특성과 성품들에 대해 학자들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는 자체가 이것을 반영해 준다.

그리고 한 가지 주목 할 사실은 벌카워는 창조물을 향한 인간의 통치권을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결국 벌카워에 의한 ‘하나님의 형상관’은 타락한 인간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성질의 것이며 또한 광의적 의미의 형상과 협의적 의미의 형상은 구분할 수 없다. 또한 벌카워는 대표성이란 단어를 ‘하나님의 형상’과 연결 짓는다.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이 지상에서 하나님을 대표하고 대신한다는 것이다.

후크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벌카워의 이런 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첫째, 성경은 타락한 인간을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창 9:6, 약 3:9)임을 지적하고 있으며 그리고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골 3:10, 엡 4:24)을 따라 새로워져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존재 자체(창 1:26)를 가리킨 말씀이다.

셋째, 벌카워는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계속적으로 인간으로 남아 있는 사실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을 구별 짓는다.

제5장 하나님의 형상(3)

– The Image of God : A Theological Summary –

본 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 교리의 신학적 의미와 그 중요성에 관한 개관(槪觀)이다. 피조물 중에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있어 유일한 특성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지침계(指針械)와 같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 교리는 기독교 인간론의 심장부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창 1:27) 말씀은 인간의 영적 도덕적 순결성만을 묘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이 그 이상의 존재임을 말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이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최초에 어떠한 방향으로 자기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포괄적인 존재로 부각 시키는 것이 그 중심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의 선언은 인간은 그 구성 전체가 하나님을 닮았고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말하기를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거나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그 전체성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덧붙여진 부수물(副率物)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계속 우리가 한 인간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그런 우연적인 것이나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데 있어 반드시 필수적인 그 무엇이라는 주장이다.

‘형상’(히브리어 첼램과 데무쓰, ה דמו , צלם)이란 단어 속에 함의(含意) 된 기본적인 사상은 ‘…과 같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창조 시에 하나님과 닮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러나 창세기 1:26-28은 인간이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같은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상은 인간은 마땅히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투영(投影, mirror)하고 대표(代表, represent)하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을 투영(投影)하도록 되어있다.

거울이 실체를 반영하듯이 인간도 하나님을 드러내야 한다. 또 다른 사람을 볼 때 우리는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반영을 바라보아야 한다. 즉 이 땅위의 인간을 통해 하나님은 보여 질 수 있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사실상 다른 피조물들도 심지어 하늘마저도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오직 인간을 통해 인간 속에서만 보여지 게 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종종 하나님의 일반계시에 관해 말해 왔다. 이 계시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의 임재와 능력과 신성(神性) 등을 그가 손으로 만드신 만물 속에 계시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 창조를 통해서는 자신을 독특한 방법으로 나타내고 계신다. 그 것은 다름 아닌 자기의 투영(投影)과 같은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심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영예인 것이다.

이런 사실은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십계명의 둘째 계명은 특별히 하나님을 비겨 그 어떤 형상도 만들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들이 또 다른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않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이 형상은 살아있고 걷기도하고 말하기도 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자기 본연의 상태로 돌아가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것인가를 볼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둘째, 인간은 자연 만물에 대해 하나님을 대표한다.

인간은 이를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지음 받았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쳐다 볼 때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그 무엇을 바라보게 된다. 이 때 사람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대표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을 대표한다면 이것은 외국으로 파송 된 한 나라의 대사(大使)와 같다. 대사가 자기 본국을 대표하여 본국의 권위를 나타내듯이 인간도 하나님의 권위(權威)를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입장을 지지하고 변호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려 하시는 일들을 당연히 힘써 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들로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들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 땅 위에 이루려 하시는 자기의 계획을 수행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바로 하나님의 대리자(代理者)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인간을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인간의 육체도 ‘하나님의 형상’의 구성 요소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신학자들이 이 같이 중요한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육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 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만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칼빈은 일방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형상’의 중심 좌소(座所)는 인간의 영혼에 있다고 보면서도 그는 “육체를 포함한 인간의 그 어떤 부분도 ‘하나님 형상’의 불꽃이 그 빛을 발하지 않는 부분이 없다.”고 선언했다. 칼빈처럼 이렇게 인간의 육체까지도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논술한 신학자는 헤르만 바빙크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육체 역시 ‘하나님 형상’에 속해있다. 인간의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이로운 걸작품이다. 육체는 영혼과 동일하게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다. 육체는 인간됨의 본질적 구성이므로 비록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죽음 시에 육체가 영혼으로부터 잔인스럽게 찢겨져 분리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는 부활 시에 영혼과 다시 결합하게 된다.”

(1) 인간의 구조적 측면과 기능적 측면

루이스 벌코프는 그의 저서 ‘기독교 교리편람’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제한된 의미’와 ‘포괄적 의미’로 나누어 논한다. 벌코프에 의하면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이 창조될 때 소유하게 된 영적인 특성들 다시 말해 ‘참된 지식’, ‘의로움’, ‘거룩함’을 말한다. 좀 더 넓은 포괄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은 합리적이며 도덕적이며 불멸적인 영적 존재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형상은 물질적 본체로서가 아니라 영혼의 기관으로서의 육체 안에 있다는 사실과 자기보다 낮은 피조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인간이 갖고 있다는 사실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좁은 의미의 ‘하나님 형상’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전적으로 상실되었으나 넓은 의미의 ‘하나님 형상’은 완전히 상실된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부패(腐敗)되고 왜곡(歪曲)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 같은 구분은 인간을 두 가지 측면으로 관찰하는 방법인데 하나는 ‘구조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기능적 측면’이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측면의 상호 연관성이다. 질문을 제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생각할 때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구조적 측면의 질문을 연상해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은 무엇을 하는가’라는 기능적 측면의 질문을 생각해야 하는가?”하는 문제이다. 혹은 이 두 가지 질문을 모두 취급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인간의 행동하는 ‘기능적 측면’을 관찰하여 묘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인가 아니면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구조적 측면’을 묘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인가?”의 문제이다. 어떤 신학자들은 인간의 ‘구조적 측면’(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에 일차적 강조를 둔다. 반면에 다른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의미를 인간의 ‘기능적 측면’(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지 측면을 함께 유지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전인성(全人性)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인간의 구조성(構造性)과 인간의 기능성(機能性)을 함께 포함하여야 할 것이다. 인간은 자체적 구조 없이 기능 할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는 존재도 역시 어떠한 특정한 방식으로 기능하도록 창조 되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 만물을 다스리도록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구조적 기관들을 부여 받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이러한 일들을 행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기능(機能)과 구조(構造)는 ‘하나님의 형상’의 근본적인 두 가지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 신학에서 이 두 가지 측면의 강조점이 시대에 따라 바뀌어 오곤 했다. 기독교 초기의 신학자들은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주로 인간의 구조적 기관들 안에(이성, 도덕성과 같은 것들) 있다고 하면서 인간의 기능적 측면은 인간의 구조성에 첨부되어 있는 일종의 부속물(附屬物) 정도로 간주했다.  

그러나 최근의 신학자들은 반대로 인간의 기능성(하나님을 예배하고 인간을 사랑하며 자연을 다스리는 일 등)이야말로 ‘하나님 형상’의 내용이며 본질적 요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기능적 측면을 강조하는 견해가 빠지기 쉬운 위험은 ‘하나님의 형상’을 기능적 측면으로만 이해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조적 측면으로만 ‘하나님 형상’을 이해하려는 유혹과 동일한 위험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이 두 가지 측면을 두고 이렇게 정리했다. “‘하나님 형상’을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나눠 생각함으로써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본체와 질, 자연과 은총, 창조와 구속 사이의 연관성을 가장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잠재적 역량, 은사, 특별한 재능 등 ‘인간의 구조’와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배하고 이웃을 위해 헌신 봉사 하는 등의 ‘인간의 기능’을 하나로 묶어 생각해야 한다. 어느 한쪽만을 강조함으로 다른 한쪽을 희생시키면 그것은 균형을 잃은 인간에 대한 편협한 판단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의 구조’를 이차적인 것으로 ‘인간의 기능’을 일차적인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떠한 임무를 수행하거나 어떤 사명을 완수하거나 혹은 어떤 소명을 추구해 살 수 있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를 감당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많은 재능들, 그의 위대하심과 그의 영광의 얼마간을 반영해 주는 재능들을 부여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다는 것은 주어진 임무와 재능들을 함께 본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임무가 일차적이요 재능은 이차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재능들은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참 형상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초월하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대답한다. “그(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골 1:15) 그러므로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진정으로 어떤 것인가를 알기 원한다면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참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의 근본이 인간의 이성(理性)이나 지성(知性)과 같은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구속과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생애의 핵심이 바로 이 놀라운 구속과 구원을 이루신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기 1장에 감추어진 것 즉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보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그에게서 이중적 기이(奇異)함을 보게 된다.

첫째, 그의 신성(神性)이라는 기이함이다.

  • 그는 그와 아버지가 하나라는 말씀하실 만큼 담대하신 하나님이신 인간이다. 이 말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고소하게 만들었다.(요 10:31-33)
  • 그는 인가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 즉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일을 행하신 것이다.
  • 또 아브라함 이전부터 계신 분이라고 말하실 수 있는 분이다.(요 8:58)

둘째, 그의 인성(人性)의 기이함이다. 비록 그는 참 인간이기는 하지만 죄는 없으시다는 특이한 인성을 갖고 있다

  • 그는 정녕 죄가 없으신 분이다.
  • 아버지에 대한 그의 순종은 온전하셨다.
  • 그의 기도생활은 여타 인간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사람에 대한 사랑 역시 측량할 수 없이 깊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기이함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지를 보여주심으로 우리는 그 앞에서 한 없이 부끄러운 존재임을 자각하게 만든다. 인간 예수의 기이함은 우리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그 기이함은 우리의 모형(模型)이다.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意圖)를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삶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이렇다.

첫째, 그는 항상 모든 일에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향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구세주로서 그가 감당해야 할 무서운 고통의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시고”(마 26:39)

둘째, 그의 자신을 제물로 드린 온전한 이웃 사랑의 삶이었다.

사람들이 그들 필요를 따라 나올 때 그 필요가 병 고침을 위한 것이든 먹을 양식을 위한 것이든 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든 간에 그는 언제나 그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있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셋째,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가 도심을 보여주셨다.      

그는 말씀으로 갈리리 호수에서 제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풍랑을 잠잠케 하셨다. 그는 또 만물의 주인 되심을 보이시고자 물위를 걸으셨고, 초자연적인 물고기 잡이와 오병이어의 기적,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다. 많은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 내셨으며 귀머거리와 소경을 치유하셨다. 절름발이를 온전히 걷게 하시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셨다. 이런 기적들이 그의 신성의 증거이었는가? 아니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의존되어 있는 인성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계시였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해 생각 할 수 없다.

마르키아누스(Flavius Marcianus, 396-457) 황제는 주후 451년 칼케돈회의(Council of Chalcedon)를 소집하여 그리스도의 단성론(單性論)을 주장하는 유디케스(Eutyches, 378-456)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칼케톤신조를 작성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일(一) 인격(人格) 양성론(兩性論)’을 확립했다. 그 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수는 완전한 신(神)이요 완전한 인간(人間)이다. 예수의 신성은 성부와 같고 예수의 인성은 우리와 같으나 죄는 없으시다. 예수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 논의되었듯이 이 두 성품은 서로 혼합되거나 어느 한쪽이 변하거나 혹은 나누이거나 분리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상존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사람이시며 그러므로 그가 무엇을 하시든지 신(神)인 동시에 인간으로서 그것을 행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통해 우리는 ‘만물 통치권’이 이처럼 ‘하나님 형상’ 기능의 본질적 구성 요소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그 형상의 기능은 다음과 같은 세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삼중적인 관계)

  •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진 상태
  • 이웃(사람)을 향하여 열려진 상태
  • 자연을 다스리는 행위이다.

(3) 삼중 관계에 있는 인간

하나님, 이웃, 자연 이런 삼중 관계에서 그 사명을 다하신 ‘하나님의 참 형상’이신 그리스도처럼 우리 또한 그래야 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1:26-28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창조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하시니라.” 하나님은 이 같이 우리 인간을 삼중 관계 속에 놓으셨다.

  •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

상기 구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의 인간 창조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축복 그리고 하나님에 의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위임 통치들은 인간에게 주어진 본래적인 관계를 나타내주는 것이다.

인간의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말씀 속에 나타난다.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땅을 다스리라는 말씀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와 같은 관계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며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가를 발견하게 된다.    

  • 인간이라는 의미는 우리의 존재와 삶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그의 존재가 하나님께 달려있으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예속된 피조물이며, 하나님에 대해 우선적 책임이 있는 피조물이다. 이것이 인간의 첫째 되고도 가장 중요한 관계이다.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는 이 관계에 예속되거나 이 관계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랑하고 그를 신뢰하고 그에게 복종하고 그에게 기도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이 같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항상 최우선이기에 인간은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 면전(面前)에서 사는 것같이 살아야 한다.(coram Deo) 물속의 물고기처럼 인간도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 물고기가 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할 때 그것이 자유와 생명을 잃게 만들 듯이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자유를 추구할 때 죄의 노예(奴隸)가 되고 만다. 이런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가 기독교적 인간론의 근간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런 관계를 부정하는 모든 인간론은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적(敵) 그리스도적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서도 참되고 옳은 것에 도달할 수 있는 자율적(自律的) 존재라고 주장하는 모든 인간론은 마땅히 거짓된 것으로 배격되어야 한다. 칼빈 역시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난다.”라고 했고 벌카워 또한 “성경의 관심은 항상 하나님과의 인간과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독자적 존재로 이해될 수 없다.”고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에 앞서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스스로 의식할 수 있으며 스스로 결정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그러기에 하나님께 응답하며 그에게 반응 할 수 있는 또한 그와 교제할 수 있으며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자아와 인격으로 창조되었다.

