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도서 소개 (A Puritan Theology)

PART Ⅱ

도서 소개 / 서언과 서론

성도의 삶을 위한 교리

– A Puritan Theology Doctrine for Life –

1. 서언  

천여 페이지와 오십만 개 이상의 단어로 영국 ‘청교도 신학’(A Puritan Theology Doctrine for Life)을 저술한 매우 방대하고 포괄적인 해설책이 지금 여러분의 손안에 있다. 이 책은 괄목할 만한 업적으로 저자들이 수십 년 동안 다양한 독서, 연구, 성찰을 통해 맺은 결실이다.

조엘 비키(Joel R. Beeke) 박사와 마크 존스(Mark Jones) 박사는 청교도(淸敎徒, puritans) 신학의 저술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모든 능력을 결집시켜 앞으로 이런 책을 다시 쓰려면 아주 많은 세월이 걸릴 정도로 청교도에 대한 포괄적인 해설과 분석을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은 어느 누가 봐도 유익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A Puritan Theology Doctrine for Life)은 청교도 시대의 진정한 인명록이다. 이 책을 통해 21세기 독자는 17세기의 런던, 캐임브리지, 옥스퍼드로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하면서 지난날 영어권 기독교의 역사에서 매우 엄청난 업적을 남긴 영적 형제들 가운데 하나와 어깨를 맞대는 놀라운 상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먼저 월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를 만난다. 퍼킨스의 설교는 케임브리지 도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고, 퍼킨스가 죽은 후에 토머스 긋윈(Thomas Goodwin, 1600-1680)이 열 살의 나이로 대학에 입학했을 때에도 도시 전체가 여전히 퍼킨스의 설교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곧이어 우리는 회중교회 신학자인 두 거인인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을 만나고, 아울러 하나님의 율법 대(大) 해설자인 앤서니 버지스(Anthony Burgess, 1600-1663), 체계적 본문 강해 설교자이자 궁정 목사인 토머스 맨턴(Thomas Manton, 1620-1677), 달콤한 물을 떨어뜨리는 설교자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 하니님께 흠뻑 빠진 스티븐 차녹(Stephen Charnock, 1628-1680), 주석가 매튜 헨리(Matthew Henry, 1662-1714) 외에도 많은 청교도를 만난다.

그런 다음 21세기 교회 세계로 오면 청교도 시대에는 수많은 영적 거인들이 살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 책에는 적절히 다 제시하기에는 너무 많은 걸출한 이런 인물들이 등장한다. 다루고 있는 신학 본체 곧 신학 백과사전에서 다룬 각 주제만 해도 입이 벌어진다. 매우 탁월한 어떤 사상가, 설교자, 저술가들에게 시선을 집중할 때 독자는 깊은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60개 장을 아무리 그냥 대충 읽은 독자라 할지라도 이 같은 즉 넓은 배경 속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인상에 깊이 남을 것이다.

첫째, 목회 사역에 대부분의 많은 시간을 보낸 이 사람들은 참으로 깊이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깊이 알았다는 것이다.

종종 우리는 새로 깎은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발산하고 또 모든 면이 빛을 반사 시킬 수 있도록 천천히 회전시키는 구절이나 본문의 의미의 감동을 받게 된다. 이들은 두 가지 의미에서 성경신학자들이었다. 먼저 자신들의 신학을 성경에서 찾아냈다는 의미에서 성경신학자였고, 또 당대의 의미에 따라 구원 이야기의 통일된 흐름을 이해하고 상술하고 구원 이야기 속에서 각 요소의 적절한 위치를 보는 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성경신학자였다.    

성경신학자로서 청교도 존 오웬은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1949)와 비견된다는 최근 한 학자의 주장이 청교도의 작품을 세세히 읽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혹 이해할 수 없는 말처럼 들릴지 모른다.1) 그러나 오웬의 글을 세세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가 단순히 여기서 한 구절 저기서 한 구절 따오는 데 관심을 둔 ‘증거가 되는 본문 수집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청교도들이 무엇보다도 성경의 상관관계를 깊이 살피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 것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도 ‘언약 신학’에 대한 설명에 백여 페이지가 할애되었다.

둘째, 이들은 누구보다도 소명의식이 아주 강했다.

가장 좋은 의미에서 이들은 성경 우선주의자들이었으나 자신들이 모든 성도와 함께 하나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파악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엡 3:18)을 깊이 의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종종 좁은 의미에서 ‘칼빈주의자’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청교도는 스스로 자기들이 단순히 제네바 전통보다 더 오래되고 또 더 폭넓은 전통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깊이 의식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청교도가 칼빈(John Calvin, 1509-1564)보다 어거스틴(St. Augustin, 354-430)을 더 자주 인용하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청교도는 샤르트르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Chartres)의 베르나르처럼 자신들은 “거인(巨人) 어깨 위에 앉아 있는 난쟁이로 거인보다 더 멀리 잘 볼 수 있다.”라고 생각을 했다.2)

셋째, 이들은 깊이 기도하며 신학적으로 생각했다.

