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개혁주의 교회론

개혁파 정통신학 

개혁주의 교회론

1회론의 역

1.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관

(1) 교부시대                  

속사도 교부(Apostolic Fathers)들과 기독교 변증가(Christian apathetic)들은 일반적으로 교회(敎會)를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 또는 ‘소유하기 위해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시했을 뿐 특별한 구별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후 2세기 후반부터 이단(異端)들이 발흥(發興)하자 교회는 참된 교회의 외면적 특성들이 어떤 것인지를 정리하여 지명(指名)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참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몸이라는 것과 아울러 교회의 보편성(普遍性)과 통일성(統一性)을 강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즉 이 땅에 다수의 지(支) 교회들이 있을지라도 교회는 다수가 아니라 하나라고 하였다. 그리고 초대교회 교부들은 구원과 교회를 나눌 수 없이 연결시켜서 구원은 교회 안에만 있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했다.        

그러다가 주후 300-750년 어간에 교회는 세상의 외면적 권세와 영광으로 발전(특히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하게 되자 속화와 부패를 초래하게 되었고 결과로 교회의 순결과 엄격한 권징을 주장하는 종파들이 생겨 논쟁이 일어났다.

키프리아누스(Cyprian)는 그런 종파들과 대결하기 위해 교회 감독제 교리를 최초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는 감독들을 사도들의 참된 후계자로 보고 교회가 있는 곳에 감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감독들에  의해 교회의 통일을 구성하려 했다. 그리고 감독들에 굴복하지 않는 자들은 교회의 교제와 구원까지도 상실하게 했다.

한편 어거스틴(Augustine)은 교회의 권징(勸懲)을 교회의 시인하면서도 모든 교회가 절대적인 순결(純潔)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참된 교회는 감독직의 계승으로 사도적인 권위가 존속하는 보편의 교회(Catholic church)라고 주장함으로써 후일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로마 가톨릭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同一視)하는 주장의 길을 준비해 주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2) 중세기의 교회관

이 시기에는 키프리아누스(Cyprian)와 어거스틴(Augustine)에 의해 발전된 교회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약간의 손질을 가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론에는 그렇게 큰 발전이 없었으나 교회 자체는 긴밀히 조직된 절대적 교직(敎職) 정치체제로 더욱 발전되어 위대한 교부들의 근본적인 교회 관념이었던 성도의 교제는 무시되어 버리고 외면적 조직에만 치중하게 되었다.(특히 스콜라 신학자들에 의해) 

그러다가 마침내는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교황(敎皇)이 교회의 절대적 군왕(君王)이 되기까지 이르렀고 세상 제왕의 권세는 교황의 권위로부터 나온다고 하여 교황은 세상 주권자들에 대해서도 주장하는 권세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로마 가톨릭교회는 죄인들의 구원 문제보다도 세상 정치문제에 더 치중하게 되어 교회는 점진적으로 속화(俗化)되었고 성직자들은 성직을 매매(賣買)하기까지 했다.    

2.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관

종교개혁 시대는 특히 루터와 칼빈에 의해 이상과 같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관에 대항하고 그 교회관과 관계를 끊었다. 루터와 칼빈은 66권의 성경을 하나님의 절대권위의 유일한 원천으로 또 성도의 신앙과 본분에 대한 절대 무오한 유일한 법칙으로 믿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신앙과 생활에 관한 사건들에서 무오하다는 교황 무오설과 교직자의 독점적 성경 해석권 그리고 성경에 외경을 포함시킨 주장들을 반대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또한 교회의 개념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화되고 그에게 연합된 성도들의 집단으로 보았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형식적 교회관에도 대항했다. 교회란 본질적으로 참 신앙의 결속에 의해 연합된 모든 성도의 교제로 구성되며 표면적 조직에 그 본질이 있지 않다고 했다.

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이 교회에 속하며 지상의 참 교회는 영적 교제에 관한 한 불가견적(invisible)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성례(聖禮)가 바르게 시행되고 권징(權懲)이 유지되는 곳에 가견적(visible) 형태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이 다 제사장들이며 교직자들만의 별다른 반열(班列)이 아니라고 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렇게 로마 가톨릭의 교회관과 관계를 끊었으나 교회의 어떤 특수한 요소들에는 개혁자들 간에 서로 의견 통일을 보지 못한 것도 있었다. 루터는 성례(聖禮)를 통해 구원을 나눠준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특별 제사직의 개념과 교황의 군주적 권위 개념 등을 배척하면서 교회는 참된 신자들의 영적 교제로 보았다.

그리하여 루터는 모든 신자들의 제사직의 성경적 개념을 회복했고 교회의 통일성을 주장했으며 교회를 불가견적인 면과 가견적인 면으로 구별하되 이것은 두 교회가 아니라 동일(同一) 교회의 두 방면일 뿐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가견적 교회는 항상 경건한 신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重生)하지 못한 가라지와 같은 사람들도 섞여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루터는 교회가 국가 위에 있으며 주장권을 가진다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관념에 대해 반대한 나머지 다른 극단으로 너무 치우쳐 실질적으로는 교회가 말씀 전파 이외의 교회가 하는 모든 일에 교회가 국가에 굴복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재세례파는 루터의 이런 입장에 불만을 품고 신자들만의 교회라는 것을 역설하고 가견적 교회와 은혜의 방편을 거부하고 교회와 국가의 완전 분리(分離)를 요구했다.

그러나 칼빈과 개혁파 신학자들은 교회는 본질적으로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라는 것을 고백함으로 루터의 견해에 동의했으나 루터와 같이 교회의 통일성과 거룩성을 직위, 말씀, 성례 같은 교회의 객관적 규례들에서 추구하지 않고 무엇보다 먼저 성도들의 주관적 교제에 치중했다. 이 같이 그들은 교회의 가견적인 면과 불가견적인 면을 구별하였으나 루터와는 그 형식이 달랐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교회의 참된 권징의 신실한 시행에서도 그러했다.

이처럼 칼빈과 17세기의 개혁파 신학자들도 교회가 국가에 굴복한다는 관념을 어느 정도는 인정했지만 루터파 교회보다는 더 고도의 독립성과 권력을 가진 형식의 교회 정치를 주장했다.