이러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또한 그의 영광을 위해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그의 모든 힘과 재능과 능력을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 인간이 된다는 것은 상호 관계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다시 창세기 1:27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27절은 두 문장이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 구절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성적(性的) 구별이 있다는 것만을 말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물들에게도 성별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또 짐승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인간은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가정(사회)을 이루고 사람들과의 교제 가운데 살아가도록 창조 되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이 창세기 2장에 잘 나타나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영어로 ‘그에게 합당한 조력자’로 번역된 ‘돕는 배필’의 히브리어 는 ‘에제르 커네게드’이다. ‘그에게 적합한’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 ‘네게드’는 ‘…와 일치하는’ 혹은 ‘…에 응답하는’이란 의미가 있다. 이 단어들은 여자가 남자와 함께 하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완전하게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자가 여자 없이는 온전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인간 창조의 부족이 아니라 인간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데 부족함을 말함) 이 말은 여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은 오직 결혼한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원숙한 인간이 되는 것을 경험한다는 말은 아니다. 남자의 전형적인 모범이신 예수님은 결혼을 하신 적이 없다. 또한 우리의 인성이 완성되는 내세의 삶에서도 결혼제도는 없다.(마 22:30)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사람들 사이의 교제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타나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또한 인간 사이의 총체적 관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사람은 고립 상태에서 진정한 인성에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 2:18)라고 하셨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와 자극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며 성장하며 성숙해질 수 있다. 또 인간은 다른 사람과 협력할 때 자신의 잠재성을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맺는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진리이다.            

이것은 심지어 집단적인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우리는 다른 종족, 다른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 다른 계층과 형태의 교육을 받는 사람들, 다른 소명과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하다. 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져야 할 권리, 그들에 의해 사랑 받을 권리, 다른 사람에 속할 권리들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웃을 받아들이며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래적 모습을 의미한다.

  •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곧 만물의 관리자가 된다는 것이다.

창세기 1:26-28은 사람을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이 이러한 지배가 갖는 중요성에 대해서 이견을 보여 왔다. 어떤 이는 인간의 만물 지배를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 부차적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인간에게 주어진 땅에 대한 지배와 통치권을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적 요소라고 믿고 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모든 창조사역을 지배하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듯이 또한 인간도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관리자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땅에 대한 지배권을 갖는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필수 요소이다. 창세기 1:28는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두 가지 로 표현되고 있다. ‘정복하라!’로 해석되는 히브리어 동사는 ‘카바쉬’인데 ‘정복하다’ 혹은 ‘예속시키다’라는 뜻이다. 이 동사가 말하는 바는 인간은 땅의 자원들을 찾아내야 하며 토지를 경작하고 땅에 뭍인 보화를 채굴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총체적 의미의 자연과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모든 잠재력을 개발하도록 명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농업, 원예, 축산업을 개발시켜야 할 뿐 아니라 학문, 과학기술 예술 등도 발전 시켜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문화를 발전시켜야 하는 ‘문화명령’(cultual mandate)을 받았다. 비록 이런 표현들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일환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그 축복은 동시에 인간이 완수해야 할 하나님의 위임 사항임을 의미한다.

인간과 자연의 이러한 관계를 기술하기 위해 창세기 1:28은 ‘지배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히브리어 동사 ‘라다’를 사용하고 있다. 이 동사는 ‘다스리다’는 말로도 번역되었다. 특별히 인간이 동물을 지배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창세기 9:2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노아 홍수 이후의 인류의 대표적인 노아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땅의 모든 짐승이 (중략)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었음이라.” 시편 8편도 이와 동일한 사상을 노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좀 더 확대하여 전개시키고 있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나이다.”(시 8:5,6)

그러나 단순히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아담에게 그가 행해야 할 특별한 임무가 주어졌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에덴동산을 가꾸며(아바드) 돌보는(샤마르) 일이다. 히브리어 ‘아바드’는 문자적으로 ‘섬기다’는 의미를 갖는다. 또한 ‘샤마르’는 ‘지키다, 경계하다, 보존하다, 돌보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아담은 자연 지배를 명령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그가 거하게 된 땅을 경작하고 돌보도록 명령 받았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간과 자연과의 이런 관계가 의미하는 바는 위로 하나님을 모신 인간은 동시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자연의 신비를 발견하며 자연의 모든 자원들을 찾아내도록 명함을 받은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연의 지배자로 자연 위에 서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인간의 이 세 가지 관계가 서로 연관을 맺고 있는가? 수 세기에 걸쳐 교회는 이 세 가지 관계 중 첫 번째 관계인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다른 두 관계성은 첫 번째 관계를 완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그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이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이해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기독교의 수평적 이해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가장 중요한 관계는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 관계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종국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나타난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의 시대가 되면서 인간의 실질적 관심사 외에는 중요한 가치라는 것이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사람을 이 모든 관계 속에 넣으셨다. 각각의 관계가 다른 두 개의 관계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이 세 가지 관계 중 어느 하나를 떠나선 존재 할 수도 없으며 바르게 기능을 할 수도 없다. 더 나아가서 이 관계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져 있다.

사람은 하나님과 피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관계는 가장 우선되는 가장 중요한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관계 역시 다른 두 관계가 없이는 존재하지 아니하며 다른 두 관계를 떠나서는 그 관계가 실현되지 못한다. 우리 이웃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 땅에서 구현되는 많은 관계중의 하나이다.

더 나아가 이 세 가지 관계의 각각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반영해 주는 방식이기도 하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과 하나님과 갖는 인간의 의식적인 교제는 인간과 맺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반영이라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제는 하나님 안의 삼위간의 교제를 반영하는 일이다.(요 17:24 참조) 땅에 대한 인간의 지배 역시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지고하신 통치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기에 시편 8편의 저자는 “저를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5절)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 삼중의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만 있으며 또한 인간은 이러한 세 가지 관계의 각각에 있어서 하나님을 반영하고 있기에 앞서 ‘하나님의 참된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논할 때 이미 말했듯이 ‘하나님의 형상’의 올바른 기능은 이 세 가지 관계 –하나님을 향한 관계, 인간을 향한 관계, 자연을 향한 관계- 를 통해서 전달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 가지 관계 속에서 부여받은 재질과 재능이 중요하긴 하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단지 이런 것들 속에서만 찾아서는 안 되며 무엇보다도 이 세 가지 관계 속에서 인간이 그 기능을 다할 수 있는 방향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야 할 것이다.            

(4) 인간의 본래적 형상(The Original image of Man)

성경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려면 1)창조(創造), 2)타락(墮落), 구속(救贖)이라는 틀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은 타락하기 이전 본래적(本來的) 형상이 있었다. 최초의 인간부부는 지혜와 순전함과 순종으로 하나님을 반영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비록 최초의 부부가 신학자들이 말하는 ‘원상의 상태’로 사는 죄 없는 자들이긴 하였으나 그들은 완전히 구현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의 무죄함이 결코 상실될 수 없는 자리까지 나아가야만 했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존재했던 단계는 아직도 죄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단계였다.

헤르만 바빙크는 아담과 하와가 여전히 죄를 지을 가능성을 갖고 살아야 했다는 사실이 소위 하나님의 한계선이었다는 주장을 한다.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잠재성은 지녔으나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 속에 살았으며 (중략) 모든 두려움을 배제하는 온전하고도 불편한 사랑을 지니지 못했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이러한 가능성과 가변성은 하나님의 형상의 한 측면이거나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의 한계선 혹은 제한선이라고 바른 단언을 내리었다.”

즉 타락 전 아담과 하와가 존재했던 원래의 상태는 완전하거나 불변의 단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인간은 최초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결정체’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성장과 연단의 필요성을 갖고 있는 더 영화로운 단계로 가기 위한 존재였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불순종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기꺼이 그리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가를 확인하기 원하셨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둘 중 하나를 자의로 선택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유보적 명령’을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만약 아담과 하와가 그 명령을 지켰었다면 그 후의 인류역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슬프게도 그들은 그 명령을 불순종했으며 그러기에 그들 자신과 그들을 뒤따르는 인류 전체를 죄악의 상태 속으로 빠뜨려 버린 것이다.

(5) 변질된 인간의 형상(The Perverted image of Man)

인간의 타락 후 ‘하나님 형상’이 완전히 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변질(變質)되고 일그러져 버렸다. 구조적 측면의 ‘하나님의 형상’은 여전히 존속했다 즉 인간의 재능, 재질, 역량 등은 타락으로 인해 파괴되지 않았다. 그러나 타락 후 인간은 이러한 재능들을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변한 것은 인간의 구조가 아니라 인간이 그의 역할을 감당하는 방식과 목적 다시 말해서 그가 지향해 가는 방향이 바뀌게 된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타락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을 더 이상 나타내 보일 수 없는 재생(再生) 불가한 마귀가 된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 그대로 남아 있으나 그의 능력, 재질, 재능들은 변질되었으며 이런 능력들의 형태, 본질, 성향, 방향 등이 너무나도 크게 바뀌었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대신에 타락 후 인간은 육체의 법을 만족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타락으로 인해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비록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심하게 변질되고 부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 우상들을 섬기게 되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이렇게 변질된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핑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0-23)

옛 사람들은 나무와 돌로 우상을 만든 반면 현대인들은 그들이 경배할 그 무엇인가를 찾아 옛날보다 훨씬 미묘한 형태의 우상들을 섬기고 있다. 예를 들면 자기 자신, 인간관계(사회), 국가, 돈, 명예, 소유, 쾌락과 같은 것들을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의 역량들이 변질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이런 우상들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타락한 인간은 그들 이성(理性)을 하나님을 찬양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부여된 도덕적 감수성에 대해 그릇된 것을 옳다하고 옳은 것을 그릇 되다하는 식으로 변질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언어(言語) 은혜 역시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저주하는 일에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께 순종하기 보다는 하나님과 그의 법도를 무시하는 ‘반항의 인간’이 되었다.      

둘째, 인간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타락한 인간은 타인과의 교제 능력을 가지고 타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되었고, 언어의 재능은 진리를 위한 도구보다는 거짓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며 이웃을 돕기보다는 그를 해롭게 하는데 사용하게 되었다. 예술적 재능 역시 음욕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성(性)이 사악하고 비열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또한 미디어와 마약의 문제가 이제는 큰 문제로 부상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피할 수 없는 필연의 관계 속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셋째,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께 대한 순종 가운데 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땅과 땅의 모든 자원들을 착취하고 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이웃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땅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인간은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인간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천연자원을 고갈시키고 환경을 훼손시키고 있다.

또한 인간들의 문화적 업적 -문학, 예술, 과학, 기술- 에 있어서도 인간의 목표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을 찬미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인간 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타락 이후 이런 모든 점에 변질되고 타락되어 있어 ‘하나님의 형상’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구조적인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 속에 남아있다. 우리가 기능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손실했다고 말하는 것은 구조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심지어 죄인이 되기 위해서라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는 사고(思考)할 수 있어야만 하며 그 생각에 뜻을 담아 무엇인가를 결정(決定)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개는 죄를 지을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기능을 가지고 도리어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만 사실 인간의 죄의 중대성은 그가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 속에 있다. 죄를 더욱 더 가중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만이 받은 놀라운 재능들을 비열한 목적에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속에 있다. 최상의 것이 부패하면 최악의 것이 되는 것이다.

(6) 인간의 새롭게 된 형상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변질된 그 이래로 그 ‘하나님의 형상’은 소생(蘇生)의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 소생(蘇生)과 복원(復原)은 구속의 과정에서 일어나게 된다. 이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 의미하는 바는 비록 완전히 손실되지는 않았지만 변질되어 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으로 원형대로 회복(回復)되어 잘못 된 방향과 목적으로 기능(機能)하던 인간의 ‘하나님 형상’이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기쁘시게 하는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인간 창조 시 하나님과 인간과의 원래의 상태 아니 그리스도 안에서 그 보다 더 영화로운 로 회복됨을 의미한다.          

제3장에서 우리는 구속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에 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이 회복은 종종 ‘거듭남’(born again)이라 불리는 중생(重生)에서 시작 된다. 이 중생은성령의 역사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으며 그 말씀의 선포를 통해 성령께서 조인을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게 하시며 그의 마음을 변화(變化)시키시며 전에 영적으로 죽은 그를 다시 살리어 이제 기꺼이 복음을 믿게 하시며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성경이 말하는 성화(聖化)의 단계에서 계속되어진다. 성화는 인간의 책임성 있는 참여와 함께 성령의 은혜롭고 계속적인 사역이라 정의 될 수 있는 데 이를 통해 성령께서는 점차적으로 중생한 인간을 죄의 오염에서 구해내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삶을 살게 하신다. 이런 일들은 성화의 과정을 통해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성화란 믿음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성령께서 점진적으로 갱신시켜 ‘하나님의 형상’이 원형대로 회복되어가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성화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고 순종하는 삶을 떠나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새로운 순종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치시며 또한 그들을 그렇게 살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 첫 번째로 의미하는 바는 이제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올바른 방향으로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피조 된 인간의 가장 근본적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이기에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그리고 그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자녀가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힘을 성령으로부터 부여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지성(知性)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찬양 가운데 이웃과의 관계나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 바른 기능을 감당하는 능력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둘째, 회복의 의미는 이제 인간은 그들의 이웃(사람)을 향해 올바른  방향으로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을 포함한다. 또한 그들을 위한 기도와 그들의 안녕과 복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러한 행위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는 독특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마 5:44,45) 이것이 의미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이웃이 사랑스럽기에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두 번째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은 이제 그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자기의 독생자를 주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되 우리 자신들을 그들에게 주기까지 사랑해야 할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형상’이 새로워진다는 세 번째 의미는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바르게 지배하며 돌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다시금 하나님의 뜻대로 책임성 있게 순종하는 자세와 순수한 마음으로 땅과 자연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이제 그 자신을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군주로서가 아니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들을 돌보는 청지기로서 바라보게 됨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소위 문화적 위임사항을 올바로 수행하기 위한 기독교문화의 발전에 대한 관심도 이에 준한다.

우리는 독특한 기독교적 방식으로 철학, 역사, 과학, 문학들을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또한 사람의 언어와 사고와 행동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생관 개발에 대한 관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갱신된다는 것은 넓고도 포괄적인 시각의 기독교적 인간관을 포함한다.          