‘청교도 형제 집단’은 신학적으로 심원하게 그리고 기도하며 생각한 사람들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삼위일체에 대한 것이든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것이든 또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에 대한 것이든 청교도의 작품을 읽게 되면 우리는 대부분이 익숙해 있는 것과는 다른 더 심원한 분위기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존 오웬의 가장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죄 죽임’(0n the Mortification of Sin, 부흥과개혁사, 역간, 2009)은 옥스퍼드 대학 십대 학생들이 주축인 청중에게 전한 설교가 기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약간 의아할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숙고해 보면 오웬과 그의 동지들이 옳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왜냐면 우리 자신의 영적 힘에 대한 순진한 생각과 성경 교훈에 대한 무지를 감안 할 때 죄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기독교 신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들이 죄에 빠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복잡하고 애매한 배움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 그렇다고 가벼운 읽을거리는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30세의 젊은 오웬이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 자신의 작품 ‘그리스도의 죽음에 나타나 있는 죽음의 죽음’(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nst)을 독자에게 소개할 때 전하는 말을 상기하는 것이 좋다.

만일 그대가 어디로든 더 가기 원한다면 나는 그대에게 여기 좀 더 머물러 있으라고 간청하고 싶다. 허세가 지배하는 이 시대의 많은 이들처럼 그대도 책 표지나 제목을 들여다보는 사람으로서 카토가 극장에 들어왔다가 금방 다시 나가는 것처럼 책 속으로 들어온다면 그것으로 그대의 즐거움은 끝났다. 잘 가시오. 안녕!4)

그러나 만일 독자가 하나님의 영광에 따라 살기 위해 성경적으로 생각하는 청교도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다면 이 책은 바울이 ‘경건함에 속한(즉 경건함과 일치된) 진리의 지식’(딛 1:1)이라고 부른 것의 금광이자 본보기임을 증명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진귀한 발견물이다. 곧 신학적, 지성적, 영적, 실천적 보물의 보고(寶庫)다.

비키 박사와 존스 박사는 우리에게 이같이 큰 은혜를 끼쳤고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한다. 따라서 청교도가 자기들을 본질상 어거스틴을 따른 자들로 여겼기에 마지막 당부할 말은 어거스틴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그 말 ‘톨레 레게’(Tolle lege, 책을 집어 들고 읽으라!)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싱클레어 퍼거슨 목사(사우스캐롤라이나. 컬럼비아 제일장로교회 )

   < 미 주 >

1) Richard Barcellos, The Family Tree of Reformed Theology (Palmdale, Calif.: Reformed Baptist Academic Press, 2010)를 보라.

2) John of Salisbury. The Metalogicon of John of Salisbury: A Twelft-Century Defense of the Verval and Logical Arts of the Trivium, Daniel E, McGarry 번역, 서른 및 각주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55), P. 167.

3) 이 논문은 The Works of John Owen, William H. Goold 편집 (Edinburgh: Johnstone and Johns, 1850-1853) 6:1-86에서 찾아볼 수 있다.

4) The Works of john Owen, William H. Goold 편집 (Edinburgh: Johnistone and Johns, 1850-1853), 10:149에 나온다.

2. 서론

‘청교도’(淸敎徒, puritan)라는 말은 1560년대에 생겨난 일종의 개신교도들을 멸시하는 말로서 잉글랜드 교회개혁의 촉진을 원했던 성도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일부 사회 역사가들은 이 말이 16세기와 17세기에 너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 개혁파나 칼빈주의를 자처하는 다른 이들은 ‘청교도’와 ‘청교도 사상’이라는 말을 계속 사용을 옹호한다.  

‘청교도 신학’에 대한 좋은 연구서들은 이미 많이 존재하고 있다. 어떤 책들은 청교도 전체를 다루고1) 어떤 책들은 특정 청교도 신학자의 작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2) 그러나 지금까지 청교도의 성경 주요 교리들에 대한 사상을 개관한 내용을 역사적 조직적으로 제공하는 단일 작품은 결코 없었다.

(1) 청교도와 청교도 사상

교회 역사가(歷史家)의 가장 어려운 임무 가운데 하나는 ‘청교도 사상’을 정의하는 것이다.3) 온전한 정의를 제시하려면 이 글을 두 배로 늘려야 할 것이다. 그러함에도 ‘청교도 사상’에 대한 정리가 잘 된 몇 가지 정의(定義)가 있다.  

존 코피(John Coffey)와 임창하(Paul Chang-Ha Lim, 1967- )에 따르면 ‘청교도 사상’은 유럽 대륙의 루터교회가 아니라 칼빈주의 교회들에 동조적인 개혁파 개신교 사상의 변종(變種)이다. 그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청교도 사상’은 잉글랜드 교회 안에서 발원(發源)하고 독특한 환경과 긴장의 산물인 근대 초기 개혁파 개신교 사상의 특징을 가진 강력한 변종이다.4)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 통치 아래에서 이러한 잉글랜드 교회는 대체로 개혁파교회에 속한 것으로 간주 되었다.”5)