3.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관

이 시기는 이성주의(理性主義)가 교회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성주의는 신앙적인 사건에는 무관심하고 교회를 인간적인 결사(結社)들과 동등시한 나머지 심지어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세상에 존재해 오는 그런 교회를 창립하기로 의도하지 않았다.”고까지 했다.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는 교회를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로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인의 형제 사랑의 정신에서 교회의 본질을 찾았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를 본질적으로 사회단체처럼 그리스도인의 한 집단(集團)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리출(Albrecht Ritzschl, 1882-1889)은 또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를 구별하는 대신 하나님의 왕국(王國)과 교회를 구별했다. 그는 왕국은 사랑의 동기로 동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집단이요, 교회는 예배를 위해 모이는 동일 집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 같은 견해들은 예배의 작용을 외면적인 조직에 국한하여 다른 신자들의 친밀한 교제를 가능케 하는 것뿐으로만 보는 것이니 이는 확실히 성경에서 멀리 떠난 관념이다. 이처럼 현대 자유주의는 교회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으로 보지 않고 다만 사회적인 집단 혹은 인간적인 제도로만 생각한다.

유형 교회 : 교인들이 모인 공동체무형 교회 : 성도들의 영적 공동체
전투적 교회 : 세상에서 마귀와 대적승리한 교회 : 천상에서 안식을 누림
제도적 교회 : 교회의 외적 조직과 정치유기적 교회 : 참 성도간의 영적교제
* 택함 받은 자와 단지 교회에 다니는 택함    받지 못한 자가 함께 섞여 있다.* 택함 받은 자들만 있다.

2장 교회의 다면적 구분

교회는 개혁파 신학이 강조하는 것처럼 외면적인 조직이 아니라 내면적인 성도의 교제를 그 본질로 한다. 이것은 교회의 명칭에서도 분명하게 밝혀진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교회는 교회를 보는 각도에 따라 다음과 같은 구분이 가능하다.

1. 전투하는 교회와 승리한 교회

(1) 전투하는 교회

전투적 교회(church militant)는 지상에 있는 교회를 말하며 이 지상 교회는 공증 권세 잡은 마귀와 죄악에 대해 끊임없이 영적 전투를 계속하는 것을 특색으로 하며(히 12:4), 따라서 이 영적 전투는 인류 시초부터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되는 전투이다.

그러면 왜 지상교회는 싸워야 하는가? 교회 머리되신 예수께서 싸우시고 있기 때문이며(계 19:11), 성경 말씀이 마귀와 죄악에 맞서 싸우라고 권면하고 있기 때문이다.(엡 6:11-18) 그러므로 바울도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딤후 4:7)고 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는 거룩한 전투(戰鬪)에 부름 받아 그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는 사상적인 대적과 도덕적인 대적 그리고 교회를 대항하는 모든 악한 세력들과 영적 투쟁을 계속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십자가의 군기를 높이 들고 진리를 파수하여 교회의 성결을 보존하기 위해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예수께서 “내가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이렇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말은 교회가 음부의 공격을 받을 것을 전제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받는가?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요 15:18)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의 죄악과 마귀와의 싸움을 중단하게 되면 죄악에 삼키게 됨으로 교회가 영적싸움을 중단하고 세속과 타협하려는 것은 자살 행위와 같은 것이다. 왜 오늘의 자유주의 교회가 세속화를 부르짖는가? 그것은 이 같은 교회의 영적 싸움을 중단하자는 갓이다. 우리는 날마다 영적으로 싸워야 한다. 싸움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다.

그러면 어떻게 싸워야 되는가? 그것은 공격적인 동시에 방어전으로 해야 된다.(엡 6:16-20, 히 12:4 참고) 오늘날처럼 교회가 파수(把守)와 방어전만 위주로 하면 그것은 소극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후퇴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걸고 복음을 굳게 파수함과 동시에 또한 비(非) 진리를 들어내고 마귀와 더불어 힘써 싸워야 된다. 이렇게 날마다 영적 선한 싸움에 잘 싸운 자들은 세상을 떠날 때 승리한 교회에 참가하게 된다.(히 12:23)

(2) 승리한 교회

승리한 교회(church triumphant)는 세상에서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승리를 얻는 성도들을 축하하는 천상(天上)의 교회를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지상에서도 승리하고 있다. 그것은 이 싸움은 승리가 이미 약속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요 16:33, 롬 8:35-37) 그러나 하늘에 있는 천상(天上) 교회는 특별한 의미에서 승리적인 것이다. 지상 교회의 전투와 수난과 사망에서 해방되고, 영광중에서 편히 거주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며, 성전에서 즐겁게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와 승리한 교회뿐 아니라 또한 수난(受難) 받는 교회(a suffering church)를 주장하면서 이 수난 받는 교회는 지상에 있지 않고 ‘하늘’(heaven)에는 아직 들어가지 못하고 연옥(燃獄, purgatory)에 남아 죄의 정화(淨化))를 받고 있는 신자들을 포함한다는 비(非) 성경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2.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종교개혁 이전에는 이런 구분이 없었다. 종교개혁 이후 특히 루터가 최초로 교회를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했고 다른 개혁자들이 이를 따랐다. 이것도 동일한 교회를 양면으로 논한 것이다. 즉 교회를 현실에 있는 대로 보면 보이는 교회고 그 본질적으로 생각할 때는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영혼과 몸에 비유할 수 있다.

(1) 가시적교회(有形敎會)

가시적교회(有形敎會, visible church)는 신앙고백, 조직, 행정, 복음사역 등으로 나타나며 신앙고백을 한 후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하는 모든 교인들과 그 자녀들로 구성된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구원을 적용시키며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 구원을 전파하기 위해 세우신 수단적인 의미의 교회이다. 그러나 이 가시적인 교회는 중생(重生) 한 신자와 중생하지 못한 이 두 가지가 신자가 섞여 함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마 13:24-30,36-43, 행 5:1-16) 가시적교회의 이런 두 가지 신자의 혼합(混合) 때문에 많은 시험과 고충을 겪어 왔으며 그 발자취를 교회사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 칼빈주의 자들은 이 가시적 교회를 어떻게 보는가?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가라지와 알곡 즉 중생한 자와 중생하지 못한 자를 구별하기가 힘들고 또 할 수도 없다. 어떻게 인간이 구원을 받은 자와 구원을 받지 못한 자를 분별하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분별(分別)은 못한다 할지라도 교회는 교회의 정화(淨化)와 치리(治理)와 권징(權懲)을 위한 노력을 쉬지 말아야 한다.        