성화의 과정은 삶의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전 피조물과의 관계 그 형상의 회복은 좁은 의미에 있어서의 단순한 종교적 경건이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 하는 일, 혹은 ‘영혼구원’을 위한 활동들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가서 ‘하나님의 형상’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우리가 점점 더 하나님을 닮아가며 그로써 우리의 말과 행실에서 하나님이 더욱더 분명하게 나타나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요 일4:16) 사랑 가운데 사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모형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새로워짐은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우리의 임무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이점에 관해서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 우리는 인간이 피조물이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 은혜로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셔야만 하며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하나의 인격체로 지음을 받았기에 이 회복의 과정에서 자기의 책임성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었다.

제3장에서 우리는 성화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가 바뀌어 가는 것은 성령의 역사인 동시에 우리 자신의 노력을 포함하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성경의 근거들을 살펴보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형상의 갱신(更新)은 사람의 생애 가운데서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개인이 살아있는 한 계속되는 사건이다.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믿는 자들이 진정으로 새로워지기는 하나 완전히 새로워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신자들은 미완성의 새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최후의 날에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우리는 그 완성된 형상을 성경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그리스도 속에서 온전히 보게 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훗날 온전히 새로워지게 될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암시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직 다가올 세상에서만 그 형상의 완전함과 부요함이 드러나게 될 것이며 오직 그때만이 영화롭게 변화된 인간들에 의해 온전히 생생하게 나타내지게 되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형상’의 그러한 완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7) 온전케 된 인간의 ‘하나님 형상’

인간이 마지막으로 영화롭게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 그 완성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의 이러한 종말론적인 완성은 그의 구속받은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의 절정이다. 로마서 8:29을 상기해 보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우리가 확신하건데 그때에 우리는 완전히 그를 닮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닮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완성된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기독론적인 인간관의 최상을 보려면 최초에 창조되었을 때의 인간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미래에 새롭게 되어 질 그 인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구원 사역을 통해 타락 이전의 아담보다도 더 높은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아담은 그의 무죄성과 복된 상태를 잃을 가능성이 있었던 존재였다. 그러나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더 이상 그렇게 될 수가 없는 자들이다.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을 수도 따라서 죽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였으나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죄를 지을 수도 없고 따라서 죽지도 않는’존재들인 것이다. 도저히 상실될 수 없는 이러한 완성이 인간이 향하고 있는 필연적인 것이다!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영화롭게 되심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 또한 그리스도의 영화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의 종국적인 완성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어 질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그 모양이 완성될 것이다. 다가올 세상에서는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이다.”(빌 3:21)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도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처럼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축약하여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 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이러한 온전케 됨의 첫째가 되고 중요한 관심사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들 중의 하나는 그들이 훗날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딤후 2:12) 요한계시록 22:5에서 영화롭게 된 성도들이 영원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린양의 구원을 노래하는 대합창곡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5:10에서는 이러한 왕 노릇이 이 땅위에서 이루어 질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아마도 개혁주의 신앙고백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하이델베르그 교리서가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롭게 된 성도들의 통치는 모든 피조물들을 향한 통치이다.”라는 고백이다. 다가올 세상에서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우주의 그 어디에선가 이 구름에서 저 구름위로 날아다니는 그런 존재들이 아니라 새 땅위에 거할 자들이다.

그때에는 인간들이 비로소 하나님이 의도 하셨던 대로 자연을 지배하며 돌보게 될 것이다. 그때에 인간들은 더 이상 땅의 약탈자들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끝없는 찬양을 돌릴 수 있도록 땅의 자원을 개발하며 그 땅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청지기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또한 그분의 아래에서 인간은 모든 피조 세계 위에 온전하게 왕 노릇하게 될 것이다.

< 요약과 결론 >

이제 본장의 간략한 개요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간단하게 요약해 보자.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단순히 ‘인간이 지니고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인가’를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인간은 하나님을 그대로 비추어 주는 동시에 그를 반영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어떤 의미에서 그 형상은 육체적 몸을 포함하여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더 나가 비록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형상’의 구조적 측면은 이차적이요 기능적 측면이 일차적 중요성을 갖는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은 이 두 가지 측면을 다 포함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삼중적인 관계(하나님과의, 사람과의, 자연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되어 져야 한다. 피조 된 인간은 태초에 이 삼중적인 관계에서 모두 흠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했다.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소멸되어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변질되고 그 결과로 세 가지 관계성에서 그릇된 기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구속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은 회복 되고 그로 인해 인간은 이제 하나님과 타인을 향해 또 자연을 향해 바르게 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 회복은 교회 가운데서 그 최상의 형태를 드러내 보이게 된다. 회복 된 ‘하나님 형상’은 정적(靜的)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끊임없는 도전 즉 동적(動的)인 모습을 지니게 된다.

다가올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온전케 되어 질 것이요 영화롭게 된 인간들이 거기서 모든 삼중적인 관계 속에서 온전한 삶을 살게 누리게 될 것이다. 구속함을 입은 자들은 부활 후에 타락 이전의 인간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 서게 될 것인데 이는 그곳에서는 더 이상 죄를 짓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장을 끝내면서 몇 가지 우리가 계속 생각해야 할 것들을 정리 해 보면 ; 우리는 인간을 바라 볼 때 항상 그들의 미래적 견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합쳐져 하나님의 형상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가르침은 교회의 복음 전도적인 사명에 대해 크나큰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총체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전체로 서의 인류 안에서이다.

제6장 인간의 자아상 문제

– The Question of the Self-Image –

앞서 ‘하나님의 형상’을 논하면서 우리는 인간을 세 가지 관계 속에 살펴보았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이다. 그러나 네 번째 관계로 자신과의 관계를 실천적인 측면에서 살펴보겠다. 어떤 사람은 이 네 번째 관계가 성경이 특별히 다루고 있지 않다고 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 건강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을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자라고 생각을 하거나, 복음적으로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자신과의 관계에서 실패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반대로 자신에 대해 건전하고 건강한 관계를 믿음과 말씀과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감이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건강한 자아상 그 자체가 결코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에 대한 삼중적인 관계 속에서 그 개인이 올바른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전제이며 또한 그러한 바탕을 통해 일어나는 결과이기도 하다.        43

그러나 자신과의 관계를 세 가지 관계와 대등한 제4의 관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자신과의 관계는 오히려 이상의 세 관계들의 기초가 되는 관계요, 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타인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바른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는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부정적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 가지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은 타인에게 줄만한 가치 있는 것이 자신에게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과의 교제에서 긍정적일 수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비록 자신과의 관계가 세 가지 관계에 이은 제4의 관계는 아닐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하고 크리스천의 인간관을 다룸에 있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의미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 보다 앞서는 자아애(自我愛)나 자아존중(自我尊重)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아존중, 자아애란 용어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별도로 천성적인 본래 자아를 사랑한다는 인상이 풍긴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거의 자만에 가깝다. 또한 자기애는 쉽게 자기 숭배에 빠지게 되므로 크리스천이라면 절대로 이런 자만 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1) 자아상의 변질

창세기 3장을 보면 사탄은 뱀을 통해 하와에게 “네가 금단(禁斷)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창 3:5)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하와의 생각을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 인간의 상향성 자아상                 

인간은 타락 시 자아상(自我像, Self-image)의 이중적 변질이 발생했다. 그 하나는 타락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자아상을 과도하게 높이려 했었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 보다 더 높아지기를 원했다는 것을 창세기 3:6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경고를 어기고 우리의 첫 조상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그들의 손아귀에 넣음으로써 사실상 그들 자신을 하나님 위에 올려놓으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행위가 그들의 죄 된 자만심을 드러내 보였다. 이것이 그들이 마땅히 생각했어야 될 “그 이상으로 자신들을 높이 생각했다.”(롬 12:3)는 것을 말해 준다.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상향적인 성향의 이런 자아상의 자만, 오만, 변질이 인간의 원죄의 원인이었다.

  • 인간의 하향성 자아상

인간의 자아상 변질의 또 다른 하나는 죄를 저지른 후 이번에는 하향성의 자아상의 변질이 생겼다. 아담과 하와는 이제 그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창 3:7) 이같이 그들 자신 벗었음을 알았다는 것은 그들이 이제 부끄러움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들이 잘못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들의 자아상이 급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찾으셨을 때 아담의 부끄러움이 이제 공포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아담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한 그는 문제의 본질을 호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죄를 지었으므로 두려워하나이다.” 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벌거벗었기에 두려워하나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부끄러움이 죄를 감추려는 시도와 짝을 이루게 됨을 볼 수 있다. 오늘날도 인간의 자아상은 이와 똑같은 이중적 변태를 보여준다. 때때로 인간의 자아상은 극도로 높이 솟아 있을 때도(죄 된 자만의 형태) 있고 혹은 극도로 낮은 상태에 있을 때도(수치심이나 무가치함의 감정 형태로) 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첫째, 인간의 타락이후 지금까지 인간은 그 자신에 대해 너무 높은 평가를 하려는 경향을 보여 왔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은 그 자신을 자율적인 존재로 혹은 그 자신을 그 자신에 대한 절대적 법으로 생각하려 한다. 그 결과 하나님과 그의 명령들 앞에 머리를 숙이기를 거절하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로 살기를 원한다. 천성적으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종속감이 없으며 오히려 그들 자신의 업적에 대한 자만과 과장된 자기 존대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자아상의 첫 번째 변질이다.

둘째, 형태의 변질은 역시 타락한 인간에게서 발견되어 진다. 그것은 자아상에 대한 극심한 비하(卑下)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그가 마땅히 이르러야 할 그 단계에 너무나도 못 미친다는 것을 알기에 종종 그 자신을 비하하거나 경멸하며 심지어 그 자신을 미워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상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그 자신을 완전히 쓸모없는 존재로 생각하기도 한다.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 그리고 많은 목회 상담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열등감(劣等感)과 부정적(否定的)인 자아상으로 인해 고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갖도록 의도하셨던 그 자아상의 변질된 형태들이다. 하나님은 인간 창조 시 그들이 극도의 자만과 자기애 그리고 극도로 낮은 자아상의 굴레 속에 영원히 얽매이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2) 새로워진 자아상

이미 살펴보았듯이 구속의 과정을 통해 타락으로 인해 변질되어졌던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점진적으로 갱신되어져 간다. 이 는 또한 이 과정을 통해 변질된 자아상도 새롭게 되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상의 이러한 새로워짐은 두 방향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 하나는 하나님이 그의 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실 때 우리로 하여금 자아상의 첫 번째 변질인 죄 된 자만심(自慢心)을 버리게 하신다. 그리고 우리로 참된 겸손을 배양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이 때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먼저 우리의 장점과 약점에 대한 솔직한 인식을 해야 한다. 로마서 12:3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더 나아가 겸손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빌 2:3)을 포함한다.

이 겸손에는 우리의 모든 은사들과 재능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인식이 포함되며 이로써 자만이 뿌리 채 뽑히게 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7에서 이를 매우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또 고린도후서 3:5에서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 하고 있다. 겸손은 또 우리의 은사(恩賜)들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기꺼이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구속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이미 살펴본 두 번째 형태의 변질 즉 매우 ‘비하된 자아상’이 고쳐 질 수 있는가? 성경이 바르게 이해되어 질 때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그렇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을 바라볼 때 시야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워지는 자아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계속되는 죄악과 부정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그들은 긍정적인 자아상 보다는 더 많은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류의 부정적인 자아상과 성경적인 기독교를 연결 짓는 일은 매우 심각한 잘못이다. 크리스천의 믿음이 하나의 총체적 의미에서 이해 될 때 그 믿음이 긍정적 자아상의 무한한 원천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긍정적 자아상은 구속과정을 통해 일어나게 되는 건전하고도 유익한 결과 중의 하나이며 ‘하나님의 형상’이 새롭게 되는 한 측면이기도 하다. 긍정적 자아에 대한 성경의 원천들을 다루어 나가며 간략하게나마 칭의와 성화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자.

칭의(稱義)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와 의로움을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의(義)를 전가(轉嫁)하시는 행위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모든 죄를 완전히 용서하신다는 뜻이다. 성경은 죄를 매우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성경은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단순히 타인에게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해 죄를 지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단순히 죄의 용서와 죄 의식(罪意識)으로부터가 아니라 그 죄 자체로부터 구원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예비하셨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사(벧전2:24)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당하셨기에(롬 3:24,25, 고후5:21, 히 9:12,22, 0:14, 롬 8:2) 하나님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보실 때 더 이상 우리의 죄와 죄악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의로움을 보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용서의 이러한 놀라운 진리가 긍정적인 크리스천 자아상의 기초인 것이다.

성화는 성령께서 점진적으로 믿는 자들을 죄의 오염에서 구원해 그를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러한 정의로부터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들로 인해 믿는 자는 더 이상 회심 이전의 그와 같은 그가 아니라 더 나은 변화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변화가 크리스천이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져야만 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다음의 세 개의 성경적 개념들 ‘옛 사람과 새 사람’, ‘성령 안에서의 삶’, ‘새로운 피조물’은 그리스도인의 이런 변화된 삶 즉 ‘자아상의 새로워짐’을 증거 해 주고 있다.

  • ‘옛 사람 대(對) 새 사람’

많은 성도들이 신자란 ‘옛 자아’(혹은 ‘옛 사람’)인 동시에 ‘새 자아’(혹은 ‘새 사람’)라고 생각한다. 신자라도 회심 전에는 옛 사람일 뿐이었다. 회심과 함께 새 사람이 되었으되 옛 사람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옛 사람을 ‘벗어 버리는 일’과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일생 계속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성도의 존재의 이러한 두 가지 측면들 사이에는 상존하는 갈등이 있게 된다. 이에 대해 죤 머레이 교수(John Murray)는 이렇게 적절하게 설명했다.          