의심할 것 없이 청교도 신학자들은 대부분 개혁파나 칼빈주의자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는 “청교도는 오로지 모두 다 개혁파였다.”라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개혁파 정통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복잡하지만 세 가지 통일 문서(벨기에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요리분답, 도르트신경)6)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총회 표준문서7) 같은 신앙고백 문서들은 개혁파 신학의 정확한 개요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ster, 1615-1691)는 확실하 청교도였으나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토머스 긋윈(Thomas Goodwin, 1600-1680), 존 오웬(John Owen, 1616-1683)과 같은 개혁파는 아니었다. 백스터와 오웬 양자 간의 열띤 신학 논쟁은 그들의 차이가 의미상의 문제를 훨씬 넘어섰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백스터가 ‘도르트신조’는 인정했으나 웨스트민스터 총회 표준문서들은 인정하지 않았고 이 문서들 속에는 여러 교리 특히 속죄(贖罪)와 칭의(稱義) 교리에는 백스터의 견해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백스터는 그의 저작 ‘새로운 신앙고백 또는 온전함을 위해 세우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모든 사람에 의해 기초로 세워지는 데 필수적인 기독교의 제일 원리’(A New Confession of Faith, or the first Principles of the Christian Religion necessary to bee laid as a Foundation by all such as desire to build on unto Perfection, 1654)를 다른 목사들에게 기증했을 때 그것이 최종 형태는 아니었다. 백스터는 말하기를 오웬, 긋윈, 토머스 맨턴(Thomas Manton, 1620-1677) 등은 자신의 이 저술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했다.

이같이 ‘청교도 사상’은 오늘날 우리 관점에서 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더 다양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학 용어로 ‘청교도 사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한다. 백스터를 청교도로 분류하는 걸 문제 삼지 않을 뿐 아니라 아르미니우스주의자 (Arminianist)인 존 굿윈과 아리우스주의자(Ariust)로 보이는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 침례교도인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 율법폐기론자인 존 이튼(John Eaton, 1575-1641) 등도 종종 청교도로 간주 된다.

앞서 언급한 코피와 림은 이렇게 주장한다. “예컨대 칼빈주의 침례교인은 그 신앙이 정통적이고 경건하다고 널리 인정을 받았고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 시대 청교도국가 교회에는 장로교회, 회중교회와 나란히 침례교회도 포함이 되었다.”8) 그러함에도 대다수 청교도는 개혁파 정통주의로 불리는 포괄적인 신학 운동의 일원이었다.9)

16세기 잉글랜드 의회는 국민의 밑음이 개신교 ‘개혁파’로 이해되기 원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했고 그 회의의 중대한 목적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이 세 나라의 ‘개신교 신앙 통일’을 확보하자는데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청교도가 신학 문제들에 대해 항상 모두가 다 일치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청교도는 다양한 교리들(성례와 교회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에 대해 활발한 논쟁을 벌였다.10)

그러나 청교도(淸敎徒, Puritans)는 반(半)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인 로마 가톨릭교회, 반(反) 삼위일체인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의 오류를 타도(打倒)하는 일에는 모두 하나가 되었다. 청교도는 당대 유명한 예수회 설교자인 로버트 벨라민(Robert Bellamine, 1542-1621)과 같은 로마 가톨릭 교인은 반대했다.

청교도는 소시니안주의 특히 라일리우스(Laelius Socinus, 1525~1562)와 파우스투스(Faustus Socinus, 1539-1604)의 견해와 폴란드의 ‘라코비아 교리문답’(Racovian Catechism)을 거부했다. 그리고 알미니안주의 특히 그들의 잘못된 예정론, 신론, 속죄른, 삼위일체론, 칭의론에 맞서 싸웠다.11)

이러한 집단들과의 강력한 논쟁 외에도 청교도는 개혁파와 루터교회 신학자들 사이의 점점 벌어지는 간격에 대해서도 증거를 제공한다. 루터교회 사상은 잉글랜드 종교개혁이 처음 시작될 때 매우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코피와 림이 지적하는 것처럼 루터교 교인들은 청교도 운동의 일원이 아니었다.

청교도들의 작품을 보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에 대해 약간의 언급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루터교 신학에 대한 청교도들의 언급 특히 기독론과 성찬에 대한 언급은 부정적이다. 존 오웬의 방대한 작품을 보면 그는 거의 다른 모든 신학자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루터교 저술가들을 인용하는 경우는 현저히 그 빈도가 낮다.12)

청교도들은 루터교회 예배가 지나치게 종교개혁 이전 비성경적 관습들을 답습하고 있다고 본다.13) 그것이 아마 루터교 신학자들이 오직 믿음으로 얻는 칭의에 공헌하고 일반적으로 그 견해에 동조함에도 신학적으로 잘못된 신학을 전재한 혐의자로 간주 된 핵심 이유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볼 때 청교도 사상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을 더 깊이 추구한 운동으로 이해가 되어야 한다. 청교도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증명된 것처럼 다양한 지역에서 장로교회 임직 제도와 교회 정치를 도입하고 교회와 국가에 대해 전통적인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청교도가 영향력 있는 직위를 차지함으로써 한동안 이 목표를 이루는 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청교도는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 재위 1558-1603)에 의해 잉글랜드 교회 내부에서 개혁 운동을 전개하는 데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해 칼 트루먼(Carl R. Trueman, 1967- )은 이렇게 지적한다.

1662년 ‘통일령’(統令, Act of Uniformity, 국교회의 예배, 기도, 의식 등을 통일하기 위해 잉글랜드 의회가 1549년부터 1662년까지 4차에 걸쳐 논의한 후 제정 공포한 법률로 예배 통일법이라고도 함)이 통과되자 잉글랜드 교회 내 관습에 대해 더 철저한 개혁을 바라는 청교도들이 공동 기도서에서 교황주의 요소로 간주 되는 것들을 용납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어려운 선택에 직면하게 되었다.