(2) 불가시적교회(無形敎會)

이 불가견적교회(無形敎會, invisible church)는 하나님의 예정(豫定)을 따라 택함을 입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우리는 누가 중생했는지 누가 택함 받았는지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므로 불가시적 교회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한 교파나 한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지역과 여러 시대 그리고 여러 교파 속에 있으며 지역이나 시대나 교파는 다를지라도 영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모두 하나가 되어 있다.

이렇게 불가시적교회의 구성 요소는 본질적으로 영적 차원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만이 식별(識別)하실 수 있고 육안(肉眼)으로는 식별하기 어렵다. 바울은 에베소서 1:3-6에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중략)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라고 했다. 창세 전에 그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신 일을 사람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불가시적교회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며 이 불가시적교회만이 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3) 유기적교회와 제도적교회

유기체(有機體)와 조직체(組織體)의 구별은 가시적 교회에만 적용되는 구별이니 가시적 단체로 간주된 교회의 상이한 두 방면에만 주의를 요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두 구분을 서로 연관시켜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유기체란 식물, 동물, 사람의 신체같이 살아 있는 그 무엇이다.

둘째, 조직체는 비록 산 사람을 구성한다 할지라도 그 자체 안에는 생명이 없다. 그런데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인 유기체와 그리고 건물, 성전, 집과 같은 조직체로 아울러 말한다.(롬 12:5, 고전 12:, 13:,  마 16:18, 엡 2:20-22, 행 14:23)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유기체인 교회가 제도(制度)와 조직(組織)을 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때부터 교인이 모이는 곳마다 교회는 조직을 하여 신앙과 봉사와 선교에 효율성 있는 활동을 지속해 왔다.        

교회는 본질상 그리스도의 몸이요 유기체(有機體)이다. 그리고 이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시행하여 좋은 결과를 가져와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제도와 조직이 필요하다. 이렇게 조직된 교회를 제도적교회(institutional church)라고 한다.

제도로서의 교회는 죄인들을 인도하여 회개와 구원에 이르도록 돕기 위한 방편(方便)이다. 다시 말해 교회 조직과 제도는 유기체로서의 교회를 이룩하기 위한 목적으로 움직이는 방편이다. 그러므로 제도로서의 교회는 여러 가지 시설을 갖추고 유기체로서의 교회에 영적 생명을 공급하는 일에 이바지하도록 있는 것이요 교회가 어떤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교회 제도가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3장 교회의 (屬性)

1. 교회의 통일성

교회의 통일성(統一性)이란 만대(萬代) 만국의 교회가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의미한다. 비록 교회가 외적으로 볼 때는 여러 모양으로 갈라져 외부적 연결을 위한 일이 없을지라도 실상은 영적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통일이며 따라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에 의한 통일이며 성령과 신앙에 의한 통일이다.(엡 1:10, 2:20-22, 4:4,5, 요 10:l6, 15:4, 롬 12:5, 고전 6:7, 12:12,13)

그리고 이 통일의 배후에는 만유를 통일하시는 ‘한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속성을 그들의 교직(敎職) 계급 조직체에 귀속시키고 그들 교회만을 인정하고 만국을 포괄하려는 세계적인 조직에서 교회의 통일을 찾는다. 그러나 이 견해는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개혁파 교회는 교회의 속성을 주로 불가견적 조직체로서의 교회로 보고 이차적으로 가시적 조직체로서의 교회에 둔다. 그리하여 교회의 통일성은 내면적이고 영적인 성격을 가지지만 외면적 통일도 제외하지 않는다. 성경은 불가시적교회의 통일성뿐 아니라 또한 가시적 교회의 통일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2:12,13, 엡 4:4-16)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할 것은 성경이 가시적교회의 통일성을 언급하고 있다고 하여 세계기독교협의회(WCC)가 주장하는 그런 교회 외적인 통일을 위한 노력을 할 수 없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벌써 외적 조직체를 통일에서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고 오히려 교권주의, 형식주의, 의식주의(儀式主義) 등의 폐단을 가져오지 않았는가! 교회의 내면적, 정신적, 신앙적 통일이 없는 곳에 참된 교회의 통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의 교리는 어떻든지 간에 외형적으로 물리적으로 하나가 되려는 현대 자유주의자들의 에큐메니칼운동은 지지할 수 없다.  

어떻게 신앙과 성경의 진리를 희생시켜 가면서 교회의 외면적 통일을 감행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의 통일성을 말할 때는 교회가 어느 나라에 있든지 간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같은 성령으로 교통하고 신앙고백과 소망과 사랑이 동일한 영적인 통일성을 위주로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교회의 거룩성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덕성은 거룩성 즉 교회의 성결(聖潔)이다. 성경은 교회가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롬 6:22, 고후 7:1, 살전 5:23, 요일 17:3:6-9) 그러나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개념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사이에 크게 다른 점이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거룩성을 외적인 의식(儀式)에 치중하여 의식(儀式)을 통해 교회가 거룩해진다고 주장하고 개신교는 내적인 도덕생활에 두고 의식(儀式)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성령의 역사로 거룩해지는 것을 강조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그의 중보적 의(義)의 전가(轉嫁)로 그의 의(義)를 힘입어 객관적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거룩하고 주관적 의미로는 성결의 성화적(聖化的) 역사(役事)로 거룩해지며 또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봉헌된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그리고 이 의미의 성결(聖潔)에 도덕적 거룩이 따라오는 것은 물론이다.

