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사

요약 초대교회사(12) 4,5세기 정통의 확립

요약 초대교회사(12) 4,5세기 정통의 확립

   시릴과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 논쟁(431년) At the Council of Ephesus(of which there were actually two) in 431 AD, the theologies of Cyril of Alexandria and Nestorius of Constantinople squared off concerning the person of Christ, whether there were two distinct persons of Logos and man within the incarnate Christ, or if the persons were somehow joined in a union.

제12장 기독론 논쟁  

“우리는 한 분이시며 동일(同一)하신 성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할 것을 가르치노라. 그는 신성에 있어도 완전하시며 인성에 있어도 똑같이 완전하시다. 그는 참 하나님이요, 이성적(理性的) 영혼과 육체를 가진 참 인간이시다. 그는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같으나 죄는 없다. 그는 신성을 따라서는 만세 전에 성부에게서 나셨으나, 인성을 따라서는 후에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동정녀 마리아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에게서 나셨다. 그는 서로 혼합(混合)될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고 나누일 수 없고 분리(分離)시킬 수 없는 두 성질을 가지고 있다. 두 성질의 구별은 결합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각각 그 속성을 보존하고 있으며 두 성질은 한 인격과 한 존재 안에서 일치되어 두 인격으로 분할되거나 나누이지 아니하고 한 분이시며 동일한 아들, 독생자, 말씀이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에 관하여는 처음부터 예언자들이 선포하였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셨으며, 거룩한 교부들의 신조로 우리에게 전하여 준 것과 같다.” – 칼케돈 신조(451년)

니케아회의(First Council of Nicaea, 325)와 콘스탄티노플 회의(Council of Constantinople, 381)에서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라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문제를 해결할 셈이다. 그러나 인성과 신성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하게 규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가 정립되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로 기독론이 발전했다. 이것이 콘스탄티노플 회의(381년)부터 칼케톤회의(Council of Chalcedon, 451)까지 다루어진 주제였다.    

기독론의 논쟁은 주후 362년 아폴리나리우스주의(Apollinarianism)로 시작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아폴로나리우스의 견해가,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의 견해가 그리고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는 유티키안의 견해가, 553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단성론이, 그리고 680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일의론(Monothelitism)이 정죄됨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1. 아폴리나리우스 주의(Apollinarianism)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of Laodicea, 310-390)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강조한 나머지 인성(人性)을 약화시켜 신성이 인성을 흡수했다는 인상을 남겨주었다. 로고스(Logos)가 인간 예수의 영(靈, human soul)을 대신하였다고 이해함으로 그리스도를 신인(神人, divine-human)으로 이해하기보다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이해했다.

인간 예수가 로고스를 가졌다는 점에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지성(知性)과 이성(理性)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은 로고스가 인간 예수의 마음을 대신했다고 봄으로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나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신적(神的) 지성을 가지고 활동하신 예수에 불과하다고 이해했다.

갑바도기아(Cappadocia)인들의 지적처럼 만일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면 우리의 구원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370년 갑바도기아 바실(Basil of Caesarea, 330-379)이 아폴리나리우스를 논박하기 시작했고 377년에 로마 감독 다마수스(Damasus I, 305-384)의 지도하에 한 회의가 열려 그를 정죄하였으며 그 후 382년에 다시 확인했다. 또 379년에는 안디옥에서 한 회의가 열려 아폴리나리우스 주의를 정죄하였고,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다시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는 388년 데오도시우스 법전(Codex Theodosians) 이단목록에도 포함되었다. 그 후 아폴리나리우스주의(Apollinarianism)는 가현설(假現說)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이 완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이단으로 간주(看做)돼 오고 있다.

2.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

네스토리우스(Nestorius, ?-451)는 아폴리나스리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성자(聖子)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참으로 사람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강조했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가진 분이다. 신성과 인성이 뚜렷이 구별되며 양성(兩性)이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함께 존재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아폴리나리우스의 약점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어떻게 연합 되었는가라는 문제에서 네스토리우스는 오류(誤謬)를 낳고 말았다.

(1) 논쟁의 핵심

시릴(Cyril of Alexandria, 378-444)과 네스토리우스(Nestorius of Constantinople, 386-451) 논쟁의 원초적인 출발점은 과연 마리아를 ‘테오토코스’(Theotokos, 하나님의 어머니)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시릴과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육체적 연합이 있었다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그리고 마리아는 ‘하나님을 나신 분’(테오토코스)로 불러야 한다고 보았다.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라고 불러야 한다는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을 따라 시릴은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라고 주장한 반면에 네스토리우스는 그녀는 ‘테오토코스’라 부를 수 없고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 그리스도의 어머니)라 불러야 한다고 보았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양성(兩性)의 실재성(實在性)을 인정하면서도 신성은 십자가에 고난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결국은 신성과 인성을 구분(區分)하려는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은 예수를 인성으로서의 예수와 신성으로서의 예수 즉 두 인격으로 말한다는 인상을 남겼다.            