“‘옛 사람’은 중생하지 못한 자요 ‘새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에 이르도록 새로이 지음 받은 중생한 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을 ‘새 사람’과 ‘옛 사람’이라고 구별하는 것이 ‘중생한 자’와 ‘중생하지 못한 자’로 구별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결정적으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지금 막 ‘새 사람’을 입은 자로 –그러나 그 ‘새 사람’이 여전히 점차적으로 갱신되어가야 할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같은 구원의 역사를 토대로 할 때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은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일 수밖에 없다.

  • ‘성령 안에서의 삶’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을 대비하면서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속하였다.”(롬 8:9)고 했다. 우리는 바울이 ‘육신’(肉身)과 ‘영’(靈)이라는 말을 무슨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구절에서 ‘영’은 성령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울에게 있어 ‘육신’은 육체(body)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마음을 포함한 사람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려는 인간 속에 있는 타락한 성향(性向)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육신’은 ‘내재하는 죄‘와 대략 일치하는 개념이다. 이처럼 분명히 신자들은 종말론적 완성 이전의 세상에서는 ‘내재하는 죄’ 혹은 ‘육신‘과 싸워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육신’에 속한(즉 육신에 노예 된) 자들이 아니라 ‘영’에 속한(즉 성령의 자유하게 하시는 제도 아래 있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도는 ‘육신’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며 억압당하는 대신 이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에 이르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 그러기에 여기서 다시 한 번 성도의 긍정적인 자아상이 부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을 부분적으로는 ‘육신’에 속한 자요 동시에 부분적으로 ‘영’에 속한 자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영’에 속한 자로서 육신의 노예 된 데서부터 구출되고 있는 자로 자신을 생각해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6에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바울은 여기서 성도의 삶을 ‘성령’과 ‘육체’ 사이에 끊임없는 싸움을 동반하는 삶으로 묘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바울이 여기서 성도의 이 영적 싸움에서 육신에게 질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구절이 지닌 분위기는 격려의 어조이다.

“너희는 계속적으로 성령을 따라 행하거나 산다면 육체의 악한 욕망과 정욕들을 계속해서 충족시켜 나가지 않게 될 것이다. 만약 너희가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패배를 생각지 말고 승리의 확신을 갖고 죄에 대항하여 싸우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성도의 자아상이 마땅히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 ‘새로운 피조물’

고린도후서 5:17은 이를 잘 묘사 해 주고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기서 ‘피조물’(크티시스)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창조’(創造)라는 뜻을 지닌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일원이요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시대에 속한 자들이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이제 더 이상 죄에 예속된 옛 시대에 속한 자들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시작된 구원, 희락, 평강의 새로운 시대에 속한 자들이다. 그러한 새로운 창조에 속한 자로서 신자는 매우 실제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이란 개념이 단지 다가올 미래적 적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린도후서 5:17은 현재시제로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향해 “너희는 지금 새로운 피조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완전하게 완성된 새로운 피조물이란 뜻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의미에서이다. 성도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더 이상 타락하여 도울 길이 없는 죄의 노예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지음을 받은 자로 우리 자신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성도의 삶은 단지 그리스도에 대한 그 무엇인가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히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무엇인가를 믿어야 함을 포함한다. 우리는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의 새로운 창조의 일원임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성경이 말해 주는 바로 그대로의 우리들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자는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자아를 가질 수 있다는 또한 마땅히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성도의 자아상이 바르게 이해 될 때 그 자아상은 영적 자만과 낙심에 대해 정반대에 서게 된다. 그것은 나를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자랑으로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의 자아상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하나님을 위한 삶, 다른 사람을 위한 삶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존하고 개발하는 삶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를 우리 자신들의 바깥으로 인도한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우리를 구해내어 자유롭게 함으로써 우리가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므로 성도로서의 우리의 자아상은 정적(靜的)이 아니라 동적(動的)이어야 한다. 성도는 결코 구원받은 그 자신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성도의 완성의 목표를 향해 항상 경주해 나아가야 한다. 성도는 자신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점진적으로 새로워지고 있는 새로운 사람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제7장 죄의 기원

– The Origin of Sin –

죄의 기원의 문제는 중요한 논제이다. 인간은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죄로 인해 그 형상이 변질되었고 이에 대한 질문들이 생겨났다. 죄가 어디서 왔는가? 하나님이 인간을 죄 있는 존재로 지으셨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창조 이후 인간은 죄를 범했는가? 만약 그가 죄인이 되었다면 어떻게 해서 그가 죄인이 되었는가? 등등이다.

(1) 아담은 실제로 역사적인 인물이었는가?            

칼 바르트, 에밀 부른너, H.M. 카이터 등의 신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창세기 3장의 인간 타락의 이야기는 비(非) 역사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저자(안토니 후크마)는 실제적 인물이었던 아담을 부인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아담이 역사적 인물이었다는 성경의 예로써 역대상 1장, 누가복음 3장의 아담의 계보,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이혼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대답하신 마가복음 10장,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 2:14에 아담 이후에 하와를 지었다는 시간적인 순서에 대한 언급이다.

그리고 로마서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의인이 되니라.”에서 ‘한 사람’은 역사적 인물을 나타내므로 아담의 역사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벌스티그(J.P. Versteeg, 1938-1987)는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에 구속적-역사적 상호관계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그 가운데 위치를 점하고 있는 구조의 틀을 결정짓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2)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언약은 ‘행위언약’이었는가?

이에 대한 전통적 개혁주의 개념은 아담은 ‘행위언약’의 머리였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헤르만 바빙크인데 그는 “행위언약의 조건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고 그 형벌은 육체적 영적 그리고 영원한 죽음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4가지를 들어 이의를 제기한다.

  •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약속은 은혜의 선물로 이해해야 한다.
  • 성경은 하나님의 이 약속을 언약이라 말하지 않는다.
  • 언약의 서약이나 언약의 의식(儀式)을 나타내는 어떤 표시가 없다.
  • 성경에 나타난 언약이란 단어는 언제나 구속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고로 언약이란 단어를 인간의 타락 이전에 하나님이 인간 피조물과 세우신 협정에 적용한다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3) 천사들의 타락과 인간의 죄            

죄는 인간의 타락(墮落) 이전에 천사들의 타락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뱀’이라 불리는 피조물에 의해 유혹을 받았고(창 3:1), 그 뱀이 사탄의 도구였기에 우리는 죄가 인간 세상 속에 들어오기 전에 천사들 세계에 있었다. 죄의 뿌리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에 이르게 된 교만이었다. 교만이 사탄과 그의 천사들의 죄의 뿌리였으며(딤전 3:6) 죄는 영들의 세계에서 시작되어 스스로 타락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는 죄의 유혹이 외부로부터 왔고 뱀을 통해 마귀는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호소했다. 이 사실은 인간의 죄와 천사들의 죄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4) 하와를 유혹한 말하는 뱀이 있었는가?

개혁주의 전통의 몇몇 신학자들은 창세기 3장을 역사성은 인정하지만 뱀은 상징적 혹은 비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 타락의 세부적인 내용까지 다 비문자적 혹은 상징적으로 이해하기보다 문자적으로 이해되어 져야 할 것을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창세기 3:1에서 뱀은 ‘창조하신 짐승 중 하나이며 가장 간교함’을 제시해 준다. 또한 뱀은 마귀의 악한 힘을 통해 하와와의 대화에서 하나님과 상충되는 말을 했다. 그러므로 사탄의 도구였던 실제의 뱀으로 이해해야 한다. 뱀을 통해서 사탄이 하와의 마음속에 의심, 분노, 불신, 교만을 불러일으켰고 악한 욕망이 일어나 불순종을 하게 되었다.

(5) ‘죄의 시작’은 수수께끼

어떻게 하와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처음 솟아올라 왔는지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어떻게 죄 없는 상태 즉 순결의 상태로 피조 된 인간이 죄를 짓게 되었는지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죄의 실존을 부인할 수 없다. 죄는 상상이 아니라 실존이다.

이 같이 하나님이 인간 타락의 원인은 아니셨으나 허락은 하셨다. 어거스틴도 “그(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행해진 일이라 할지라도 그(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님은 인간타락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뜻 밖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죄를 면제해 주거나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죄의 시작’은 언제나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제8장 죄의 확산

– The Spread of Sin –

(1) 죄의 첫 결과들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후 나타난 결과는 먼저 수치감 두려움과 함께 책임 회피가 따라왔다. 하나님은 인간 타락에 직접 연루된 당사자들 모두에게 형벌을 내리셨다. 주목해야 할 점은 ‘저주’란 단어가 남자와 여자 자신에게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뱀에게는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창 3:14)라고 하시고 여자의 후손과 뱀 사이의 원수 관계는 미래에도 계속 될 것이라고 하셨다. “너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도 원수가 되게 하리니”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창 3:15) 

여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해산의 고통’과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에게 종속(從屬) 될 위치에 놓이는 것이었다.(창 3:15) 

남자에 대한 심판은 땅이 저주를 받아 ‘고통의 수고를 통해 땅의 소산을 먹게 되고’,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얼굴에 땀이 흘러야 땅의 소산을 먹고’, 마지막에는 ‘육체의 죽음’이었다.(창 3:17-19) 

또한 인간의 삶의 가장 큰 의미가 하나님과의 교제이기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것은 ‘영적 죽음’이었다. 마지막으로 ‘낙원으로 부터의 추방’이었는데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들이 나타난다. 만약 타락한 인간이 계속해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었다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죄악 된 몸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2) 죄의 보편성              

인간의 타락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가인의 살인 이후 죄가 온 세상에 퍼져나가 하나님의 공의(公義)의 홍수 심판이 불가피 했다. 이 같이 인간 타락의 결과로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이 지구에 살았던 어느 누구도 죄에서 제외된 자는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반항의 의미로 죄의 보편성을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 3:23)고 했으며 불신자들과 신자들도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인 상태로 인간 타락의 결과로 죄는 보편화 되어버렸다. 이점에 대한 사도 요한의 말은 수정처럼 맑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중략)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3) 원죄(原罪)

원죄(原罪, original sin)는 모든 인간은 죄의 상태와 조건 속에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고 자범죄(自犯罪, actual sin)는 인간들의 행위, 말, 생각 등의 죄라는 말이다. ‘원죄’의 기원(起源)은 인류의 기원으로 올라가며 그 죄는 자범죄의 원천이 된다.

이런 인간의 원죄를 부인하는 학자들로는 칼 바르트, 벌카워, 에밀 부른너, 불트만, 니버, 로마 가톨릭 신학자 배네스테와 바우만 등으로 이들은 원죄를 부인하기 때문에 당연히 인간 타락의 역사성도 부인한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신학의 원죄론은 인간 타락이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데 근거하며 그 세부적 내용은 문자적 이해로 이러한 해석의 기초를 신약성경 특히 바울의 서신들에 두고 있다.

또한 원죄는 죄책(罪責)과 오염을 포함하는데 죄책은 사법적(司法的) 개념으로 특별히 하나님의 법을 가리킨다. 죄책은 하나님의 법이 어겨졌기에 저주를 받아 마땅한 상태요 형벌을 받아야 하는 상태를 말한다.

원죄의 또 다른 양상은 오염(汚染)이다. 이는 도덕적 개념으로 죄책과 구별된다. 다시 원(原) 오염은 두 가지로 구분 되는데 첫째는 철저한 부패로서 인간 본성의 모든 부분 이성(理性)과 의지(意志)에까지 원죄의 부패가 확산이 되었으며 그 결과 본성상 인간의 마음에는 삶의 동기를 부여하는 원리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영적 무능력(無能力)으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이 죽어 있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4) 죄의 전가(轉嫁)

아담의 죄와 우리 자신의 죄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도 없다는 대표적 옹호자는 펠라기우스(Pelagius, 360?-420)로 아담은 중립의 상태로 창조되었고 오늘날 인간도 이와 같은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교회는 이것을 단호히 이단으로 거부했다.

< 원죄에 대한 펠라기우스의 주장 >

  • 아담의 죄와 그 후손들의 죄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 연관성이 없다.
  • 아담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립의 상태로 창조되었다.
  • 오늘날의 인간도 이 같은 상태에서 태어난다.(따라서 옳은 일을 행할 능력이 있으며 중생은 필요치 않다.)
  • 그러므로 원죄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아담으로부터의 죄책의 전가도 오염의 어떠한 전가도 없다.
  • 단지 죄의 행위가 있으며 이런 행위들은 항상 개인적인 성격을 띤다.
  • 아담은 나쁜 모범을 보였고 후손들은 이를 모방하려는 경향 때문에 죄의 보편성이 드러난다.

< 펠라기우스 주장에 대한 반박 >

  • 펠라기우스의 견해는 성경에 위배된다. 로마서 5:12-21은 분명히 아담과 후손들 간의 죄의 연관성을 말하고 있다.
  • 펠라기우스의 입장은 우리의 경험에 모순된다. 죄는 우리의 본성을 원래의 상태로 버려두지 않으며 즉각적으로 본성에 영향을 미친다.
  • 나쁜 모범이 항상 타락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다. 애굽에서의 요셉이나 느부갓네살 앞에서의 다니엘은 그 반대였다.

< 원죄의 간접전가 주장 >

  • 아담의 죄의 죄책이 부모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부모에게 있는 부패성에 의해)  전가되어 우리 역시 죄 있는 자로 간주된다.

< 원죄의 간접전가 주장에 대한 반박 >

  • 부패성을 근거로 우리가 아담의 죄를 범한 자들로 간주될 수 없다.
  • 아담의 죄책이 우리가 그 가운데 태어난 부패성을 통해서 우리에게 중개되어진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의 죄책은 우리에게 전가시키지 않으시는가?              
  • 로마서 5:12-21 의 말씀도 이러한 내용을 암시하는 부분이 없다.
  • 원래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총체적인 인성을 만드셨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인성은 많은 독립된 개체들로 나뉘어졌다.
  • 아담은 이 인성의 전부를 소유하였으며 때문에 그가 범죄 했을 때 인성의 모든 부분이 죄를 범한 것이다.
  • 우리는 이 총체적 인성의 부분들로서 실제로 아담 안에서 아담과  함께 최초의 죄를 범했다.