하나님은 모세와 사도들을 통해서 신구약 교회 백성을 거룩한 백성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출 19:6, 벧전 2:9, 고전 3:16,17) 여기서 또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 자체가 이미 이상과 같은 거룩에 도달해 있다고 하여 거기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거룩을 파괴하는 악한 세력들, 악마, 세상, 정욕 등과 계속해서 싸워 교회의 거룩성을 지켜야 된다는 점이다. 오늘 날 교회 세속화(世俗化) 운동이 맹렬히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하비콕스(Harvey Cox)는 1965년 ‘세속도시’(The secular city)라는 책을 써서 온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속화 운동의 세찬 바람을 인정하고 이런 세속화 현상을 신학적으로 성찰하면서 오히려 이를 가속(加速)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역하기 위해 이 세상 속에 세속화되어 야 될 것을 강조했다. 그와 함께 몇몇 사람들은 세속신학을 독특한 의제(agenda)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속화되어야 할 이유로서 이 세속화 된 도시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예수님도 세속화된 세상에 오심으로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가(요 17:14)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성경의 교훈과 하나님의 백성은 죄악 된 세상에서 소금이 되어야 된다는(마 5:13) 교훈을 왜 모르는가? 교회가 성결(聖潔)을 잃고 세속화(世俗化) 되면 거룩이라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상실하는 것이니 바다에 떠 있는 배와 같이 교회는 세상에 있으나 결코 세속화를 용납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3. 교회의 보편성

교회는 보편성(普遍性, catholicity)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모든 시대나 장소 또는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모두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보편성이란 무형교회에 적용되는 것이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특정 교파에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즉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름과 달리 성경이 가르치는 보편적인 교회가 아니라 기독교 내의 별개(別個) 집단에 가깝다.

4. 교회의 불멸성

세상의 역사는 크고 작은 나라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의 기록이다. 많은 나라들이 오고 갔다. 가장 크고 강한 세계의 제국(帝國)도 일어났다가는 쇠퇴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만대(萬代)에 계속하여 불멸적(不滅的)이다. 여기서 불멸이라 함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세계 전(全) 교회를 의미하며 지(支) 교회나 교파에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지(支) 교회나 교파는 종종 멸절(滅絶)되기도 하지만 전체 교회로서는 영원하며 불멸적이다.

주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하신 말씀은 말세(末世)에 신자가 적을 것과 또는 많다고 할지라도 참된 신자가 많지 않을 것을 뜻하는 것이며 전연 교회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회의 불멸성을 확언하고 있다.(사 54:10, 마 16:18) 특히 마태복음 16:18에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은 분명하게 이를 확언한다.          

또한 교회는 무적(無敵)이다. 물론 개 교회는 부패할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으나 전체로서의 교회는 불가시적 교회는 물론이고 가시적 교회까지도 불멸적이다. 세계역사를 보라. 교회는 지금까지 부단히 음부의 권세의 가혹한 특히 로마 황제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여러 번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직면했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특별 섭리로 오늘날까지 견디어 왔다. 음부(陰府)의 권세는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교회 내적으로도 이단(異端)과 사설(邪說)이 물밀듯이 일어나 강하게 성도를 유혹하고 교회 존속(存續)을 위협했으며 오늘날에도 자유주의 사상이 물밀듯이 교회에 침투하고 있지만 보수적인 참된 신학이 전적으로 압도되지 않고 진리를 수호하게 되는 것은 왜 그런가? 이는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성령으로 교회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겠다는 약속대로 지키시고(요 16:13) 도우시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세상 나라들이 일어나서 교회를 박해하고 교회 내적으로 이단 사상과 세속화운동과 자유주의사상이 일어나 교회와 신자들을 지속적으로 비(非) 기독교화 하려 할지라도 주님이 함께하시는 교회는 불멸(不滅) 할 것이며 음부(陰府)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4장 교회의 권세

1. 교회 권세의 원천

교회 권세(權勢)의 원천(原川)은 오직 그리스도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창립(創立)하셨을 뿐 아니라 교회의 머리로서 그리고 왕으로서 교회에 권세를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대일 것이요, 내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고 하셨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다는 것은 곧 영적 권세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 권세는 매며 푸는 권세 즉 천국(교회)의 영역에서 금하고 허용하는 일을 결정짓는 권세다. 다시 말하면 이 권세는 교회의 치리권(治理權)을 의미한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 말씀을 곡해(曲解)하여 베드로가 천국열쇠를 맡았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영혼을 천국이나 지옥에 보낼 수 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베드로처럼 인간의 영혼을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든지’라고 했지 ‘누구든지’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는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행한 행위에 관한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이 권세를 누구에게 주셨는가? 마태복음 16:19을 보면 물론 베드로에게 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 마태복음 18장에서 교회 권징(權懲)의 원리를 말씀하실 때 하신 말씀을 보면 분명히 베드로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8:18에 “진실로 너희(제자들)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이라고 하셨다.

또 요한복음 20:23에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모든 제자를 가리킨다는 것이 더욱 분명하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6:19에서 하신 말씀은 사도들 대표로 베드로가 받은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된 이 권세로서 치리권을 행사한다.

지상 교회에는 정치(政治)가 필요하다. 죄가 교회에 침투(浸透)해 들어올 때는 치리를 해야만 교회 성결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치리권도 영혼의 지배를 위한 것이 아니고 개인 영혼의 성결과 교회 전체의 성결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대표인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권세)를 주셨다는 것은 모든 사도들에게 교회의 치리권을 부여하신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도들은 교회의 핵심이며 기초였기 때문에 모든 교회가 그들의 말씀에 제한을 받는다.(요 17:20, 요일 1:3) 그러므로 이 권세를 일차적으로는 사도들에게 주셨지만 아울러 모든 교회에도 이 권세가 확대된다. 이 사실은 다음의 신약성경 여러 구절들이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다.(행 15:23-29, 16:4, 고전 5:7,13, 6:2-4, 12:28, 엡 4:11-16)

2. 교회 권세의 성질

(1) 교회의 권세는 영적인 신령한 권세이다.              

교회의 권세는 어디까지나 신령(神靈)한 것이다. 이 권세는 신령하신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주신 것이며(마 16:19, 행 20:28),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능력으로만 행사되고(요 20:22,23, 고전 5:4,5), 불신자 아닌 신자에게만 전적으로 관계를 가지며(고전 5:12), 도덕적이며 영적인 방식으로만 시행되어야 한다.(고후 10:1-8)

그러므로 이는 국가의 권세와 다르다. 국가는 사람의 외면적이며 현세적인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정치를 대표하고 교회는 사람의 내면적이며 영적인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정치를 대표한다. 국가는 그 백성에게 그들의 외면적이고 세속적인 권리들의 소유와 향유의 문제들을 보장해주는 것을 목적하며 가끔 사람의 악행에 대항하여 폭력도 사용 한다. 교회는 악행과 대항하여 사람들에게 진리의 지식을 부여하고 영적 미덕을 양성하며 신적(神的) 교훈을 순종하는 생활에로 인도하여 영적 속박(束縛)에서 구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물리적(物理的) 신체적(身體的) 폭력(暴力)을 사용하지 않는다.(마 20:25-28, 요18:36,37) 뿐만 아니라 교회가 부여받는 이 치리권은 교회가 일반 사회단체가 아닌 까닭에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에만 관여하기 때문이다.