(2) 네스토리우스 주장의 이단성

사람들은 이 때문에 그가 ‘신적 그리스도’와 ‘인간적 그리스도’ 두 그리스도(two Christs)를 주장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해서 그에게는 이단(異端)이라는 표지가 붙게 되었고 아울러 신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 사이의 그릇된 대조(對照)를 주장하는 견해의 원형으로 간주 되어왔다. 이런 네스토리우스의 그리스도 인성과 신성의 기계적(機械的) 연합은 유기적(有機的) 연합과는 달리 ‘속성의 교류’ (communicatio idiomatum)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나신 분’(God-bearer)으로 번역되는 ‘테오토코스’(theotokos, Θεοτόκος)는 어머니의 특권 강조보다 아들의 신성(the Deity of the Son) 강조에 강조점이 있다. 성령으로 잉태(孕胎)된 마리아의 태중(胎中) 예수는 단순한 인간 예수가 아니라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삼위 하나님의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신 것이다. 고로 마리아는 육신과 연합된 하나님의 말씀(the Divine Word)을 잉태한 것이며 이런 면에서 마리아는 ‘테오토코스’(theotokos, God bearer)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마리아의 인격을 신성(神性)하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유기적으로 연합되었기 때문에 양성의 논리적 구분(區分)은 가능하나 양성의 실재 분리(分離)는 불가능하다.

(3) 에베소회의와 평화안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데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401-450)는 네스토리우스의 요청에 따라 431년에 에베소회의를 개최했다. 431년 6월 22일 성(聖) 마리아교회당에서 개최된 에베소회의는 지리적이나 여러 가지 여건으로 미루어 시릴에게 유리했다. 네스토리우스보다 먼저 도착한 시릴은 그들이 15일 가량 늦게 도착할 예정이니 기다려 달라는 감독들의 항의에도 그들의 도착하기 4일 전 6월 22일 단독으로 에베소회의를 개최하고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고 파문시켰다.      

안디옥 감독 요한의 인솔하에 나중에 도착한 네스토리우스 지지자들은 에베소의 주교 멤논의 직위를 박탈하고 시릴을 정죄하였다.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던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릴, 네스토리우스, 멤논 세 사람 모두를 해임하고 이들을 연금시켰으나 시릴이 가지고 온 거액의 뇌물을 황실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보냄으로 시릴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에베소회의 이후 반 시릴 세력들이 등장하면서 시릴도 교리적인 면에서 상당 부분을 양보해야만 했다.

아폴리나리우스의 가르침과 유사한 시릴의 단성론적(單性論的) 기독론 은 그의 반대세력이 등장할 것을 예견하기에 충분했다. 특별히 시릴의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12개 파문조항은 반발을 샀고 극단적인 시릴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이들은 12개 조항을 완전히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또 데오도시우스 황제도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의 화해를 위해서는 안디옥의 요한이 네스토리우스를 포기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한편 시릴에게는 안디옥이 네스토리우스를 포기하는 대가로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안디옥 전통을 융합시킨 통합신조 곧 평화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결국에 시릴은 사이러스의 데오도렛 감독이 작성한 평화안에 서명해야만 했다. 이 평화안은 안디옥 측이 에베소에서 작성한 것으로 안디옥의 신학을 상당히 반영하는 것이지만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사이에 긴 논쟁점이던 마리아 호칭을 ‘테오토코스’로 결정함으로써 시릴에게 상당한 명분을 가져다주었다.

결국에 이 평화안은 한편으로는 시릴의 연합교리를 양성의 인정 하에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을 한 인격 안에서의 연합 하에 받아들여 한 인격(one person)의 두 성(two natures)의 연합으로 결론을 내린 셈이다.