< 실재론에 대한 옹호 >

  • 아담의 최초의 죄에 대한 우리들의 개인적인 책임이 명확하지 않다.(히브리서 7:9,10에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났을 때 레위가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으로 아브라함을 통해서 멜기세덱에게 십의 일을 바쳤다고 설명되어       지고 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아담의 허리에 있었던 자들로서 아담 안에서       죄를 범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 왜 아담의 최초의 죄의 죄책에만 연루되고 아담 혹은 조상들의 죄의     죄책과는 연루되지 않는가? 아담은 그가 첫 범죄 했을 때 공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후의 아담이나 조상과는 입장이 다르다. 그는 우리의 머리로서 행동했다고 말할 수 있다.

로마서 5:12-21에 나타나는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에서의 유추가 실재론적인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총체적 인성이 없음에도 불구 아담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논의의 출발 선상에서 이미 중요한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무조건 둘을 비교 유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허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허리’에 있었던 자들이다. 그러나 아담에서 그리스도로 옮겨가면서 그의 의(義)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하나님이 이제 우리를 마치 죄를 결코 범하지 않았던 자로 그리스도처럼 마치 우리도 온전히 복종했던 자들로 취급하신다.

< 직접전가(즉각 전가) >

  • 아담은 자연적이고 육체적으로 우리의 머리(조상)인 동시에 우리의 대표자로서 죄를 범했다.
  • 따라서 우리 모두가 그 죄의 죄책에 연루되었으며 하나님은 아담의 죄책을 우리에게 전가하신다.(죄책의 직접전가)
  • 간접전가와는 달리 우리의 타고난 부패성에 의해 죄책이 중개되는 것이 아니다.
  • 부패성(타락)은 부모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가되어 진다.(부패성의 간접전가)

< 직접전가 갖는 난점에 대한 대안 >

  • 하나님께서 우리가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한 죄책을 우리에게 전가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성경은 자녀들과 아버지의 죄를 구분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신 24:16, 렘 31:29,30, 겔 18:20)

실재론의 대답이 필요하며 직접전가와 실재론이 합쳐져야 한다. 로마서 5:12-21에 대한 해석은 이렇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는 원죄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비교 유추하여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인들로 간주되어 진다’고 이해해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 아담이 범죄 했을 때 그는 우리의 머리요 대표자였기에 그의 죄책이 우리의 셈에 계산되어졌다.(직접전가)
  •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우리는 아담 안에 있었기에 우리는 그의 죄에 연루되었고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실재론)
  • 그러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원죄와 사망이 아니고 (단지 배경일 뿐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생과 화목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제9장 죄의 본질(本質)

– The Nature of Sin –

(1) 죄의 본질적 특성

  • 죄는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독일 루터파 신학자 플래시어스(Matthias Illyricus Flacius, 1520-1575)는 주장하기를 죄는 단지 인간 상태에 일어난 우발적 사건 즉 인간 본질의 왜곡된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는 인간의 본질과 본체라고 했다.(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죄인을 창조하셨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주장에 대해 어거스틴 이래의 전통적인 신학자들은 죄가 선한 것 안에 생긴 하나의 결함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리고 죄가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간의 모습과 인성을 입으시고도 죄가 없으셨음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 것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와 함께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 후에 온 것이다.

  • 죄는 항상 하나님과 그의 뜻에 연관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단지 인간 본성의 한 측면이라 할 수 있는 불완전성으로 간주한다. “누구도 완전하지 않아!” “누구나 실수를 하게 마련이야!” 등의 표현은 사람들의 이런 의식구조를 반영해 준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죄는 언제나 한 인간이 전 인격적으로 범하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범법 행위라고 주장해야 한다.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미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율법의 빛과 복음의 빛 아래서 조명될 때에 가능하다. 복음은 우리 죄의 엄청남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죄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전파함으로 우리를 회개의 길로 부르는 것이다.

  • 성경이 말하는 죄는 ‘인간의 마음’ 속에 그 근원이 있다. 

어거스틴은 죄가 인간의 의지(意志) 속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인간의 의지 그 자체가 죄의 첫 원인이다. 그렇지 않다면 죄의 첫 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지는 단지 어떤 결정을 내릴 때의 전 인격을 달리 표현한 말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표현대로 죄는 ‘인간의 마음’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죄는 육체 안이나 인간의 여러 가지 역량 중 어느 한곳에 그 근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가장 중심적인 곳 곧 ‘그의 마음’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 죄는 행실뿐 아니라 죄 된 생각도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인간 사회에서는 인간이 나쁜 생각을 했다는 자체만으로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죄 된 생각도 언어나 행동처럼 죄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또한 예수께서 음탕한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그 자체가 죄라고 단언하셨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7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나니”라고 죄는 행위뿐 아니라 ‘죄 된 욕망’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 죄는 죄책과 오염을 포함한다. 

실질적인 죄는 원죄(原罪)와 관련된 죄의 오염(汚染)에서 샘솟는 듯 할뿐 아니라 그 오염을 더욱 악화 시킨다. 죄 된 행실은 종종 그 죄 된 버릇으로 이어지고 죄 된 버릇은 궁극적으로 죄 된 부류의 삶을 가져오게 된다.

  • 죄의 뿌리의 형태는 교만이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죄의 원천이 교만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왜냐하면 ‘교만은 죄의 시초’(전 10:13)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만은 자기에 대한 부당한 찬사(讚辭)의 갈망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이 부당한 찬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의 최종목적으로 삼지 않고 자기 자신을 최종목적으로 삼을 때 추구하는 것이다.” 죄는 기본적으로 자기 본위의 이기적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일이 되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자신의 뜻으로 무엇을 하고자 함을 말한다.

  • 죄는 일반적으로 가면(假面)을 쓰고 있다. 

죄는 항상 그럴듯한 이유로 저질러지고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한다. 타락한 인간은 남들의 죄는 밝히 보면서 자신의 죄는 매우 희미하게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또한 우리는 다윗이 나단 선지자에게 자기의 죄를 숨기고 있었듯이 종종 죄를 숨기려 한다.

(2) 성경 상에 나타난 죄라는 단어          

성경에 죄의 개념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죄의 본질에 대해서 중요한 사실들을 배울 수 있다. 부정(否定, 아원), 권위에 대한 반항(反抗, 페솨), 사악(邪惡, 레솨), 배반행위 또는 위법행위(마알), 우상숭배 등이다. 죄라는 개념을 표현하는 이 같은 단어들 중 구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핱타트’로 기본적 의미는 ‘표적에서 빗나감’이다. 모든 잘못된 행위들은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에 미치지 못함을 나타낸다. 이 용어가 말하는 바는 죄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에 의해 성취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죄의 여러 형태들

죄의 분류법 중 기독교 수도원제도의 초기시대의 전통적 일곱 가지 죄는 다음과 같다. 자만(교만), 탐욕, 향락(과도한 성적 욕구), 시기, 탐식(술에 취는 것 포함), 분노, 나태이다. 이와 달리 죄의 분류방법은 다음과 같다.

  • 하나님에 대해 이웃에 대해 혹은 자신에 대해 짓는 죄
  • 생각으로 짓는 죄, 말로 짓는 죄, 행실로 짓는 죄
  •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뿌리박고 있는 죄(요일 2:16)
  • 연약의 죄, 무지의 죄, 악의의 죄
  • 모르고 짓는 죄, 알고 짓는 죄
  • 숨겨진 죄, 드러난 죄
  • 개인적인 죄, 집단적인 죄

(4) 죄의 경중(輕重)

로마 가톨릭은 ‘치명적인 죄’와 ‘가벼운 죄’로 구분하나 성경은 죄의 구분을 부인하며 칼빈도 죄는 마땅히 정죄함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모든 죄는 치명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죄의 심각성에는 차이가 있다.

  • 육체의 죄에 대한 영의 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구별
  • 죄인이 갖고 있는 지식 정도에 근거를 둔 구분
  • 죄와 관련된 의지의 정도 차이에 의한 구별
  • 죄에 대해 얼마만큼 굴복하고 있는가에 의해 내려지는 구별

루이스 벌코프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죄의 등급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죄의 사악성(邪惡性)을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고의적(故意的)으로 계획 된 죄는 무지(無知)나 사물에 대한 오해나 약한 성품의 결과로 짓는 죄보다 훨씬 크고 중하다. 그러나 후자도 실제적인 죄이며 그런 죄를 짓는 자들도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으로 나타난다.”

(5)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웹스터 사전은 신(神)에 대한 모독(冒瀆)을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경멸 혹은 경외하지 않는 행위’라고 풀이하고 있다. 마가복음 3:28-30은 어떤 모독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했다. 히브리서 6:4-6에 언급된 사람들은 구원의 진리에 대한 얼마만큼의 지도를 받았고 이러한 가르침을 받은 후에 그리고 어떤 특별한 종류의 종교적 체험을 한 후에 타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회개의 단계로 되돌아 올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한 다섯 가지 항목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의심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이 죄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룩한 것들을 희롱하는 일들을 포함하여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알려진 진리를 의도적으로 배척(排斥)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 이 죄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와 성령의 사역과 구원의 진리들이 얼마간 조명하심이 계시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이 죄는 구원의 진리에 사전 지식이 없는 자들에 의해 저질러질 수가 없다.
  • 이 죄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의도적으로 거부함을 말한다. 칼빈은 ‘알면서 의도적으로 우리 안의 성령을 소멸하는 일’, ‘고의적으로 악한 마음으로 빛을 끄고 어둠으로 만드는 일’, ‘구원의 약을 치명적인 극약으로 바꾸는 일’이라고 했다.
  • 이 죄는 회개의 기회를 배척하기에 용서받을 수 없다. “이 죄는 그 본질상 용서를 불가능케 한다. 마지막 유일한 불빛을 의도적으로 껐기 때문이다.”(R. Laird Harris)
  • 이런 죄를 혹시 저지른 것이 아닌가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런 두려움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의 마음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10 죄의 억제(抑制)

– The Restraint of Sin –

사람들이 한때는 인간의 본성을 낙관적으로 보고 인간 본성은 기본적으로 선하며 적절한 훈련과 교육으로 인간은 고상하고 사심 없는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세기 초반 많은 자유주의신학자들이 이 견해를 가르쳐 왔지만 그 후 라우센 부쉬, 칼 바르트, 라인홀드 니버 등의 학자들에 의해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성이 있고 자기중심적’이라는 훨씬 현실적인 인간관을 주장했다.

성경말씀과 인간적 고찰에 비추어 볼 때 타락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본위(自己本位) 즉 이기적(利己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비(非) 이기적 삶을 살 수 있게 되기에 앞서 변화된 삶의 헌신과 새로운 중심의 충성을 갖기 위해 중생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도가 아닌 사람들에게서도 간혹 선함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다. 어거스틴은 그런 인간의 덕행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애(自己愛)와 인간의 자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덕행을 ‘화려한 악’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타락하고 죄 된 세상에서 발견되는 진리, 선함, 아름다움, 문명, 질서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은 인간의 타고난 능력에 기인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 즉 타락한 인간 속에 비록 인간의 죄성이 있다 하더라도 죄를 억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칼빈은 이런 인간의 덕행이 인간을 새롭게 하지는 못하나 죄를 억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보았고 후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를 하나님의 ‘일반은총’(common grace)이라 했다.

(1) 하나님의 일반은총            

칼빈은 “본성의 타락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의 섭리로 본성의 강퍅함을 제어하사 그 것이 행위로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신다. 그러나 그 본성의 악함은 내적으로 깨끗케 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하며 ‘일반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설명했는데 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불신자들도 그들 속에 반짝이는 진리의 빛을 갖고 있으며,
  • 그들도 하나님의 위대한 은총들로 옷 입혀져 있으며,
  •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오며,
  • 그러기에 그 진리가 비신자들에 의해서 표현될 때도 그 진리를 거부하고 경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모욕하는 것이다.

칼빈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총이 있어 비록 인간의 죄성을 제하지는 않지만 인간 삶에서 죄의 출현을 억제하며 불신자들로 하여금 많은 진리를 발하도록 하시며 많은 좋은 문화적 소산들을 사출케 하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런 ‘일반은총론’이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 아브라함 카이퍼 등에 의해 주창되고 발전되어 왔지만 모든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일반은총’에 대해 사상을 같이 하지는 않았다. 1940-1943년 화란에서 열렸던 개혁교단(Gereformeerde Kerken) 총회는 ‘일반은총’에 대해 다음과 같은 4개 조항의 선언문을 채택했다.

  • 인간의 죄성에 대한 그의 진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오래 참으시는 중에 이 타락한 세상에 대해 인내하시며 모든 인간에게 선을 베푸신다.
  • 하나님은 인간 속에 작은 잔재의 창조의 선물들과 비록 구원에는 불충분한 빛이지만 어떤 자연의 빛을 남아있게 하셨다.
  • 이 잔재와 축복들이 일시적이나마 죄를 억제케 하며 그로 인해 본래의 창조 시에 주어졌던 가능성들이 이 죄된 세상에서나마 여전히발전할 수 있다.
  •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선인들에게 황송한 인자(일반은총)를 베푸신다. 그러나 이것은 성부에 의해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자들에게 나타나는 구원 은혜와는 반드시 다르게 구분되어야 한다.

(2) 일반은총의 성경적 근거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의 삶에도 죄를 억제하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저자는 그렇다고 믿는다. 창세기 20:6(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 그리고 아비멜렉의 이야기)에 가나안 사람 아비멜렉은 분명히 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제어하사 사라에게 죄를 범치 못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중략)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4-28)

이 구절에서 바울은 세 번 씩이나 ‘그들을 내어 버리사’ 혹은 ‘그들을 내어 버려두사’라는 의미의 ‘파레도겐’의 과거형을 사용하고 있다. ‘파라디도미’란 동사의 과거시제는 시간상으로 이러한 사람들의 삶에서 한때 ‘포기’와 ‘체념’이 일어났던 일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포기’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가운데서 죄가 드러나지 못하도록 죄를 억제하셨으며 그러나 어떤 시점에 가서 그 죄의 억제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로마서 13:3,4 : 여기서 바울이 땅의 모든 권세 자들을 하나님의 사자(使者)라고 한 의미는 이런 권세 자들을 통해 죄를 억제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벧전 2:13,14) 여기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징벌하는 것이 비록 불완전하고 때로는 반발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분명히죄를 억제하는 수단이다. 왕에 의해 보냄을 받은 정부의 권세 자들에 의해 시행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권세 자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인간 속에 세움을 받았고 그러기에 그들의 지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죄를 억제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롬 13:1,2) 

데살로니가 후서 2:3,6,7 : 여기서는 주의 재림이 ‘불법의 사람’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하며 이 불법의 사람의 출현을 제지하고 있는 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구절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불법의 사람을 막는 자 혹은 막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제가 이러한 억제력(抑制力) 배후에 있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기에 재삼 언급할 필요가 없다.