(2) 교회의 권세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종속적이며 사역적이다.

이는 성경 여러 곳에 명시되어 있다.(마 20:25,26, 23:8,10, 28:18, 고후 10:4,5, 벧전 5:3, 행 4:29,30, 20:24) 교회의 권세는 독립적이며 주권적인 권세가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조화(調和)되도록 행사하여야 되며 또한 성령님의 지도 아래서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행사되어야한다.(롬 10:14,15, 엡 5:23, 고전 5:4) 그리고 교회의 권세는 누리는 권세가 아니라 일하는 권세이다. 권세를 맡은 자는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사명을 다하여야한다.(딛 1:7, 벧전 4:10)

3. 교회 권세의 종류

교회의 권세는 그리스도의 선지자, 왕, 제사장 직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1) 가르치는 권세 – 교리권

교리권(敎理權)은 그리스도의 선지직의 반영으로 진리를 수호(守護)하고 전달함을 목표한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교회에게 주시고 교회를 진리의 수호자로 삼으셨기 때문에 교회는 말씀의 진리를 순수하고도 완전하게 보존해야 할 임무가 있으며 그리고 모든 불신앙과 오류(誤謬)를 대항하여 진리를 수호해야할 책임이 있다.(딤전 1:3,4, 3:15, 딤후 1:13, 딛 1:9-11)

세상에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과 적(敵) 그리스도들이 출현하여 진리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바른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모든 적대 세력들과 불신앙과 사이비(似而非, 짝퉁) 교리에 대항하여 진리를 수호하고 유지하여야 한다. 그뿐 아니라 교회는 죄인들의 회심과 성도들의 건덕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파해야 한다.(딤전 4:13, 딤후 4:2)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께서 복음 전파의 지상 명령을 주셨으니(마 28:18-20) 이 사명은 그가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교회는 또 주일학교나 사경회나 성경학교를 통해 성경을 열심히 가르치고 신자들로 하여금 매일 성경 읽기와 연구를 장려하여야 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음 진리를 수호하고 교리적 표준을 작정하여 사도적인 정통신앙을 대대로 보존하고 이단에 대항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

(2) 다스리는 권세 – 치리권

치리권은 그리스도의 왕권의 반영으로서 교회의 질서(秩序) 유지와 순결(純潔) 유지를 위해 주신 것이다. 교회는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므로 질서 유지에 특별히 힘을 써야 한다. 무질서는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기 때문이다.(고전 14:33,40)  

교회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이미 공포하신 율법을 맡아서 실시할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혁파교회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즉 로마 가톨릭교회는 사람의 양심을 구속하여 그 방법이 신적(神的) 율법의 동일한 형벌을 초래할 만한 법률을 제정하는 권위를 실질적으로 교회가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개혁파교회는 이 같은 권위를 주장하지 않고 오직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율법을 시행시킬 권리를 주장한다.        

야고보서 4:12과 이사야서 33:22에 있는 말씀대로 입법자(立法者)와 재판관(裁判官)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깨닫고 하나님께만 속한 권리를 사람이 취할 수 없으며 사람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율법과 동등 되는 율법을 새로이 재정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미 주신 율법의 적절한 시행을 위해 세부적 교회 규칙을 작성하는 것은 필요하다. 교회의 직원의 자격을 규정한다든지 공적 예배의 법식이라든지 권징에 관한 법규 등이다. 물론 성경이 여기에 관한 일반적인 원리를 교훈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보다 상세하게 규정함에는 교회에 자유가 허락되었기 때문에 교회 상황에 조절하여 규칙을 정할 필요가 있다.(고전 14:40)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의 규칙이 하나님의 말씀에 배치(背馳)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리고 교회는 교리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순결을 유지해야 되기 때문에 이단자와 범죄자를 거절하거나 배제하는 권세를 행사해야 하는데 이 권세의 본격적 행사는 권징에서 실시된다. 그러나 이 권세도 자율적(自律的)이 아님을 알아야할 것이다.

  ⓵ 권징의 성경적 근거

권징(權懲, discipline)의 성경적 근거는 신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출 30:33,38, 레 17:4,9, 13:46, 스 10:8, 눅 6:22, 12:42-48, 16:2, 마 16:19, 18:18, 요 20:23)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 권세를 교회에 주셨기 때문에 교회는 이 권세를 가지고 권징을 시행하는 것이다.(고전 5:2,7,13, 살후 3:14,15,  딤전 1:2, 딛 3:10)

  ② 권징의 목적

권징의 목적은 교회의 순결(純潔)을 유지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훼방(毁謗) 받지 않게 함으로써 그의 주권을 높이고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복을 받게 하고 범죄자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며 일반 교인들에게 악행에 물들지 않게 반성과 늘 근신(勤愼)하게 하는 교인들의 영적 건덕을 위함이다. 그리고 비록 범죄자를 교회에서 출교시키는 극단의 처지에 이른다 하더라도 이는 그 죄인의 구원을 위함임을 염두에 둘 것이다.(고전 5:5) 그러므로 교회의 권징은 항상 회개를 목적으로 한 것임을 유념하면서 권징에 임해야 하며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항상 회복(回復)의 문이 열려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③ 권징의 종류

교회 권징은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 단계의 양식에 의해 시행된다. 1)권계(勸誡), 2)견책(譴責), 3)정직(停職), 4)면직(免職), 5)수찬정지(受餐停止), 6)제명(除名), 7)출교(出校)

  ⓸ 권징 시행 방법

오늘에 와서 교회들이 권징을 태만히 하는 경향이 현저하여 교회 질서와 성결이 다 무너지고 유지되지 않는 실정이다. 그러나 성경은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았을 때는 칭찬하고 이단적 교훈과 이방적인 가증한 일을 용납했을 때는 책망한다.(계 2:2,14,20,24)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따라 권징이 실시되어야 되는데 어떻게 실시할 것인가? 그것은 교회의 직원들 특히 당회에서 집행하되 개인적으로 하고 세례 받은 신자에게 국한하여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권징의 사건을 취급하는 데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어야 한다.(마 18:15-18) 숨은 범죄(犯罪)는 은밀(隱密)히 책망(責望)하는 단계를 경유하고 만일 듣지 않을 때는 공적(公的) 권징을 받도록 한다.