곧 교회에 대해 그동안 깊이 고수해 온 신념들을 포기하고 현실에 순응하든지 아니면 교회를 떠나 저항 운동에 가담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대략 2천 명이 후자를 선택했고 따라서 청교도는 하루아침에 잉글랜드에서 비(非) 국교회로 입지가 바뀌었다.14)

 엘리자베스 1세의 통일령 이후 ‘청교도 사상’은 어떻게 되었는가? 노먼 사이크스(Norman Sykes, 1897-1961)는 이렇게 간략히 요약했다.

18세기는 모든 교회 속에서 선조들의 신앙적 열정이 두드러지게 쇠퇴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1635년 하노버 왕가(House of Hanover)의 즉위와 함께15) 중용, 온건 인습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제도권 교회는 ‘심사령’(審査令)과 ‘협동법’(Corporation acts)16)을 통해 보호를 받았다.

프로테스탄트 비(非) 국교도17)는 ‘관용령’18)에 따라 안전을 보장받고 신학 논쟁들로 말미암아 크게 분열되어 수동적인 묵종의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정치적으로 비(非) 국교도 대표로 구성된 기구는19) 법적 관용의 보호로 현상 유지는 할 수 있었으나 세력을 확대하지는 못했다. 그들이 매년 왕에게서 하사금 곧 ‘레기움 도눔’(rhegium dnuem)20)을 받은 것은 그들이 시온에 편안하게 정착한 것을 상징했다.21)

트루먼과 같은 어떤 이들은 잉글랜드 교회를 개혁하려는 시도가 삼중의 복원 곧 ‘군주 정치’, ‘역사적 감독 제도’, ‘공동 기도서의 복원’과 함께 이제는 끝나버렸기 때문에 1662년으로 청교도 시대는 마감되었다고 주장한다. 또 사이크스(Norman Sykes)와 같은 다른 이들은 ‘청교도 사상’에서 개신교와 비국교도로의 전환이 1689년 이후로 ‘관용령’과 함께 도래했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이들은 ‘청교도 사상’은 런던의 실버 스트리트 장로교회(Silver Street Presbyterian Church) 목사인 존 하우(John Howe, 1630-1705) 죽음으로 끝났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연대가 언제이든 간에 ‘청교도 사상’은 16세기와 17세기의 교회와 국가 그리고 신학과 예배 문제들에 특별히 관련되어 있다. 1689년 이후로 이전에 수십 년에 걸쳐 심각한 대립 속에 있었던 모든 파벌이 무기를 내려놓고 다소간에 평화로운 공존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중요하다. 왜냐면 비록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가 신학과 경건에서 청교도였고 간혹 청교도 마지막 세대로 간주 되기는 해도 엄밀히 역사적 의미에서 청교도는 아니었다. 신학의 정수파 사람들과 스코틀랜드의 분리파 사람들 ‘구(舊) 프린스턴’ 인물들 즉 토머스 찰머스(1780-1847), 찰스 해든 스펄전(1834-1892), 존 찰스 라일(1816-1900), 마틴 로이드존스(1899-1981), J. I. 패커(1926- )와 다른 유명인들도 청교도에 깊이 동조적이기는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총회 신학자들과 같은 의미에서 청교도로 간주 될 수는 없다.

만일 이들이 청교도라면 ‘청교도 사상’은 구체적인 역사적 의미가 상실될 것이다. 청교도를 이해할 때 우리는 톰 웹스터가 말하는 청교도의 세 가지 특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웹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첫째, 청교도는 하나님과 역동적인 관계를 통해 자기들의 지성을 형성시키고 자기들의 감정에 영향을 받고 자기들의 영혼을 통찰한 사람들이다. 청교도는 자기들 외부의 어떤 것 또는 어떤 존재 곧 성경의 삼위 하나님에 근거를 두고 있다.    

둘째, 청교도는 성경에 기반을 둔 신앙 체계를 공유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체계를 개혁파 정통주의로 지칭한다.

셋째, 청교도는 믿음에 있어 자기들의 공통적 경험과 통일성을 기초로 신자와 및 목사 간에 유기적인 관계를 확립했다.22) 이 협력적인 형제애 관계는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잉글랜드에서 태동했고 17세기에 잉글랜드와 뉴잉글랜드에서 발전했다.

“요약하면 청교도 사상의 특징은 부단(不斷)히 하나님 말씀에 따라 개혁된 삶을 추구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에서 발견한 것을 조직화하고 분석하여, 그것들을 삶의 전 분야에 적용하는 데 주력했다.”

청교도는 개인, 가정, 교회, 국가라는 삶의 영역 속에서 회심 및 하나님과 교제를 강조하는 고백적, 신학적, 삼위일체적인 접근법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예컨대 토머스 굿윈을 청교도로 부를 때 우리는 그가 개혁파 믿음 및 하나님과의 경험적 교제에 근거를 둔 영적 지도자 그룹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굿윈과 같은 청교도는 1560년대에서 1660년대 또는 그 너머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에서 개인적, 가정적, 교회적, 국가적으로 성경에 기반을 둔 개혁과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부흥을 위해 힘썼다. 긋윈의 작품과 그의 동시대인들의 작품은 훗날 미국의 장로교회 사람들이 “진리는 선을 위해 있고, 진리의 중대한 시금석은 거룩함을 촉진 시키는 경향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고23) 선언한 것처럼 믿음을 지키도록 하는 ‘삶을 위한 교리’(Doctrines for Life)에 대한 것이었다. 

