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 Dei’ 선교는 성경적인 올바른 선교인가?

초대교회에서부터 엄밀하게는 구약시대로부터 교회의 관심은 선교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인간의 개인적 영혼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전에 따라 선교에 대한 여러 형태의 사상과 주장들이 나타났다. 금세기에 들어와 과학문명이 발달하면서 인본주의 사상은 그 절정을 이루었다고 보여진다. 이와 발맞추어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마저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적인 이성(理性)과 경험(經驗)을 토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그 사상적 발전을 이룩하려는 노력을 계속 시도해 왔다.
전통적으로 선교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교회의 활동으로 이해 되어왔고 성경이 말하는 선교는 구원론 개념이다. 카이퍼(R.B. Kuiper)는 그의 ‘전도신학’(God Centered Evangelism) 서문에 바빙크 (J.H. Bavinck)의 선교의 정의를 소개 하면서 “선교란 교회의 복음을 전달하는 활동 곧 교회를 통해 행해진 본질상 그리스도의 활동이다.”라고 했다. 또 글로버(R.H. Glover) 박사는 기독교 선교의 정의를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어느 곳에서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자유주의 계통의 신학자들은 선교의 정의를 다르게 내린다. 필자는 본고에서 선교에 대한 다른 정의 소위 ‘Missio Dei’(하나님의 선교) 사상을 소개하고 그를 비판하고자 한다. ‘Missio Dei’라는 용어 자체만으로 보아서는 대단히 성경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그 내용을 알고 보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Missio Dei’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독일 신학자 하르텐스타인(Hartenstein)이고 1952년 7월 제5차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빌링겐(Willingen) 대회 때 이 개념을 채택한 후 많은 개신교도들의 선교관을 지배 이때부터 에큐메니컬(ecumenical)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빌링겐에서 채택된 ‘Missio Dei’ 선교개념은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모인 제3차 WCC대회와 1964년 보세이(Bossey)에서 모인 WCC의 ‘회중의 선교조직’(Missionary Structure of The Congregation) 연구 회의에서 선교가 ‘하나님 활동의 세속성의 개념’(The Secular Character of God’ s Activity)으로 더욱 구체화 되었는데 이 ‘Missio Dei’의 선교개념은 교회생활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오늘날 목회나 전도는 물론 교회의 사회사업, 구제,민권운동, 혁명운동 등도 다 선교로 불리는 것은 이 ‘Missio Dei’ 선교개념의 영향이다.
1960년 중엽이후 웁살라(Uppsala City in Sweden) WCC대회 준비활동에서 서구와 북미 실행위원회가 1967년에 ‘타자를 위한 교회’(The Church for others, WCC)라는 제하의 보고서에서 ‘Missio Dei’ 선교 목적이 사회조화(社會調和)라는 의미에서 ‘샬롬’(shalom)은 ‘평화 건설’이라는 것과 이 ‘샬롬’(여기서는 하나님나라와 동일한 의미)이 유색인종의 해방,인도적(人道的)인 노사관계,전원개발에 대한 다양한 시도,사업과 직업윤리 추구,지적인 정직과 성실에 대한 관심 등 이라고 정의했다.
빌링겐 대회는 ‘Missio Dei’ 선교개념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이 사상의 정신적 지주인 호켄다이크(J.C. Hoekendijk)는 바로 이 ‘평화’(shalom)를 구원의 상징으로 본다. 또한 WCC 웁살라대회 서구 실행위원회의 한 회원인 데이비스(J.G. Davies) 교수도 ‘세계와의 대화’ (SCM,1967)라는 그의 저서에서 인간화(人間化)와 화해(和解)를 샬롬과 하나님의 나라 건설과 동일시(同一視) 하면서 이것들이 곧 우리가 추구하는 ‘선교의 목표’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선교개념은 곧 구원이 궁극적으로 세계역사 속에서 즉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은 연속적인 간섭과 혁명적 행위들을 통해서 이 세계의 목표를 달성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역사적 혁명(historical revolution) 즉 세상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선교인 ‘Missio Dei’를 통해 구원을 주는 선(善)이 우리에게 접근 해 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인 ‘Missio Dei’의 강조점은 사회행동과 소외된 사람들(underprivileged people)의 집단적 구원에 그 특색을 두며 그 사상은 하나님이 선악 간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므로 인간의 눈에 비친 모든 정치,경제,사회의 선(善)은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인들은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그 선(善)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위해 선교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Missio Dei’ 신학사상은 교회보다는 세상을 하나님의 활동 무대로 더 중요시하므로 교회가 무시당한다. 그들은 교회의 본질적 역할을 논하면서 교회는 선교의 출발점도 아니고 목표도 아니며 교회가 구원의 중보자(mediator)도 아니라고 한다. 교회는 단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수단이요 도구일 뿐 구원(救援) 즉 평화(shalom) 는 세상에서 이루어지며 교회 자체는 세상과 함께 구원의 기쁨을 나눌 뿐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선교는 사회구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사상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신학적 배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역사에 활동하신 것 같이 현 역사에도 활동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활동은 구원을 위한 종교적 활동보다는 정치,경제,사회 영역이다. 이 원리에 근거하여 사회정의(社會正義)를 위한 투쟁도 그들에게는 선교로 간주된다. 또한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그 신학적 배경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주권은 신자들의 영적진리를 위한 투쟁보다는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고취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인류의 평화를 실현코자 하는 교회의 모든 활동이 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평화(shalom)를 강조한다. 그들은 신약의 평화(eirene)는 외면하고 구약의 평화(shalom)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다. 그 이유는 신약의 평화가 하나님과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를 이룸으로써 생긴 평화를 지칭하는 개념인데 반하여 구약의 평화(shalom)는 더 현세적인 의미를 강하게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와 세상 평화와는 다르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며 이 세상에서는 그 평화를 말미암아 오히려 불화(不和)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사회정의와 평화를 선교의 목표로 삼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교회의 전통적 선교와는 방향이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성경적 타당성도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그들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대해서도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본질(essence)로 써가 아니라 기능(function)으로만 이해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조력(助力)함으로써 세상의 사건들을 변혁하는 일에 교회의 존재 이유가 있다는 식이 되어버린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오히려 교회가 세상 아래 예속되어야 하는 것처럼 되고 만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의 모든 분야를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니다. 