(3) 죄를 억제하는 수단들            

하나님은 무슨 방법으로 죄를 억제하시는가? 일반적으로 인간들 자신의 이성과 의지를 통해 사람들은 죄를 억제하며 덕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주장은 너무 개인주의적이고 합리화하기 위해서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기 때문에 결함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이 아닌 자들 가운데서 죄를 억제하시는 하나님의 중요한 수단은 모든 인간의 양심 위에 아로새긴 일반계시(一般啓示)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 속에서 죄를 억제하시는 또 다른 방법은 하나님이 세우신 인간의 정부에 의해서 제정된 법률, 행동강령 그리고 이런 법률들이 시행되도록 하는 강제적인 조치들을 통한 방법들이다.

(4) 일반은총의 가치

일반은총론은 죄의 파괴적 능력을 강조한다. : 이 교리를 긍정하려면 먼저 인간의 타락과 부패를 인정해야 한다. 일반은총론은 중생한 사람들의 재능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임을 인정 한다. 또한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세워질 수 있는 문화와 문명의 가능성을 설명해 준다. 일반은총론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우리가 계속해서 보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죄 억제의 또 다른 길은 ‘특별은총’이다. 그 것은 성경으로 나타난다. 성경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죄의 억제가 일어난다.

< 개혁주의 인간론 개관 도표 >

제11 (全人)

– The Whole Person –

기독교 인간관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인간을 단일체(單一體) 즉 전인(全人, whole person)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은 별개로 분리할 수 있는 ‘여러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어 전체로부터 그 부분만 추출(抽出) 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래서 인간은 ‘몸과 혼’ 혹은 ‘몸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점점 더 인간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잘못된 것이며 인간을 단일체로 보아야 한다는 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의 가르침은 어떤 것인가?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인간을 과학적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은 ‘혼, 영, 마음’과 같은 용어를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확하고도 과학적이며 성경적인 심리학을 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많은 중요한 진리들을 배울 수 있다. 사실 이 책의 앞 단원들에서 우리는 그렇게 해 왔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이 인간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은 불가분(不可分) 하나님과 연관을 맺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에 성경은 또한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에 대해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즉 성경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구성하는 ‘부분들’ 혹은 ‘심리적 구조(構造)’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처해 있는 여러 관계들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1) 삼분론의 주장과 이에 대한 반론          

인간은 특별히 어떤 구별된 ‘부분들’로 이루어졌다는 주장 중 하나가 삼분론(三分論, trichotomy)이다. 이 견해는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몸, 혼, 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삼분론 최초 주장자 중 하나는 이레니우스이다. 그는 불신자들은 단지 ‘혼과 몸’만 갖고 있는 반면 신자들은 이에 덧붙여 성령에 의해서 창조된 ‘영혼’을 갖게 된다고 가르쳤다.

삼분론과 관계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또 다른 사람은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s of Laodicea, 310-390)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인간은 ‘몸, 혼, 영’(정신, 프뉴마, 노우스)으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취하셨던 인성 중 로고스 혹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간 영혼을 대신 하셨다는 견해가 그에게서 기인된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벌카워는 아폴리나리우스가 최초로 삼분론의 의미로 그의 잘못된 기독론을 전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켈리(J.N.D. Kelly)는 아폴리나리우스가 이분론자냐 삼분론자냐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삼분론은 19 세기에 델리취(Franz Delitzsch), 허드(J.B. Heard), 벡(J.T. Beck), 오힐러(G.F. Oehler) 등에 의해 가르쳐졌다. 보다 최근에 와서는 웟치만 니(Watchman Nee), 솔로몬(Charles Solimon, 그는 인간은 몸을 통해서는 환경과, 혼을 통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영혼을 통해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고 말한다.), 고타드(Bill Gothard) 같은 저술가들에 의해서 옹호되어 왔다. 삼분론은 또한 ‘스코필드 주석성경’ 구판과 신판 모두에서 옹호되고 있다. 이런 다수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 본성에 대한 삼분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첫째, 인간을 셋으로 쪼개는 삼분론은 인간의 단일성(單一性)에 위반되기 때문이다. 삼분론 자들 주장은 두 개의 헬라어 즉 ‘삼중의’란 의미의 ‘트리카’라는 말과 ‘다르다’는 의미의 ‘템네인’이라는 말을 근거하고 있다.

둘째, 삼분론은 종종 영혼과 육체 사이에 화해될 수 없는 대립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분론은 헬라 철학 특히 인간 본성에 대해 삼분론을 주장한 플라톤의 견해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과 육체 사이의 어떤 대립(對立)도 가르치지 않는다. 물질은 악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성경은 결코 인간의 육체를 필요악의 원천으로 보지 않으며 도리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국면으로 기술하고 있다. 헬라인에게 육체는 임종 시 기쁨으로 포기하는 ‘영혼의 무덤’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성경과는 완전히 부적합한 것이다.

셋째, 삼분론은 분명한 성경적 근거도 없이 ‘영’과 ‘혼’을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혼’과 ‘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들이 성경 가운데서 종종 교호적(交互的)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될 때 분명해진다.              68

  • 인간이 ‘몸과 혼’ 또는 ‘몸과 영’으로 묘사되고 있다.(고전 7:34, 약 2:26)
  • 슬픔은 영뿐만 아니라 혼에도 속하는 감정이다.(삼상 1:10, 시 54:6, 요 12:27, 요 13:21, 행 17:16, 벧후 2:8)
  • ‘혼과 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랑한다.(눅 1:46,47, 막 12:30)
  • 구원은 혼과 영 모두에 관계된다.(약 1:21, 고전 5:5)
  • 죽음을 혼이나 영이 떠나가는 것으로 기술했다.(창 35:18, 왕상 17:21, 마 10:28, 시 31:5, 마 27:50, 눅 9:55, 눅 23:46, 행 7:59)
  • 죽은 자들이 ‘혼’ 또는 ‘영’으로 언급된다.(마 10:28, 벧전 3:18-20)

삼분론 자들은 그들의 견해를 입증하고자 히브리서 4:12과 데살로니가전서 5:23을 말하는 데 이 두 구절의 어느 것으로도 삼분론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이 구절에서 히브리서 저자의 기술 의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몸의 관절과 뼈 속에 있는 골수 사이에 어떤 구분을 짓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즉 인간을 ‘혼’이라 불리는 인간 본성의 한 부분과 ‘영’이라 불리는 인간의 다른 한 부분으로 구분 짓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언어들은 비유적인 언어다. 바로 다음의 말이 저자의 의도를 나타내 주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監察)한다고 말하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성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든)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가 우리 행위의 은밀한 동기들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사실 이 구절은 많은 점에서 바울의 다른 한 본문과 유사하다.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고전 4:5)  그러므로 히브리서 4:12을 인간의 두 개의 구성요소로서의 ‘혼과 영’ 사이에 심리학적인 차이점을 가르치는 것으로 우리가 이해할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다른 한 구절인 데살로니가전서 5:23은 이렇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이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먼저 이 구절이 교리상의 진술이 아니라 하나의 기도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그의 데살로니가 독자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완전히 성화되고 온전히 하나님에 의해 보존되며 지켜지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기도되고 있는 성화의 총체성이 본문 중에서 두 개의 헬라어 단어로 표현되고 있다. 첫 번째 단어는 ‘홀로텔레이스’로 ‘전체의…’란 의미의 ‘홀로스’와 마지막 혹은 목표란 의미의 ‘텔로스’로부터 파생되었으며 이 들이 합쳐져서 ‘모든 부분에 있어서 완전한’이란 의미를 갖는다. 또 데살로니가전서 5:23의 하 반절에서 형용사 ‘홀로크레론’과 동사 ‘테레데이에’(보전되기를 원하노라)는 둘 다 단수형이므로 본문의 강조점이 전인(全人)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눅 10:27)고 말씀하실 때 사람을 ‘마음, 목숨, 힘, 뜻’ 넷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전인(全人)을 의미하셨던 것처럼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 그들의 ‘영과 혼과 몸’이 온전히 보전되기를 기도할 때 바울도 분명히 사람을 셋으로 나누어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 역시 인간 구조에 대한 삼분론의 견해에 어떤 근거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바빙크, 벌콥, 벌카우어, 브루스, 델리취 책 참조)

(2) 이분론의 주장과 이에 대한 반론

인간 구조에 대한 또 다른 주장은 이분론(二分論, diachotomy)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몸과 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 견해는 삼분론 보다 훨씬 더 많은 신학자들이 긍정하고 있다. 벌코프는 “성경에 나타난 인간 본성에 대한 주요한 진술은 분명히 이원론적이다.”라고 믿고 있다.(스트롱, 멀러, 헨리 디이슨, 골든 클락 책 참조)

그러나 저자(안토니 후크마)는 삼분론 뿐 아니라 이분론도 거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신자로서 고대 헬라인들이 가르쳤던 의미의 이분론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예로서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두 개의 구별된 본체 즉 신적 기원을 갖는 사고하는 영혼과 그렇지 못한 육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육체는 질료라 불리는 열등한 본체로 구성되어 있기에 영혼보다 저급한 가치를 갖는다.    

그러므로 임종 시 육체는 분해되어 버리고 이성의 영혼은 만약 그 영혼의 행위의 과정이 올바르고 존경을 받을만했다면 ‘하늘’로 되돌아가 영원히 존재한다. 영혼은 본질상 파괴될 수 없으며 보다 우수한 본체로 생각된 반면에 육체는 영혼보다 열등하며 죽게 되어 있으며 완전파멸의 운명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헬라인들의 사고 속에는 육체의 부활의 여지가 전혀 없다.(후크마의 종말론, 벌카우어 책 참조)

이처럼 분명히 성경에 어긋나는 헬라인들의 이분론 이해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이분론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분론은 인간에 대한 성경 견해의 정확한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용어 자체가 부당하다. 이 용어(디코토미)는 두 개의 헬라어 어근 즉 ‘이중의’ 혹은 ‘둘로’라는 의미의 ‘디케’와 ‘자르다’라는 의미의 ‘템네인’으로부터 왔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인간을 ‘두 부분’으로 자를 수(분리할 수) 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현세에서는 인간이 그렇게 둘로 나눠질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하나의 전체’, ‘하나의 완전’, ‘하나의 단일체’로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전인(全人)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성경적 견해를 결정지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인간의 다양한 국면들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되는 용어들을 조사해 보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일에 앞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고찰이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첫째, 이미 말했듯이 성경의 기본적 관심사는 인간에 대한 심리학적 혹은 인류학적인 구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피할 수 없는 관계성이다.

둘째, 우리는 로빈슨(J.A.T. Robinson)이 이런 용어들에 대한 구약의 용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 것을 명심해야 한다. “어느 부분이든지 어느 순간에나 전체를 대표할 수 있다.” 또 신약의 용법에 대해서는 래드(G.E. Ladd)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최근의 학풍은 몸, 혼, 영혼과 같은 인간의 상이하고 분리할 수 있는 기능들이 아니라 전인(全人)을 바라보는 상이한 방법들이라는 점을 인정해 왔다.”

  • 구약의 표현들        

 : 대부분의 경우 ‘혼’(soul)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네페쉬’에 대해 B.D.B. 히브리어 사전은 열 가지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그 중 다음의 것들이 본 논제에 중요한 것들이다. ‘인간의 내적 존재’, ‘살아있는 존재’(인간과 동물 모두에 적용됨), ‘인간 그 자체’(종종 인칭대명사로 총체적 인간을 가리킴), ‘욕망의 자리’, ‘감정의 좌소’ 이 같이 ‘네페쉬’는 전인(全人)을 나타낸다. 야곱(Edmond Jacob)은 말하기를 “네페쉬는 한 인간의 전체 본성 즉 인간이 무엇을 소유하였는지에 대한 지시용어가 아니라 무엇인가에 대한 지시용어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단어의 대한 최상의 번역은 인격(사람)이라 할 수 있다.”

루아 : ‘루아흐’도 일반적으로 ‘영’(spirit)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의 의미는 ‘움직이는 공기, 숨, 호흡’, ‘바람’이다. B.D.B.는 다음과 같이 아홉 가지 의미를 나열하고 있다. ‘영’, ‘생기’, ‘기질’, ‘인간과 짐승의 몸에 거하는 살아서 숨 쉬는 존재의 영’(전 3:21), ‘감정의 자리’, ‘정신상의 행위의 기관’, ‘의지의 기관’ 등이다. ‘루아흐’는 그 의미에 있어서 ‘네페쉬’와 중첩된다.

스테세이(D. Stacey)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비추어 인간에 대한 언급이 있게 될 때는 대부분 ‘루아흐’란 말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사람과 연관되어 인간의 정신상의 용어가 필요한 경우에는 ‘네페쉬’가 사용 되었다. 이 두 경우 모두 전인(全人)이 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처럼 ‘루아흐’를 분리될 수 있는 인간의 한 부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전인(全人)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레브, 레바 : 다음은 보통 ‘마음’이라 번역되는 ‘레브’와 ‘레바브’이다. B.D.B.는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속사람 혹 내적 혼’, ‘정신’, ‘의지의 결정’, ‘양심’, ‘도덕성’, ‘인간 자신’, ‘욕망의 자리’, ‘감정의 자리’, ‘용기의 자리’ 등이다. 마이엔펠트(H. Von Meyenfeldt)는 그의 히브리어 단어연구서에서 ‘레브, 렙바브’는 보통 전인(全人)을 나타내며 종교적 중요성을 가진 단어라고 했다.