요약하면 16세기 후반과 17세기의 청교도 운동은 일종의 활력적인 칼빈주의 운동이었다.        

  • 경험적 관점에서 청교도 운동은 따스하고 전염성이 강했다.
  • 복음 전도의 관점에서 청교도 운동은 공격적이었지만 부드러웠다.
  • 교회적 관점에서 청교도 운동은 몸 된 교회의 믿음과 예배와 질서에     대한 그리스도의 머리가 되심을 실천하는 데 주력을 했다.
  • 정치적 관점에서 청교도 운동은 왕, 의회, 국민과의 관계에서 하나님     앞에서 적극적이고 균형적이고 양심적으로 행동했다.24)

J.l. 패커는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청교도 사상’은 교회와 국가와 가정에서 교육과 복음 전도와 경제 분야의 개인적인 제자도와 헌신 영 역에서 목회 사역과 능력에서 국가적이고 개인적으로 영적 갱신에 대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복음적인 성결(聖潔) 운동이었다.”25)

(2) 본서와 각 장의 목적

본서에서 어떤 장은 다수의 청교도를 다루고 어떤 장은 소수의 청교도를 다루며 또 다른 장은 단지 한 사람 청교도만 다룬다. 이것은 여러 이유에서 의도적이다.

다수의 청교도를 다루는 장들은 ‘청교도의 전체 입장’ 또는 ‘청교도의 여론’으로 불릴 수 있는 거에 대한 그림을 제공한다.26) 그러나 단지 몇 사람의 청교도를 다를 때 우리는 각 저술가의 개인적인 사상을 보다 더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고 각 저술가의 차이점, 뉘앙스, 강조점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청교도에다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장들은 동시대 인물들과 상호 관계 속에 있기는 하지만 특정 신학자가 특정 교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매우 포괄적인 관점을 제공하려고 한 것이다. 한 장의 핵심 주체로 다뤄진 저술가들은 토머스 굿윈의 기독론적인 타락 전 예정설(또는 선택설)에 대한 경우처럼 개혁파 전통 안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청교도의 기본 신학을 대체로 반영한다.

어떤 경우에는 한 명의 청교도 저술가를 다룬 장에서 토머스 맨턴, 크리스토퍼 러브(1618-1651), 스터븐 차녹(1628-1680) 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한 청교도를 더 면밀하게 살펴보기도 한다.

어떤 장들은 또한 유럽 대륙의 신학자들도 언급한다. 이것도 의도적이다. 청교도의 작품에 익숙한 자는 누구든 청교도가 교회 역사 속에서 매우 다양한 전통과 모든 시대에 속한 수많은 저술가를 인용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로 대륙의 개혁파 신학자들을 다루기로 정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다루는 청교도가 자기들을 폭넓게 국제적인 개혁파 정통주의 운동의 한 부분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존 칼빈(1509-1564), 요하네스 마코비우스(1588-1644), 요하네스 콕세이우스(1603-1669), 프랜시스 투레틴(1623-1687), 헤르만 위트시우스(1636-1708)와 다른 이들이 청교도와 대륙의 개혁파 신학자들 간의 유사점이나 간헐적인 차이점을 묘사하기 위해 자주 거론된다.

많은 장에서 우리는 개략적으로 주제들을 다루었다고 느낀다. 예로서 스티븐 차녹의 대작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God,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5)은 한 장으로 개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의 소망은 이 장들이 다양한 교리에 대해 전반적이지만 정확한 그림을 제공하는 한편 청교도 사상을 연구하는 자들의 갈망을 자극해서 이 교리들을 더 상세히 연구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우리는 어떻게든 이렇게 포괄적으로 다루려고 노력했으나 청교도 신학 전체 분야를 망라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한다.27) 방대하지만 한 권으로 된 작품은 대체로 여러 권으로 된 작품이 가지고 있는 폭과 깊이를 갖기 어렵다. 그러함에도 거의 모든 주요 청교도 교리들이 설명되고 어떤 장들은 논문이나 논설로 쉽게 확대될 수 있는 주제들을 망라했다.(예, 복에 대한 환상이나 청교도의 설교)

또 본서에서 우리는 책임 있는 역사신학(歷史神學)을 전개하려고 애썼다. 각 장은 우리가 청교도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청교도가 직접 말한 것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제시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청교도 신학에도 장점 단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보기에는 매력적인 토머스 굿윈의 종말론은 많은 문제점도 있었다. 생애 후반에 긋윈은 자신이 천년왕국의 시작 연대를 확정한 것(1666년으로 추측)을 후회했다. 청교도는 종말론에 있어 탁월하지 못했다.

20세기와 21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이 예컨대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법에 대해 주석적으로 더 유용한 설명을 교회에 제공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청교도가 정확했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 신학 분야에서 탁월했다고 믿는다. 청교도 이전 신학자들은 이런 신학적 엄밀함을 갖고 작품을 거의 쓸 수 없었고 신학을 자기들의 설교를 듣고 자기들의 책을 읽는 자들의 마음과 지성(知性)에 적용하는 것이 매우 드물었다.

우리가 저술한 책 ‘삶을 위한 교리’(Doctrine for Life)는 거의 모두 교회 목사이자 훈련된 신학자였던 청교도의 작품들 속에서 일관되게 강조되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가장 위대한 신학자 대부분이 지역 교회에서 목사와 교사로 활동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망각한다.