세상 정치,경제,사회적 문제는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시며 그리스도의 교회가 전적으로 책임질 영역은 아니다. 교회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본질적인 임무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행위이다. 그리고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성도라야 제2단계라 할 수 있는 선교로 옮겨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소위 행동신학(Doing Theology)의 기초를 제공함으로써 기독교 신학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1960년대 세속화와 인간화를 거쳐 1970년대에 해방화로 발전하는 데 이것은 곧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서구의 정치신학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 후 남아메리카의 신학자들이 서구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정치신학에 접하게 되어 해방신학으로 발전했다.
또한 한국에서 일어났던 ‘인권운동신학’과 ‘민중신학’ 역시 결국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근거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은 복음주의 선교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적지 않은 신학자들이 복음주의 선교와 에큐메니칼선교(Ecumenical mission) 즉 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와의 조화(調和)를 시도했다. 영국의 존 스토트(John R.W. Stott)같은 이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제 끝으로 그들의 신학적 배경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구약 이스라엘역사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현실적 상황에 그대로 적용코자 하는 시도는 이스라엘의 신정국가(神政國家)의 특성을 오해한 결과이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본문들은 구속자(救贖者)에 대한 계시를 알려 주는 특수한 것이므로 우리의 현재생활에 모범적으로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구약은 구원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물론 구약에 모범적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요소들 역시 족장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전파된 구속자(救購者)에 대한 계시를 알려 주는 것이다. 즉 구약의 모범적 요소는 일단 오실 메시아와 관련시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메시아 왕국과 오늘날 존재하는 세상의 국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메시아와 관련된 하나님의 특수한 계시사역을 인간적 경험론에 의해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여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그들의 오류라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主權)의 성격에 대한 오해이다.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주장하는 그들의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외면한 주장이다. 즉 신약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의 ‘주(主)가 되심’은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지 않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부활을 통해 ‘주와 그리스도’ 가 되게 하셨다고 선언한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용되는 ‘주’(主) 라는 칭호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영광을 지칭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으며,그것은 그리스도의 왕의 신분의 신적인 성격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 큐리오스)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빌 2:9-11)
게할더 보스(G. Vos) 는 이 말씀을 말하면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란 곧 예수님의 낮아지신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부여한 ‘주’(主, 큐리오스) 라는 칭호라고 했다. 이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 주장하는 바와는 다른 각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주권)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비체돔(G.F. Vicedom)의 ‘하나님의 선교’를 우리말로 옮긴 박근원 씨는 그 책 말미에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신학개념을 20세기 세계교회 운동의 과정에서 발굴된 기독교 진리를 표현하는 대표적 개념으로 다양한 복음적 광채를 지니고 있다.”고 덧붙이면서 그 사상은 곧 세계교회를 지배하는 신학사상의 핵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처럼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사상에 적극 동조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이해가 아니라 인본주의 신학의 산물이다.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놓인 성도가 강조된 후 그 바탕 위에서 인류에 대한 수평적 사랑이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가 먼저 우선적으로 올바로 분명하게 형성되지 않은 채 먼저 수평적 인간관계를 펼쳐는 평화(shalom)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평화라 할 수 없다.
교회의 선교사명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과 연결되어 있으며 비록 성도들이 수고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하나님의 선교는 언약의 개념 안에서만 가능하다. 아울러 선교의 본질은 복음의 진실 된 선포에만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억눌린 자, 억울한 자, 가난한 자들을 이야기할 때 현상적으로 그렇게 드러나는 자들 뿐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알지 못해 영적으로 억눌리고 사탄의 궤계에 빠져 고통 하는 자들을 더욱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까지도 계속 강조되고 있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사상으로부터 출발한 WCC 기독교 연합운동과 행동신학(Doing Theology) 등은 경계 되어야 할 것이다.(*) 글쓴 이 / 이광호 목사(영남대, 경북대학대학원, 고신학대학원(M.Div.), ACTS(Th.M.) 조직신학, 대구가톨릭대학(Ph.D.) 비교종교학, 고신대, 고신대학원, 영남신대 교수, 개혁신앙연구회 대표) 출처 / http://www.godswill.com.br/xe/Kwangho37/45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