3. 유티케스주의(Eutychianism)

(1) 유티케스 기독론의 이단성

유티케스주의(Eutychianism)와 그   리스도의 단성론(Monophysitism) 논쟁   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수도원장 유티케스(Eutyches, 378-456)는   평화안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네   스토리우스가 양성의 구분을 강조   하여 예수를 두 인격으로 구별하는 오류를 낳았음을 잘 알고 있던 유티케스는 에베소회의 이후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을 적발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그림, 유티케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새로운 인격이 되었다고 주장하여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는 결국 네스토리우스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연합 후에 하나가 되었다고 그리스도의 단성(單性)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448년 11월 유티케스는 콘스탄티노플 한 지방 회의에 소환을 받고 그의 그리스도의 단성론 이단성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

(2) 레오의 종합적 기독론      

레오(Pope Leo I, ?-461)의 기독론은 네스토리우스와 유티키스의 극단의 단성론(Monophysitism)을 피하면서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레오는 연합 후에도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강하게 진술하여 그의 사상이 후에 칼케돈회의에서 작성한 신조의 기독론 중심 교리로 정착될 수 있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을 배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티케스의 단성론을 배격하는 방향에서 진행된 칼케돈신조는 433년의 조문(條文), 시릴의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두 번째 서신, 레오의 톰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따와 종합적으로 합성한 것이다. 그중 양성이 한 인격 안에서 혼합, 변함, 나뉨,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는 레오의 가르침은 칼케돈 신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칼케돈신조는 다음 몇 가지 면에서

교리사적인 의의(意義)를 찾을 수 있다.

첫째, 칼케돈신조는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왔던 아폴리나리우스주의와 네스토리우스주의 그리고 유티케스주의와 단성론 문제를 해결했고,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에 있어서 성부와 동질이며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니케아 전통을 재확인했으며,

셋째,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이후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디옥학파 사이에 오랫동안 논란되어 온 동정녀 마리아를 ‘테오토코스’(God-bearer, 하나님의 어머니)로 확정함과 동시 양성의 연합 관계를 피함으로써 그동안의 기독론 문제를 정착시켰다는 데 있다.  

이외에도 칼케돈회의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각 지방회의로부터 항소를 취급할 수 있는 상급법원으로 결정됨으로써 로마교회나 다름 없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서열을 굳힌 셈이다.

4. 칼케돈 이후 기독론 논쟁

칼케돈에서 정죄를 당한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과 유티케스를 따르는 단성론자들은 칼케돈신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들은 각각의 자기 지방에서 지지기반을 넓혀 나갔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칼케돈 이후 칼케돈 정통주의자가 물러나고 단성론자가 감독으로 앉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도 감독이 살해되고 단성론자가 임명되었다. 심지어 안디옥에서도 461년 단성론자가 감독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 제노(Zeno, Eastern Roman Emperor, 425-491)는 단성론자들과 모종의 타협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단성론자들에 의해 2년간이나 추방당한 후 돌아온 제노 황제는 단성론자들과 칼케돈 주의자들과 분열을 피하려고 단성론자들과 칼케돈신조를 통합시키려는 통합성(Edict of Reunion), 헤노티콘(Henotikon)을 482년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제노 황제 이후 동로마 황제들은 단성론을 옹호하는 선왕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다 저스틴(Justinian, 527-565) 황제가 집권하면서 완전히 반(反) 칼케돈 쪽으로 방향이 선회(旋回)되었다. 이런 가운데 단성론(單性論, Monophysitism) 논쟁은 단의론(單意論, Monothelitism)의 등장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극단적 단성론자들은 그리스도가 한 의지(意地)만을 가지고 있다는 단의론(單意論)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콘스탄스 2세(또는 포고나토스, Κώνστας Β’ Πωγωνάτος, 630–668) 황제는 단의론 논쟁으로 인한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적대 관계를 해결할 목적으로 681년 콘스탄티노플에 제6차 에큐메니칼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는 5차 에큐메니칼회의 재확인 후 그리스도의 단의론(單意論 지도자 셀기우스와 호노리우스를 정죄하였다.

기독론 논쟁 요약

기독론과 관련된 모든 회의 핵심논제는 신성과 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과연 어떤 관계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었고 각 회의는 이 문제에 대한 신조를 결정한 것이다. 니케아회의에서는 그를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으로 규정하였는데 이 말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조건을 모두 갖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지금까지 기독론 논쟁과 교회회의 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 :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에 관한 아폴로나리우스의 주장이 거부됨

431년 에베소회의 : 네스토리우스 ‘그리스도의 두 인격 교리’(the doctrine of Christ as two persons)가 거부됨

451년 칼케톤회의 : 유티케스의 ‘단성교리’(the doctrine of one nature)가 거부됨

553년 제5차 콘스탄티노플회의 : 단성론 논쟁이 칼케톤신조 재확인으로 해결됨

680년 제6차 콘스탄티노플회의 : 그리스도 일의론(monothelite) 거부됨(*) 글쓴 이 / 박용규 교수(총신신대원, 교회사, 성균관대학교(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ern Evangelical Seminaryl(M.A.)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Th.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Ph.D.) 출처 / ‘초대교회사’ 박용규 저, 총신대출판사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