우리는 또한 본서가 청교도에 대한 많은 오해를 불식시키기를 바란다. 이것은 우리가 각 장에서 1차 자료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을 설명해 준다. 우리는 청교도에 대한 건전한 이차 자료도 감사하나 본서를 저술할 때 16세기와 17세기에 저술된 1차 문헌들을 훨씬 더 의존했다. 예를 들면 청교도가 율법주의자였다는 비판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28) 그러나 청교도 신학 전체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사람들은 이런 성급한 비판을 재고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또 우리가 저술한 이 책이 소위 ‘칼빈 대(對) 칼빈주의자’ 역사 편집을 확실히 오래전부터 무시된 것이 아니라면 무시할 수 있는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독자가 본서의 장들을 조심스럽게 읽고 청교도가 실제로 문제의 교리에 대해 말한 것을 전달받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청교도가 말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주장할 수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본서는 청교도가 자기들의 신학을 실천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보여 주는 여러 개의 장으로 결론을 맺는다. ‘삶을 위한 교리’가 본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나 청교도는 각 교리의 용도를 피할 수 없었고 우리도 그들의 믿음을 상술했을 때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런 결론 부분을 갖는 게 청교도 신학에 적합하고 참되다고 본다. 탁월한 저서인 ‘경건의 탐구’(A Quest for Godliness) 서른에서 J.I. 패커는 자신의 저서의 논문들에 대해 “나의 논문들은 단순히 역사나 역사신학이 아니다. 내가 쓴 다른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최소한 영성 자체를 목표로 갖고 있다.”라고 주장했다.29)

우리도 패커와 같은 감정을 반영하고 본서가 단지 독자들의 지성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영향을 미치기를 기도한다. 앞서간 청교도들은 본서를 매우 바람직한 성과로 인정할 것이다. 우리는 청교도 신학에 대한 본서가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에게 읽힐 것이라고 믿는다.

학자들은 우리가 1차 자료에 주의를 기울인 것과 청교도가 다양한 교리에 대해 믿은 것을 정확히 반사하려고 노력한 것을 보고 본서가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본서의 대표적 독자는 일차적으로 학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본서가 평신도, 신학생, 목사 후보생, 목사, 장로, 집사와 같이 안수를 받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더 많이 읽히기를 바란다.

이 다양한 무리가 독자가 되기는 쉽지 않겠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해 유명한 한 어구를 인용한다면 ‘물속에서 코끼리가 헤엄을 치고 어린아이가 놀게’하는 작품을 저술하기 위해 힘썼다. 거의 모든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단어, 어구, 문장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번역되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것은 우리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이 사실들을 명확히 한다.”라고 말한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1581-1656) 대주교의 평가를 상기하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우리가 저술한 대다수 내용은 본서에만 담겨 있다.

하지만 일부 내용은 다른 곳에서 뽑아온 것이고 우리는 본서에 싣도록 허락해 준 각 출판사에 감사를 전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이런 경우에 우리는 이전에 출판된 장들을 다시 쓰고 다시 편집했으며 고서에서 인용하는 문장들을 자유롭게 현대어로 번역했다.(*) 글쓴이 / Joel R. Beeke and Mark Jones, 출처 :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A Puritan Theology Doctrine for Life), (서울. 부흥과개혁사, 조엘 비키, 마크 존스 지음, 김귀탁 옮김) 2017. pp. 8-10, 14-21. ㈜ 본 기사는 본지의 편집에 맞도록 재편집된 것으로 원문과 표현이 다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잉글랜드의 수장령과 통일령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Ⅰ, 1533-1603, 재위 1558-1603)의 아버지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 재위 1509-1547)에게는 여섯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과의 사이에 태어난 딸이 엘리자베스의 이복자매 메리 튜더(Mary Tudor, 메리 1세, 재위 1553-1558)였다. 캐서린은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헨리 8세는 그녀와의 이혼을 희망했다. 그러나 로마 교황은 정치적 이유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헨리 8세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로마 교황과 크게 다툰 끝에 영국 국교회(聖公會, Anglicanism, Episcopal Church)라는 이름의 교회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결혼한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이 낳은 딸이 엘리자베스 1세였다. 그러나 앤은 캐서린처럼 아들을 낳지 못하고 간통 혐의로 처형당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1세는 서자(庶子)로 취급되었다.

헨리 8세는 그 후도 여러 명의 왕비를 두었는데 아들은 병약한 에드워드 6세(Edward Ⅵ, 재위 1447-1553, 헨리 8세와 그의 세 번째 부인이자 제2 계비인 Jane Seymour 사이에서 태어남) 한 명뿐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초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었다. 그녀의 선생 말에 의하면 엘리자베스 1세는 아주 총명한 학생이었다.

헨리 8세가 죽자 16세에 뒤를 이은 에드워드 6세는 불과 몇 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그 뒤를 이어 헨리 7세의 증손녀인 제인 그레이가 즉위했지만 불과 9일 만에 왕위에서 쫓겨났고 헨리 8세의 장녀 메리 튜더가 즉위했다. 이는 엘리자베스 1세 스무 살 때의 일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즉위 당시 유럽에서는 종교개혁에 의해 구교인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개신교인 영국 국교회가 피비린내 나는 항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에 앞서 즉위했던 여왕 메리 튜더(메리 1세)는 로마 가톨릭의 열렬한 옹호자로 신교도들을 블러디(Bloody) 메리라 불릴 정도로 무자비하게 혹독한 탄압을 했다. 개신교 신도들은 메리 튜더 치하의 잉글랜드를 떠나 대륙으로 망명했다.