이처럼 구약에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생각, 느낌, 의지’의 자리를 나타내는데 사용될 뿐 아니라 ‘죄의 자리’, ‘영적 갱생의 자리’, ‘믿음의 자리’이기도 하다. 구약용어 이외의 경우에는 ‘마음’이란 단어가 그의 존재의 심층에 있는 인간과 그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인간을 상징한다.            

도이벨트(Herman Dooyeweerd)는 “성경에 있어서 마음은 인간 전(全) 존재의 종교적 뿌리이다.”라고 했다. 그가 발전시킨 철학에 따르면 ‘마음’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활동의 중심부요 원천이다. 앤더슨(Ray Anderson)은 마음을 ‘주체적 자아의 중심부’라고 했으며 마음은 참된 질서 가운데 있는 육체와 영혼의 단일체(單一體)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개의 구약용어들은 비록 인간을 조금씩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기는 하나 모두가 인간의 단일성과 전체성에 비추어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로빈슨(H. Wheeler Robinson)은 이렇게 설명했다. “마음을 포함하는 영역들을 정확하게 구분 짓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러한 정확한 구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다.”

바사르 : 끝으로 보통 ‘육체’로 번역되는 ‘바사르’란 단어를 생각하기로 하자. B.D.B.는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육체’(몸 그 자체에 대해서), ‘혈연, 혈족’, ‘하나님 맞은편에 있는 깨어지기 쉽고 죄를 범하게 되어 있는 인간’, ‘인류’ 등이다. 브렛시오티스(N.P. Bratsiotis)는 “바사르는 인간 본성의 외적인 육의 측면을 가리키는 단어로 구약에서 가장 자주 사용된다.”라고 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바사르’가 인간의 외적 측면으로 그리고 ‘네페쉬’가 내적 측면으로 구별되고 이해될 때라도 우리는 결코 이 단어들이 플라톤적 의미의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바사르’와 ‘네페쉬’는 이중적 실체인 인간 존재의 상이한 측면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의 이중적 본성에 대해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둘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것이 인간론의 온전성인 것이다. 그것은 ‘바사르’와 ‘네페쉬’에 대해 대립되는 어떠한 이분론의 견해도 배제하며 이 둘 사이에 상호 유기적인 몸과 마음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Grand Rapids:Eerdmans 1977)

또 종종 ‘바사르’는 연약한 인간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볼프(H.W. Wolff)는 “‘바사르’는 인생을 깨어지기 쉽고 연약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진술하면서 한 예로 예레미야 17:5을 들었다. “사람을 믿으며 육체로 그의 힘을 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때때로 ‘바사르’는 단순히 육체적 측면이 아니라 인성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또 ‘네페쉬’와 함께 사람의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배쓰(Charence B. Bass)는 ‘몸’을 나타내는 구약의 표현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몸과 영혼이 거의 혼용되고 있는데 영혼은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나타내기 위해서, 몸은 유형적인 가시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나타내기 위해서 쓰여진다. (중략) 몸과 영혼의 이러한 단일성이 몇몇 저술가들로 하여금 구약은 육체적인 몸을 하나의 분별 있는 실체로 보는 시각이 결여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중략)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구약은 몸과 영혼을 하나의 단일체(單一體)를 구성키 위한 기능에 있어서 서로에게 스며드는 동등자로 보고 있다.”      

그러기에 종종 ‘바사르’는 구약에서 비록 강조점이 외형적 측면에 있긴 하지만 전인(全人)을 나타내기 위해 쓰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사상 세계는 인간이 두 개의 별개의 본체로 만들어진 것으로 묘사하는 어느 형태의 이분론이나 이원론을 철저히 배격하는 것이다. 로빈슨(H. Wheeler Robinson)이 말하듯이 “4개의 용어(네페쉬, 루아흐, 레브, 바사르)들은 단순히 인격체의 단일성의 상이한 측면들을 보여줄 뿐이라는 사실에 최종적 강조점이 내려져야 한다.(The Christian Doctrine of Man, p.27)

  • 신약의 표현들

프쉬케 : 첫째로 살펴볼 신약 언어는 구약 히브리어 ‘네페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로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혼’으로 번역된다. 안트-깅그리히의 ‘신약헬라어사전’은 이 단어에 대해 많은 의미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중의 얼마는 다음과 같다. ‘생명의 원리’, ‘땅의 삶 그 자체’, ‘인간의 내적 생명의 좌소’(느낌과 감정을 포함하여), ‘땅의 것들을 초월하는 삶의 자리와 중심’, ‘생명을 소유하는 것으로 즉 생명을 가진 피조물’(복수는 인간들) 등이다.          

에드워드 슈바이쳐는 ‘프쉬케’는 종종 복음서에서 한 인간 전체를 나타내기 위해 또는 순전한 육체적 삶과는 구별되는 참된 삶을 묘사하기 위해 또는 죽음을 초월하는 하나님이 주신 존재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또 계속해서 바울이 자연적 삶과 참된 삶을 가리킬 때 즉 인성을 나타내고자 할 때 ‘프쉬케’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에서 ‘프쉬케’는 죽음 뒤의 삶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네페쉬’처럼 ‘프쉬케’도 종종 전인을 상징한다.

프뉴 : 다음으로 히브리어 ‘루아흐’의 헬라어 상당어인 ‘프뉴마’를 생각해 보자. 이 단어는 인간을 가리킬 때에는 거의 대부분 ‘영’으로 번역된다. A-G 사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람의 인성의 한 부분으로서의 영’, ‘한 인간의 자아’, ‘정신의 성향이나 상태’ 등이다.

슈바이쳐는 바울이 인간의 육체적 기능에 대하여 ‘프뉴마’를 사용하며, ‘프뉴마’는 종종 ‘프쉬케’와 같은 의미를 가지며, 이 단어는 전체로서의 인간을 나타냄으로 육체적인 본성보다는 심적 본성에 더 많은 강세가 주어질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의 종말론을 논하면서 래드(George Ladd)는 말하기를 “바울의 사고는 인간의 영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영으로 중생을 경험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했다.

바울은 때때로 ‘프뉴마’와 인간의 외적 측면에 반하는 내적 차원으로서의 몸을 대조시키고 있다.(고후 7:1, 롬 8:10) ‘프뉴마’는 인간의 자기인식 혹은 자아의식을 기술하기도 한다.(고전 2:11) 스테세이(W.D. Stacey)는 바울이 ‘프뉴마’를 오직 중생한 사람만이 갖고 있는 그 무엇으로 보고 있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날 때부터 ‘프뉴마’를 갖게 되나 성도의 ‘프뉴마’는 하나님의 영광의 교제를 통해 새로운 특성과 새로운 품위를 띠게 된다.”(롬 8:10)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프뉴마’가 죽음 이후의 생(生)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히브리서 12:23을 죽은 성도들을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눅 23:46)와 스데반(행 7:59)은 그들이 운명할 때 그들의 ‘영’을 성부 하나님 혹은 성자 하나님께 의탁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을 가리키는 ‘옥에 있는 영들에’ 전파하셨다고 했다.(벧전 3:19) 그러므로 ‘프뉴마’는 거의 ‘프쉬케’와 같은 의미이며 신약에서 종종 이 두 단어는 혼용되고 있다.

카르디 : 다음은 히브리어 ‘레브, 레바브’에 상당하는 헬라어 ‘카르디아’로 보통 ‘마음’으로 번역된다. A-G는 이 단어의 주요 의미로 ‘육체적, 영적, 정신적 생명의 자리’로 말한다. 또 인간의 지정의(知情意)를 포함하는 인간의 모든 내적 삶의 중심과 원천으로 기술되고 있다. 또한 ‘마음’은 성령의 내주하시는 장소라고 표현되고 있다.

벰(Johannes Behm)은 신약에 나타난 ‘마음’이란 표현을 정신적, 영적 삶의 주요기관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입증해 보이시는 인간 속의 자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음’은 인간의 내적 삶의 중심부요, 감정, 이성, 의지의 원천인 것이다. ‘마음’은 인간의 모든 내적 존재 즉 인간의 심층부를 의미하며 자아 즉 인성을 상징한다.        

카르디아는 인간을 향해 하나님이 찾으시는 인간 속의 최고의 중심으로서 그 안에 종교적 삶이 뿌리를 박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결정짓는다. 앞에서 우리는 구약에서 나타나는 ‘레브’가 죄의 자리, 영적 갱생의 자리 그리고 믿음의 자리로서의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았다. ‘카르디아’도 이와 똑같다.

여기에 덧붙여 많은 크리스천의 덕들이 ‘카르디아’에 기인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5과 베드로전서 1:22에 보면 사랑은 마음과 관계를 맺고 있다. 로마서 6:17과 골로새서 3:22에 보면 순종은 마음에 연결되어 있다. 용서가 마태복음 11:29에서 마음과 연관되어져 있다. 마태복음 11:29에 겸손이 마음에 관계되어 있으며, 마태복음 5:8과 야고보서 4:8에 마음이 순결의 자리로 묘사되고 있다. 골로새서 3:16에 감사가 마음에 관계되며, 빌립보서 4:7에는 평강이 마음을 지킨다고 기록되고 있다.

그러기에 여기서 다시 한 번 인간의 전인성에 대한 성경적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카르디아’는 인간의 내적 본질에 있어서의 전인을 상징한다. 믿음의 태도이든, 불신의 태도이든, 순종의 태도이든, 불순종의 태도이든 마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 태도가 결정되는 것이다.              

사륵 : 엄밀히 말해서 비록 구약에는 몸을 나타내는 단어가 없지만 인간의 육체적 측면 즉 인간의 육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바사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신약에는 몸을 나타내는 단어가 두개 있다. ‘사륵스’와 ‘소마’이다. A-G는 보통 육신이라고 번역되는 ‘사륵스’에 그 의미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몸’, ‘인간’, ‘인간 본성’, ‘육체적 한계’, ‘삶의 외적 측면’ 그리고 ‘죄의 의지적 도구’(특별히 바울 서신 중에서)이다. 그런데 신약에 있어서 ‘사륵스’는 두개의 주요한 의미를 갖는다.

  • 인간 존재의 외적이고 육체적인 측면-이런 의미에서 이 단어는 전체로서의 인간
  •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려는 타락한 인간 속에 있는 성향으로서의 육신

바울 서신에 주로 나타나는 두 번째 사륵스의 의미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육신의 죄’만 나타내는 것으로 그 의미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전인에 의해 범해지는 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5:19-21의 ‘육체의 일’은 열다섯 개 중 다섯 개만 ‘육체의 죄’이며 나머지는 ‘영의 죄’라 일컫는 죄들이다. 즉 증오, 분쟁, 시기, 분냄 등등이다. 그러기에 심지어 ‘사륵스’란 단어가 이상의 두 번째 의미에서 사용될 때라도 그것은 전인에 관계된 것이요 단순히 사람의 한 부분에만 관한 것이 아니다.

 : 일반적으로 ‘몸’이라고 번역되는 ‘소마’는 A-G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살아있는 몸’, ‘부활체’, ‘크리스천 공동체 혹은 교회’이다. 배쓰(Clarence B. Bass)도 성경의 몸에 관한 그의 글에서 ‘소마’란 단어의 다섯 가지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 앞의 하나의 실체로서의 전인’, ‘인간속의 영적인 것들의 소재지’, ‘하나님 나라에 백성 될 자로서의 전인’, ‘부활을 위한 매개물’, ‘마지막 심판의 수단이 될 영적인 시험 장소’이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짓는다. “분명히 몸은 전인을 나타낼 때 사용되며 중간 상태(즉 죽음과 부활 사이의 상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육체적 현존 없이 사람이 존재한다는 어떤 형태의 성경적 인간관에도 대치되는 것이다.”

요약 : 인간의 다양한 측면들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된 성경의 표현들에 대한 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본다.        

인간은 단일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육체적인 측면과 정신적 혹은 영적측면을 갖고 있으되 우리는 이 둘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육체를 갖는 영혼’ 혹은 ‘영혼을 갖는” 육체’로 이해되어야 한다.(Barth, Church Dogmatics, III / 2, p.350) 인간은 상이한 부분들의 복합체가 아니라 전체성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하며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분명한 가르침이다.(G.C. Berkouwer, C.A. Van Peursen, H. Ridderbos, W.G. Kummel, Robert Jewett 책 참조)

(3) 영육 통일체

비록 성경이 인간을 전체적인 하나로 보지만 육체와 비(非) 육체인 영(靈) 두 측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 또한 말씀하고 있다. 인간은 몸을 갖고 있으나 동시에 인격체이다. 생각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 또한 몸의 일부인 두뇌를 갖고 있다. 이 마음(생각)이 없는 인간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때때로 수술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상담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두 측면은 고찰될 수 있는 하나의 인성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의 ‘두 측면’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우리는 이미 이분법(dichotomy)의 용어가 갖는 어려움을 논한 바 있다. 어떤 사람은 이원론(dualism)을 주장하고 또 다른 사람은 인간의 단일성을 강조하여 이원체(duality)를 말하기도 한다. 벌카워는 “이원체와 이원론은 전혀 같은 것이 아니며 (중략) 우주적 실존에 있어 이중의 요소가 반드시 이원론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앤더슨(Anderson)도 존재의 ‘이원체’(이 속에서 변이의 양식이 근본적인 단일체로 형성된다.)와 이원론 ‘단일체’에 대해 서로 반대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을 ‘영육 통일체’(靈肉統一體)라고 말하고 있다. 이 표현이 갖는 좋은 점은 인간의 단일성(單一性)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두 측면을 바르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정신과 두뇌 사이에 관계를 고찰해 봄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매카이(Donald M. Mackay)는 인간을 나뉠 수 없는 다시 말해 많은 측면을 갖고 있는 하나의 단일체(單一體)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정신과 두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미심장한 제언을 하고 있다.        