그러나 이미 나타난 범죄는 속히 공적 권징을 받게 한다. 그리하여 범죄의 성질과 과실에 대응하여 앞서 종류에서 지적한 것처럼 권계, 견책, 정직, 면직, 수찬 정지, 제명, 출교 등의 치리를 행할 것이다.(장로교권징 조례 참고) 그러나 범죄자가 언제든지 분명한 회개를 보일 때는 교회가 그를  다시 받아야 함을 잊지 말아야한다.(마 18:18, 요 20:23, 고후 2:5-10)

3. 봉사하는 권세 – 사역

교회의 사역권(事役權)은 봉사(奉仕)하는 권세이다. 또는 이를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돌보는 긍휼(矜恤)의 사역권이라고도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반영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하여 속죄의 제물로 드리기까지 최대의 긍휼을 행하신 일을 본받아 행하는 사역이다. 그래서 이를 불쌍히 여기는 사역 또는 긍휼의 사역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리고 교회가 교인들에게 이 사역권을 행사하는 일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육신이 병들었을 때와 경제적으로 궁핍할 때 도와주는 일이다. 교인들이 병들어 고생할 때 심방하여 말씀과 기도로 위로하는 사역을 통해 회개하게 하며 믿음을 더 얻게 하고 그 가족을 감화하여 가족 중 안 믿는 자들을 믿게도 하고 신자들을 더욱 열심을 내게 하기도 한다.      

사람이 건강할 때는 신앙생활에 무관심하다가도 일단 병들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절실히 의지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는 결심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병자를 돌아보아 지혜롭게 심방하면 많은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가난한 교인을 구제하는 일에 대해서는 구약과 신약이 꼭 같이 강조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유무상통(有無相通)하여 교인의 핍절(乏絶)을 없앴다.(행 4:34) 사도 바울도 여러 교회로부터 구제금을 수집하여 가난한 성도들을 도왔다.(행 20:35, 고전 16:1,2, 고후 9:1,7,12-14, 갈 2:10, 6:10, 엡 4:28, 딤전 5:10,16) 그리고 야고보도 그것을 강조하였고(약 1:27,  2:15,16) 요한 사도도 그리 하였다.(요일 3:17)

초대교회는 사도들이 직접 구제 사업을 했다. 후에는 이 일을 집사(執事)들에게 맡겼다. 그들은 물질로 도와주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교훈하고 격려하고 위로하였다. 교회의 구제 사업은 세상 사람들의 사회사업이나 자선사업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 불신자들도 자선사업을 하고 정부도 이재민(罹災民) 구호활동을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명예로 동정을 표시하는 것뿐이지만 교회의 자선 사업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비를 베푸는 것이니 훨씬 고상하다. 그리고 교회가 구제할 때 불신자들에게도 구호의 손을 펴야 하지만(막 7:24-30) 믿는 지들에게 먼저 할 것이다.(갈 6:10)

제5장 교회의 정치

1. 교회의 여러 정치 형태

(1) 무정치주의 혹은 무교회주의

교회는 영적 유기체(有機體)로 만족하지 않고 외형적 조직체가 필요함을 이미 언급했다. 또한 성경도 교회 조직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는 교회 조직을 반대하고 영적 단체로서만 존속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이 있었는데 이것을 무정치주의(無政治主義) 혹은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라고 한다. 우리가 무교회주의라고 할 때 알아야할 것은 이들이 ‘에클레시아’(교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교회의 조직(組織)이나 정치(政治)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 역사상 무교회주의를 주장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영국의 ‘플리머스형제단’(Plymouth Brethren)과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가 있고, 교회 무정치주의로는 퀘이커(Quakers or Society of Friends)를 들 수 있다. ‘플리머스형제단’은 교인은 예수님께 속해 있는 것으로 족하기 때문에 교회가 조직체(組織體)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들에게는 목사나 장로를 세우는 일이 없고 교회 안에서의 무정치(無政治) 상태를 이루고 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그가 디모데후서 3:5을 주해하면서 기성교회의 존재 이유를 부정했다. 부정한 이유는 교회가 조직을 갖게 되면 부패하기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야말로 부패의 소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다. 신구교(新舊敎)를 막론하고 교회 안에는 부패로 가득 차 있으니 조직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또한 퀘이커 교파에서는 가견적 교회의 정치를 부정하고 교회가 정치를 시행함을 죄악시하였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교회정치는 교회의 신령한 생활을 해롭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모두 교회란 신자 각자의 마음속에 모신 주님으로 더불어 관계를 가지므로 서로 결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형식적인 조직체는 가질 필요가 없다고 한다. 형식적인 교회는 인간적 요소를 높이고 신적인 요소를 약화시킨 나머지 마침내 부패하고 퇴화되어 기독교 정신과 배치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교회의 원동력은 성령이신데 형식적인 교회는 성령의 자유로우신 감화와 역사를 막고 인간적인 요소를 앞세우게 된다고 하면서 교회의 형식을 죄악시한 것이다.