그랬다가 메리 여왕이 죽고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자 망명자들이 잉글랜드로 되돌아왔다. 로마 가톨릭은 서부와 북부에서 개신교는 동부와 남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고 그 결과 잉글랜드는 두 동강이 났다.

1558년 11월 17일 엘리자베스 1세는 25세 때 즉위했다. 의회가 엘리자베스 1세의 왕위 계승을 승인했을 때 엘리자베스는 “위대하신 신의 조화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말할 수 없는 어려운 나날들을 견뎌 온 엘리자베스 1세의 심경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 국교의 입장을 명확히 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했다. 즉 엘리자베스 1세가 잉글랜드 국교회 최고 권위자임을 확인하고 잉글랜드에서 교황의 모든 권력을 철폐한 것이 ‘수장령’이다. (Acts of Supremacy, 국왕을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 최고의 首長으로 규정한 법률)

또 나라 전체의 종교를 통일시킬 목적으로 주일과 성인 축일에 전 국민의 예배 참석을 강제한 것이 ‘통일령’이다. (Act of Uniformity, 국교회의 예배와 기도 그리고 의식 등을 통일하기 위해 잉글랜드 의회가 1549년부터 1662년까지 4차에 걸쳐 논의한 후 제정 공포한 법률로 예배 통일법이라고도 함) 

이런 조치의 결과 교회가 무엇을 믿어야 하고 교회가 어떻게 다스려져야 하며 교회 예배가 어떻게 드려져야 하는가를 왕의 명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 자신은 분명히 개신교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그러나 여왕은 가톨릭 국가인 에스파냐(스페인)를 되도록 자극하려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잉글랜드가 심각한 군사적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신을 ‘수장’(首長, Supreme Head)이라는 칭호 대신 ‘최고 통치자’(Supreme Governor)라는 칭호를 택한 것 또한 이런 우려를 반영한 것이었다.

또 여왕이 수장이라는 칭호를 거부한 것은 개신교도들과 로마 가톨릭교도들을 모두 자극하지 않으려는 조치의 행동이었다. 개신교도들은 수장이라는 칭호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사용하고 있었고 로마 가톨릭교도들은 교황을 가리키는 데 그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잉글랜드 교회의 신학은 후에 개혁되었으나 교회 제도 특히 주교제도는 로마 가톨릭의 것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다.(*)

   <  미 주 >

1) 예컨대 Geoffrey Nuttall, The Holy Spirit in Puritan Faith and Experienc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Ernest Kevan, The Grace of Law: A Study in Puritan Theology        (1964; repr., 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1)를 보라.

2) 예컨대 J. I. Packer, The Redemption and Restoration of Man in the Thought of Richard      Baxter (Vancouver: Regent College, 2000)를 보라.

3)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자료들을 보라. On this question, see Joel R. Beeke, The Quest       for Full Assurance: The Legacy of Calvin and His Successors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99), 82n1; Joel R. Beeke and Randall J. Pederson, Meet the Puritans,        With a Guide to Modern Reprints (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06), xiii–     xix; Ralph Bronkema, The Essence of Puri\-tanism (Goes: Oosterbaan and LeCointre,         1929); Jerald C. Brauer, “Reflections on the Nature of English Puritanism,” Church History     23 (1954): 98–109; A.G. Dickens, The English Reformation (University Park: Penn State      Press, 1991), 313–21; Basil Hall, “Puritanism: The Problem of Definition,” in Studies in       Church History, ed. G.J. Cumming (London: Nelson, 1965), 2:283–96; Charles H. George,     “Puritanism as History and Historiography,” Past and Present 41 (1968): 77–104; Richard     Mitchell Hawkes, “The Logic of Assurance in English Puritan Theology,”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52 (1990): 247; William Lamont, “Puritanism as History and              Historiography: Some Further Thoughts,” Past and Present 42 (1969): 133–46; Richard       Greaves, “The Nature of the Puritan Tradition,” in Reformation, Conformity and Dissent:      Essays in Honour of Geoffrey Nuttall, ed. R. Buick Knox (London: Epworth Press, 1977),     255–73; John Morgan, Godly Learning: Puritan Attitudes towards Reason, Learning, and      Education, 1560–164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9–22; D. M.        Lloyd-Jones, “Puritanism and Its Origins,” The Puritans: Their Origins and Successors        (Edinburgh: Banner of Truth, 1987), 237–59; J. I. Packer, A Quest for Godliness             (Wheaton, Ill.:Crossway, 1990), 21–36; Tae-Hyeun Park, The Sacred Rhetoric of the Holy     Spirit: A Study of Puritan Preaching in Pneumatological Perspective (Proefschrift: Theologische     Universiteit Apeldoorn, 2005), 73–75; Leonard J. Trinterud, “The Origins of Puritanism,”       Church History 20 (1951): 37–57.                        72

4) John Coffey & Paul C. H. Lim, “Introduction,”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Puritanis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P. 2.

5) Coffey and Lim, “Introduction,”의 서론, P. 3.