“우리는 무형의 ‘정신’과 유형의 ‘두뇌’를 상호작용하는 두 본체로 보면 안 된다. 또 정신이 하는 일과 두뇌가 하는 일을 두 개의 구별된 일들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정신과 두뇌의 관계를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보다는 한 사건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으로 또한 같은 연속성을 갖는 사건들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고 풍부한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그것들을(나의 의식상의 경험과 나의 두뇌의 기능들) 하나의 신비로운 단일체가 갖는 두 개의 동등한 실체적 국면들로 생각하고 있다. 이를 밖에서 지켜보는 관찰자는 한 측면 즉 두뇌활동의 육체적인 형태만을 보게 될 것이요 본인 자신은 또 다른 측면 즉 그의 의식적인 경험을 인지하게 된다. (중략) 이렇게 우리의 ‘정신’과 ‘두뇌’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 두 측면들이 상호 보완적인 단일체(單一體)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과 ‘실체’는 합일체(合一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창조되었고 또한 그렇게 존재하고 있으며 육체의 부활 뒤에도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온전한 구속의 인간이 란 몸 없이는 완전하지 못하기에 육체의 구속을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롬 8:23, 고전 15:12-57)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영광스러운 미래는 육체의 부활과 정화되고 완성된 새 땅을 포함하는 것이다.

(4) 중간상태

인간의 죽음 후 육체의 부활이 필수적이라면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상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사람은 죽은 후 육체 없이는 완전치 못하기에 부활 때까지 존재를 멈춰버리는가? 그렇지 않고 존재한다면  무의식 상태로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일종의 중간의 몸을 받았다가 후에 부활체로 대체되는가?

인간의 미래에 대한 성경의 중심적 가르침은 육체의 부활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신자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상태는 잠정적인 행복의 상태 즉 현재의 땅의 상태보다는 ‘훨씬 더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빌 1:23) 이는 ‘중간상태’에 있는 신자들이 무존재(無存在) 상태나 무의식(無意識)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신자들이 사후에도 잠정적인 행복의 상태로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라고 이렇게 한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 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니라.”(빌 1:22,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6-8)

빌립보서 1:22,23에서 바울은 ‘몸에 거할 때’와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를 대비함으로 사후 성도는 더 이상 현재의 육체로 살지 않고 떠나 현재보다 더 좋은 상태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바울이 ‘몸 안에 거하는 것’과 ‘몸 밖에 거하는 것’을 대비시키고 있는 고린도후서의 구절은 이점에 있어 더욱 중요하다. 만약 바울이 부활 후의 신자의 축복됨을 기술하려고 했다면 그가 ‘이 몸을 떠나’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신자들이 그 뒤에 ‘새 몸을 입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몸을 떠나’라고 함으로써 그의 독자들에게 현재의 몸과 부활체 사이의 어떤 관계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상의 두 구절에서 바울은 사후 신자들이 더 이상 그들 현재의 육체에 거하지 않고 부활체를 얻기 이전일지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언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성경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도 계속 존재하는 신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혼’(프쉬케)이나 ‘영’(프뉴마)이란 말을 쓰고 있다.

‘혼’이란 단어는 다음 구절들에서 사용되고 있다. “몸은 죽여도 영혼(프쉬케)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마 10:28)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프쉬케)들이 제단 아래 있어”(계 6:9)

‘영’(靈)이란 단어는 다음 구절들에서 사용된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프뉴마)들과”(히 12:22,23) “그(그리스도)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프뉴마)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프뉴마)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벧전 3:18-20)     

신약성경은 이 같이 분명하게 사후(死後) 신자가 죽음과 부활 사이의 잠정적인 행복의 상태로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사후에도 신자들의 ‘혼’ 또는 ‘영’이 중간 상태로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앞서 ‘혼’ 또는 ‘영’을 언급한 신약성경의 구절들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도 육체의 부활을 기다리며 사후에도 인간은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자 할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 중간상태에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론적인 설명을 해주고 있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다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추론하고 그것이 무엇과 같을까를 상상하려고 애쓸 뿐이며 죽음과 부활 사이의 삶에 대해서 어떠한 분명한 영상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벌카워가 말했듯이 중간상태에 관해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는 속삭임일 뿐이다.

비록 인간이 지금은 영육(靈肉)의 통일체로 존재하고 있지만 죽음의 때에는 이 통일체가 일시적으로 분리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고린도후서 5:8에서 바울은 분명히 인간은 그들의 현재의 몸을 떠나 존재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같은 점이 다음의 두 구절에서도 발견된다.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3)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이 본문들은 죽음 후 부활 전에 존재하고 있는 ‘거룩한 자들’(성도들)과 ‘예수 안에서 잠자는 자들’에 관해 말하고 있는데 그리스도 안에 잠자던 자들의 부활이 조금 뒤 데살로니가전서 4:16에 언급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같은 16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표현이 분명히 죽은 신자들이 부활 전에도 여전히 어떤 상태로 분명히 존재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는 영육(靈肉) 통일체로서 하나이다. 부활의 때에 인간은 그러한 통일체로 온전케 회복될 것이요 그렇게 됨으로 다시  한번 완전한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따르면 일시적이지만 죽음과 부활 사이의 ‘때’(시간)에 신자들은 그들의 현재의 몸을 떠나 잠정적인 행복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중간 상태는 미완료의 잠정적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마지막 점검으로서 새로운 육체의 부활과 새 땅을 고대하는 것이다.

< 실제적 제안들 >

본장에서 전개되었듯이 인간을 전인(全人)으로 이해함에는 중요한 실제적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교회는 전인(全人)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말씀의 전파와 가르침에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뿐 아니라 그들의 감정과 의지에도 관심을 기우려야 한다. 단지 하나님과 성경에 관한 지식적인 정보만 전달하는 말씀의 전파로는 부족하다. 듣는 자들이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감화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야 한다. 주일학교의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성경구절과 교리에 대한 기계적인 지식 그 이상의 것을 주어야 한다. 그들의 가르침이 인간의 모든 측면들을 포함하는 반응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성도들을 위한 교회 프로그램이 신체(身體)를 외면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운동과 옥외 활동들도 온전한 크리스천의 삶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전도와 선교사역도 교회는 전인(全人)을 상대로 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교의 주목적이 복음 전파로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지만 교회는 선교의 대상이 영적 필요뿐 아니라 육적 필요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영육의 통일체적 존재라는 사실을 명심하여 선교 사역을 기술할 때 ‘영혼 구원’과 같이 단지 영혼만 구원하면 된다는 듯한 표현은 지양해야 하며 선교는 포괄적이어야 한다. ‘말씀’과 ‘봉사’의 접근 방식은 선교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자를 얻는 일에 관심을 두게 할 뿐 아니라 그들 이웃들의 생활여건을 향상시키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을 위한 학교설립과 일상적인 건강진료와 응급 건강진료를 위한 의료기관과 병원의 유지 등이 교회의 선교활동의 영역 밖이라고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학교가 전인(全人)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학교의 주된 목적이 지적인 교육이긴 하나 교사는 그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이 전인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학교는 정신만을 단련시켜서는 안 되며 정서(情緖)와 의지(意志)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효과적인 교육은 학생들이 배우는 과목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그것 이상을 배우려는 염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학교는 정신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신체에 대한 관심도 나타내야 한다.

셋째, 전인의 개념은 가정생활에도 함축된 의미를 갖는다.

크리스천 부모들은 하나님에 관해 그들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일과 크리스천의 삶으로 그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그리고 그들이 뒤쳐질 때 사랑으로 그들을 훈계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모들은 또한 건전한 식이요법과 적절한 신체 보호와 같은 문제들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교훈뿐만 아니라 삶의 모범을 통해 육체를 위한 관리도 가르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넷째, 전인의 개념은 의학에 대해서도 함축된 의미를 갖는다.

인간이 정신과 육체의 합일체라는 사실을 자각함으로 의학은 최근 ‘포괄적 의학’(holistic medicine)이라는 접근방법을 개발해 왔다. ‘포괄적 의학’은 자신의 건강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강조하며 건강관리를 제공함에 있어 관련된 모든 사람 가운데서 협력적 관계를 추구해 나가는 건강관리 체계이다.

다섯째, 전인 개념은 심리학과 상담학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상담자들 역시 인간은 전인(全人)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근의 심리학적인 연구에 의해 사람의 전인성(wholeness of man)이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 이 강조점은 때때로 ‘유기체 이론’이라 불린다. 홀(Hall)과 린제이(Lindzey)는 심리학에 있어서 전인에 대한 새로운 강조는 몸과 마음의 이원론과 인간구조 심리학 그리고 행동주의 심리학에 대한 하나의 반향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새로운 강조가 폭넓게 받아들여져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 상담자는 그의 피상담자의 문제를 전인(全人)의 문제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는 피상담자를 전인으로 다루어야 할 뿐 아니라 그를 건강하고도 신성한 삶의 표적인 전인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시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제12장 자유문제

– The Question of Freedom –

인간론에서 생각해야 될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인간의 자유문제 이다. 저자는 “타락한 인간이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려 할 때 ‘자유’(自由)와 ‘의지’(意志)라는 이 두 단어 모두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의지의 자유’와 같은 표현 대신 ‘선택’(選擇)과 ‘참 자유’라는 말을 사용한다.        

‘선택’ 또는 ‘선택 능력’의 의미는 양자(兩者)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인간의 능력 즉 선택에 대한 책임을 내포한 능력을 말한다. 선택 혹은 결정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할 수 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참 자유’는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의 계시된 뜻에 맞는 것들을 생각하고 말하며 행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말한다.

(1) 인간의 선택 능력

성경은 항상 인간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으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의 선택 능력은 가장 중요한 재능 중 하나이다. 그리고 선택 능력은 모든 인간의 삶의 본질 그 자체이다.

그러나 현대 심리학 행동주의 학파 스키너(B.F. Skinner)는 인간의 선택 능력을 부정하며 인간은 그의 의도대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한낱 신화에 불과하며 인간의 행동은 전적으로 그의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이런 견해는 불행스런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다.(예 : 범죄자는 그의 범행에  책임 없음, 막시즘, 공산주의 국가들, 독재국가 등에서의 정치적 선택권 없음) 하나님의 창조 원리대로 인간을 선택할 수 있는 피조물로 또한 여러 가지 선택권들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로 인정할 때만이 ‘자유로운 사회가’ 가능케 되는 것이다.

(2) 참 자유의 기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의 ‘참 자유’다.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그에게는 ‘선택 능력’과 ‘참 자유’가 있었다. 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전적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갈 능력이 있는 존재였다. 인간은 온전한 상태로 창조 되었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뿐 아니라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 즉 참된 자유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첫 조상은 그들의 순결성이 깨어질 수 없는 더 높은 단계까지 나갔어야 했지만 그들은 더 낮은 단계로 즉 죄와 타락의 단계로 떨어졌던 것이다.

(3) 참 자유의 상실

인간은 ‘참 자유’ 자로 피조되었지만 그들은 범죄 함으로 이 ‘참 자유’를 잃어버렸다. 그 결과 인간은 ‘선택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참 자유’ 즉 하나님에 대한 절대 복종 속에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타락한 인류가 그들의 ‘참 자유’를 상실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타락한 인간은 그 자신의 힘으로는 온전히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만한 일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삶의 기본적인 방향을 죄악 된 자기애(自己愛)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바꿀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이 이렇게 ‘참 자유’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능력까지 상실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전히 선택을 하되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로 타락한 인간은 이제 죄에 속박(束縛)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그들이 참된 자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4) 참 자유의 회복        

타락으로 상실 된 인간의 ‘참 자유’는 구속(救贖)을 통해 회복된다. 성령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하시고 성화의 사역을 행하시기 시작할 때 그 사람은 비로소 회개와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 올 수 있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구속이란 잘못 된 것을 선택하는 인간 의지의 속박(束縛)으로 부터의 구출을 의미한다. 거듭난 사람은 더 이상 주님의 종으로 죄의 노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러한 인간의 ‘참 자유’는 구속의 과정을 통하여 사람에게 다시 회복된다고 신약성경은 말한다. 예수님은 자기와 논쟁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고 하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하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5,36)라고 말씀하셨다. 칼빈의 ‘참된 자유’의  세 요소 세 가지를 전제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 ‘참 자유’는 우리의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할 필요성으로부터의 자유이다.
  • ‘참 자유’는 소위 별로 무관한 것에 관한 규정들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한다.
  • ‘참 자유’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감사를 보이는 방법의 하나로서 하나님의 뜻을 자발적으로 행하려는 의지의 자유이다.

또 ‘자유’와 ‘율법’을 대립적(對立的) 관계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참 자유’는 결코 율법에 상반(相反)되지 않는다. 우리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란 섬김이라는 개념과 상반되는 개념이 또한 아니다.

(5) 온전케 된 참 자유    

오직 장차 오는 세상에서만 우리의 자유는 온전케 될 것이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그때에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에 있게 된다. 육체의 부활 후에 우리는 더 이상 죄와 불완전성의 아무런 방해 없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자유는 단순히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헌신된 섬김을 말한다.          

새 땅에서는 하나님의 종들이 그를 섬길 것이다.(계 22:3) 그러한 섬김은 역시 온전할 것이며 최종적인 자유일 것이다. 이 자유는 지금 모든 피조물이 탄식 중에 갈망하는 자유이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롬 8:20,21)

요약하면 구속받은 인간은 ‘참 자유’ 자가 되는데 ‘참 자유’의 의미는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의 계시된 뜻에 맞는 것들을 생각하고 말하며 행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말한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인간은 이러한 ‘참 자유’를 상실했고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상실하여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맞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속받아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들을 선택할 수 있고 또 그것을 기뻐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참 자유’인 것이다.(*) 글 쓴이 / 안토니 A. 후크마(Anthony Andrew Hoekema, 1913-1988) 네덜란드 출생. 1923년 미국으로 이민 후  칼빈신학교 신학사(Th. B), 프린스턴신학교 철학박사(ph. D), 1955년 이후 23년간 칼빈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요약정리 / 정은표 목사(월간 개혁신앙 편집인 및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