이는 그들이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를 혼동하여 양자를 동일시(同一視)한 데서 기인된 그릇된 주장이다. 그러면 무교회주의가 성경적인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성경이 교회 조직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며(롬 12:5, 고전 12:13), 또한 그들의 무교회 주장이 성경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고 현실 교회의 부패를 너무 심하게 공격한 나머지 그 도수가 지나쳐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순결(純潔)을 옹호하여 기성교회를 공격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교회 무용론(無用論)까지 주장하는 것은 너무 치우친 것이다. 교회가 조직체이기 때문에 부패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자동차가 어쩌다 사고를 내고 손해를 입혔다고 해서 자동차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교회가 부패했다면 개혁하고 순결을 지키도록 노력 할 일이지 교회 정치를 불필요한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교회를 신자의 어머니와 같다고 말했는데 무교회주의자는 어머니 없이 자녀를 키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오늘까지 무교회자들 중에 신앙생활을 착실히 한 사람을 찾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퀘이커교회도 교회조직이나 정치를 하면 인간을 신적 위치에 올려놓기 쉽고 신령한 은혜로 함보다 정치적 수완이 앞서게 되고 따라서 신령한 일보다 인간적인 사업이 교회의 사명인 것처럼 되어버리기 때문에 교회는 조직도 정치도 필요 없다고 하여 그들은 단지 공적으로 회집하여 예배하는 것으로 족하게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교회 정치가 실시되어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는 성경의 교훈을 무시하고(마 18:15-17) 영적 은혜에만 치중하기 때문에 교회 질서는 문란하게 되고 신비주의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현대에 와서는 그 중에도 교회 정치제도를 교정하고 조직과 정치를 시행하며 교직자를 두는 교회 수가 증가하는 실정이다.

(2) 국가에 위임하는 교회정치

이것은 에라스티안(Erasdan) 제도라고 불리는 교회정치 형태이다. 본래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 1524-1583)는 국가 만능론(萬能論) 자로서 하이델베르크의 의사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교회도 하나의 단체이기 때문에 국가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교직자들은 복음만 가르치고 교회 정치는 국가에 일임해야 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신령한 단체이니 정치 행위를 직접 취할 수 없고 국가가 해야 된다는 것이다.  

또 국가는 현세적인 것과 신령적인 결핍을 채워 주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조직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순수한 교리의 전파와 성례와 권징을 시행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교회 재정을 후원하고 직원을 임명하고 법규를 정하고 행정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교회를 다스리는 이런 교회정치 제도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함을 입은 성별된 공동체이며 교회의 머리되시며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신비로운 단체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3) 회중 정치

이 교회정치 체제는 각각의 교회마다 회중(會衆)이 독자적인 권위를 가지고 자기들의 교회를 운영하기 때문에 회중 교회 또는 일본에서 번역한 대로 조합교회(組合敎會)라고 불린다. 이들은 또 교회 정치의 독립을 강조하기 때문에 독립정치라고도 일컬어진다.

이 제도에 의하면 교회정치는 개 교회 회원에게 있기 때문에 교직자들은 교회정치나 운영에 대한 일체 권리나 치리권을 갖지 못하고 전적으로 교인들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목사는 왜 세웠는가? 그것은 단지 교인들의 의사(意思)와 결의(決議)를 집행하고 설교를 담당할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 제도는 너무나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처사이다. 성직자들은 회중의 투표에 의해 선택되기 때문에 회중들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성직자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의 사역자로 세우신 것이니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사역자들이기에 목사

사도 치리권도 가지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주장이다.(딤전 5:17)

(4)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 정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敎皇)으로 추대한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 16:17 이하의 말씀에 베드로에게 교회의 열쇠 곧 교황의 권위가 부여되었고 그 권위가 로마의 교황들에게 계승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황이 그의 권좌(ex Cathedra)에서 공식으로 선포하는 말은 그것이 성경 해석이든 교회 행정 사건이든 교리와 예배와 권정에 관한 것이든 무엇이든지 무오(無誤)하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지금까지 교황은 허다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사실은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그들이 초대 교황으로 무오하다고 하는 베드로도 무오하지 못했다.(갈 2:11-14 참고) 

1870년 제1차 바티칸공의회(First Vatican Council)는 교황 무오교리 표준을 종전보다 약간 낮춰 교황 자신이 죄가 없거나 사생활에 과오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교황의 권좌에서 선포되는 것에 한해서 무오하다고 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런 무오한 교황 아래 전제 군주국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 교황 아래는 여러 계급이 있는데 그들은 교황에게 대해 엄중한 책임을 지고 교회를 다스린다. 그리고 평신도는 교회정치에 발언권조차 없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의 절대 권력이 베드로에게 위임되었다고 한 적이 없으며 교황을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인정한 일도 없고 교황에게 그런 권리를 부여한 일도 없다. 절대적 무오는 오직 성경뿐이니 성경 외에 절대 무오란 있을 수 없다.

(5) 감독정

감독정치(監督政治) 제도는 영국 성공회(聖公會, Anglicanism, Episcopal Church)와 감독교회 그리고 감리교 등이 해당 되며 감독만이 교회의 정치를 집행하고 회중은 절대적으로 행정에 상관할 수 없다는 체제이다. 감독은 사도적인 권위를 이어받은 자이며 교회정치를 직접 또는 독점적으로 위임받았다고 한다. 감독은 교회생활 전통의 수호자로서 최종적 정치 결정권을 갖는다. 그리고 감독직의 역사는 최초로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교회 정치를 위임하시고 사도들은 감독들에게 위임하여 계승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감독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로서 감독이 없으면 교회도 없고 감독 없는 교회는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치제도는 성경과 충돌하는 것이 명백하다. 성경은 사도직이 단회적(單回的)이며 영구하지 못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전 15:8) 사도들은 복음적 권위는 전수(傳授)하였으나 사도직은 전수할 수 없었다. 교회는 사도직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위에 세워졌다. 또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을 때는 사도들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공동의회를 열어 의결하였고(행 15:22) 그 첫 번 예루살렘회의 의장은 사도가 아니라 주님의 동생인 야고보였다. 그리고 바울과 베드로는 사도들이었지만 그 회의석상에서는 자기들의 행동과 입장을 변명하고 옹호하는 위치였다.(행 15:7,12, 11:1-18)

(6) 장로정치        

교회의 장로정치(長老政治) 제도는 왕정(王政) 형식의 감독정치도 아니고 모든 권위가 회중에게 있는 회중정치도 아니고 성도들이 선출한 대표자들에 의해 행하는 대의정치(代議政治)이다. 그러므로 장로정치는 교회정치가 어떤 특정인의 단일 수중에 들어가 독재화(獨裁化) 되는 것을 방지하는 한편 회중 일반의 것으로 되는 것도 방지하며 교인들의 대표자인 치리 장로들이 장로들을 포함한 전체 교회의 대표자인 목사와 함께 대의정치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支) 교회의 대의정치 기관인 당회(堂會)는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되고 이렇게 구성된 당회가 교회의 기본적인 권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당회보다 더 넓은 노회(老會)와 대회(大會)와 총회(總會) 등의 확대  회의들이(the major assemblies)있어 소회의에서 해결할 수 없는 사건들을 처리하게 되며 노회, 대회, 총회의 회원들은 목사와 장로의 수를 같게 하므로 교직자와 평신도의 지위가 서로 평등이라는 것을 밝히 보여 준다.