6) 네덜란드 개혁파교회들과 네덜란드 지역 외 동종 교파들의 교리적 표준문서로 벨기에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도르트 신조가 있다.

7) 주(主) 문서(신앙고백, 대,소교리문답)외 부(副) 문서(공예배 지침서, 장로교회 정치 형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개요(The Sum of Saving Knowledge)가 있다.

8) Coffey & Um. “Cambridge Companion”의 서론, P. 5.

9) Carl Trueman은 청교도가 잉글랜드 교회에서 축출당한 사건인 1662년 통일령에 대해 말하면서, 이것은 “대다수 청교도가 고수한 개혁파 신학이 더 이상 이 세 영역(정치, 교육,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하게 된 것을 확실히 했다.”고 지적한다. Puritan Theology as Historical Event: A Linguistic Approach to the Ecumenical Context,in Reformation and Scholasticism: An Ecumenical Enterprise, eds. Willem J. van Asselt and Eef Dekker 편집 (Grand Rapids: Baker, 2001), 253. 개혁파 정통주의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Richard A. Muller, After Calvin: Studies in the Development of a Theological Tradi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p. 33.이하를 보라. 

10) 이 문제에 대해서는 또 Michael A. G. Haykin와 Mark Jones 편집, Drawn into Controversie:

   Reformed Theo\-logical Diversity and Debates within Seventeenth-Century British Puritanism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1)을 보라.

11) See Aza Goudriaan, “Justification by Faith and the Early Arminian Controversy,” in Scholasticism Reformed: Essays in Honour of Willem J. van Asselt, eds. Maarten Wisse, Marcel Sarot & Willemien Otten 편집 (Leiden: Brill, 2010), 155–178.

12)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에 대해 “루터교회”의 견해를 취한다.

13) “개혁파와 같이 청교도 역시 루터교회에는 전례, 성례신학. 교회 정치에서 지나치게 ‘교황주의’  요소가 남아 있다고 믿었다.”(Coffey & Lim. Cambridge Companion의 서론, P. 2.)

14) Trueman, “Puritan Theology as Historical Event,” p. 253.              

15) 1714년에 하노버 선거 후 조지 루이스가 조지 1세로 영국 왕의 보좌를 차지했다.

16) 1828년까지 실시된 것으로, 공직 임명에 대해 종교적 심사를 부여하고, 그 중 특히 일 년에  한 번 잉글랜드 교회 성찬식에 참여할 것을 정부 관리와 고용인에게 요구한 법이다.

17) 곧 간단하게 ‘비국교도’와 ‘비국교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18) 1689년에 실시된 ‘관용령’은 당국에 등록된 예배 처소에서 회집을 조건으로 삼위일체를 믿는 프로테스탄트 비국교도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했다.

19) 1732년경부터 런던 경계 16km 안에 있는 침례교회, 회중교회, 장로교회는 각각 비국교회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정치 활동 위원회나 압력 단체로서 행동 통일을 하는 대표단을 구성했다. 심사령과 희사법의 폐지로 그들의 수고는 큰 결실을 맺었다.

20) 1721년부터 매년 공공 기금에서 가난한 비국교회 목사와 과부들을 지원하도록 ‘왕의 하사금’이 각각 침례교회, 회중교회, 장로교회 대표들에게 배분되었다. 이 제도는 1857년에 중지되었다. 21) Norman Sykes, The English Religious Tradition: Sketches of Its Influence on Church, State, and Society (London: SCM Press, 1953), 66.

22) Tom Webster, Godly Clergy in Early Stuart England: The Caroline Puritan Movement, c. 1620–1643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333–35.

23) “Preliminary Principles,” Form of Government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Philadelphia: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1839), Bk. 1, Ch. 1, Sec. 4.

24) Beeke and Pederson, Meet the Puritans, xviii–xix.

25) J. I. Packer, An Anglican to Remember—William Perkins: Puritan Popularizer (London: St. Antholin’s Lecture\-ship Charity Lecture, 1996), 1–2.

26) 예를 들어 우리는 행위 언약과 언약 및 새 언약 관련 장들에서 통일성과 다양성을 본다.

27) 우리는 청교도 저술가들에 대해 상술하는 전기 자료나 그들의 출판된 책들의 목록을 많이 소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비키와 페더슨이 쓴 “청교도를 만나다”(Meet the Puritans,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0)에서 이미 그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50년대에 청교도 문헌이 다시 유행할 때 재출간된 무려 150명에 달하는 청교도의 생애 이야기를 다루고, 거의 700권에 달하는 재출간된 청교도 관련 작품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제공하는데, 일종의 본서 자매 편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28) 코피와 림은 청교도가 율법주의자였다는 것을 넌지시 함축하는 것 같다. “개혁파처럼 그들도 대체로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반정립 관계를 제한하고 기독교적 삶과 지역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의 역할을 강조하며, 잉글랜드와 미국에서 경건한 제네바 사람들을 재창출하려고 애썼다.(때때로 엄청난 성공과 함께) 이런 율법주의는 그들 내부에서 ‘율법 폐기주의의 반란’을 야기하기도 했으나 심지어 급진파 청교도가 도덕법, 예정론, 유아세례에 대한 정통 개혁파 관념을 거부했을 때도 그들은 여전히 개혁파 전통을 옹호했다.”(Cambr’ge Companion의 서론, P. 3)

29) Packer, A Quest for Godliness, o.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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