원칙적으로 목사도 장로의 반열(班列)에 들어가는데 치리(治理)와 교훈을 겸하여 맡고 있다는 점에서 치리만 맡은 장로들과 다를 뿐이다. 그러면 이 같은 장로회(長老會) 정치는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가?

이것은 어떤 전통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초대교회가 이런 교회정치 형태를 취한 것을 볼 수 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각 교회의 장로들을 직접 임명하지 않고 각 교회로 하여금 선택하여 세우도록 하였다. 물론 성경에는 당회 이상의 확대회의를 조직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은 없다. 그러나 교회정치의 근본 성격으로 보아 각 교회의 연합과 확대회의 조직을 요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정치 제도 중 장로회 정치제도가 성경원리에 가장 잘 부합되는 제도라 하겠다. 이상에서 말한 장로회 정치원리에 대해 벌코프(Louis Berkhof, 1873-1957)가 말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모든 권위의 원천이시다.
  • 그리스도는 말씀과 성령으로 권위를 행사하신다.
  • 그리스도는 이 권세를 교회에게 주셨다.
  • 그리스도는 이 권세를 직원들에게 특별히 더 주셨다.
  • 교회의 권세는 기본적으로 지(支) 교회에 있다.

2. 교회와 국가

A               B                     C                              D

교회와 국가의 관계 : A 교회 지상주의(로마 가톨릭교회), B 국가 지상주의(에라스티안주의), C 상호 배타주의(재세례파), D 상호분리 및 보완주의(개혁파교회) 

      

교회정치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잘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교회정치와 국가 권세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 지상론(至上論)을 주장하기 때문에 국가는 교회의 한 국면(局面)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 국민이 다 교회 회원이니 세속적 정치 조직은 특별한 종속적인 목적을 가지고 교회로부터 일임 받는 권위를 행사할 뿐이며 교황은 그 최고 권위자로서 종교와 도덕과 권징과 정치에 이르는 전반적인 관할권을 가진다고 한다.

이 같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 지상론과 반대 되는 국가 지상론(至上論)이 있다. 이것은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 1524-1583)가 주장한 것인데 이 주장에 의하면 국가는 국민들의 현세적이며 신령적으로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조직해 주신 단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국가 안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는 교회의 재정을 도와주며 교회의 법규를 제정하며 교회 직원을 임명하고 행정을 감시할 의무를 다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개혁파교회는 교회와 국가는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며 각기 독립 된 조직체로 본다. 즉 교회의 직원이나 회원은 그 국민의 한사람이니 선량한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정당한 의무를 다해야 하며 국가의 공무원들과 국민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회원이 되면 교회의 법규에 순복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이 국가와 교회 교회와 국가는 서로 분리 독립되어 있어 어느 한편의 직원이나 법규를 막론하고 상대방의 영역에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막 12:17)라고 하신 것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分離) 원칙을 밝히신 것이다. 그러나 재세례파처럼 교회와 국가가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한 국가의 국민임과 동시에 교회의 회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가와 교회는 서로 그 영역을 달리 하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일반은혜의 영역을 담당하고 있는 국가를 위해 기도할 것이요, 국가는 교회가 특별은혜 영역에서 그 사명을 다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3. 교회의 직원

교회의 직원은 일반적으로 비상직원(非常職員, Extraordinary Officers)과 통상직원(通常職員)으로 구분한다.

(1) 비상직원

비상직원(非常職員)이란 사도시대의 교회에만 필요했던 직원들을 의미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시작 된 신약교회는 비상시대(非常時代)에 처해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처음에 특별한 인물들을 택하여 이적적(異蹟的) 은사를 주시어 비상한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세 하셨는데 이런 이적적 은사를 받은 사도, 선지자, 전도인 같은 인물들을 가리켜 비상직원이라고 한다.

  (使徒)

사도(使徒, Apostle, ἀπόστολος)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예수님이 택하신 열두 제자들만 생각한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 생각이 옳다. 그러나 바울도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 이 사도들은 온 세계교회의 초석을 놓은 귀중한 직무를 가진 자들이었고 오직 그들의 말씀을 통해 그 후 온 세계교회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갖게 되었으므로 그들은 당대의 사도들인 동시에 모든 시대의 사도들이었다. 이 사도들은 적어도 아래와 같은 특별한 자격을 구비해야 했다.          

  • 그 사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받았고(막 3:14, 눅 6:13, 갈 1:1)
  • 그리스도의 생애 특히 그의 부활의 증인이었고(요 15:27, 행1:21,22, 고전 9:1)
  • 그들의 말이나 글로 한 모든 교훈에 하나님의 영감이 있었고(고전 2:13, 살전 4:8, 요일 5:9-12)
  • 이적과 기사 행하는 권능을 받아 그들의 메시지를 확증했고(행 8:17,18)

= 하나님이 그들이 하는 일에 복 주셔서 그들의 노고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표적을 나타냈다.(고전 9:1,2, 고후 3:2,3, 갈 2:8)

이 같은 사도들은 그 당대(當代)에만 사도의 사명을 수행했고 사도직은 계승한 일이 없다. 사도직은 단회적(單回的)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이 후대에 거짓 사도들과 적(敵) 그리스도와 거짓 선생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한 말씀을 기억하면 더욱 명백해진다.(고후 11:13, 벧후 2:1-4) 그러므로 오늘날 이 같은 1세기의 사도들 외에 또 다른 사도가 있을 수 없다.

  ② 선지자(先知者)

구약시대에 선지자(先知者, prophet, προφήτης)들이 있었던 것 같이 신악 시대에도 선지자들이 있었다.(행 11:27,28, 13:1,2, 15:32, 고전 12:10, 13:2, 14:3, 엡 2:20, 3:5, 4:11, 딤전 4:14, 계 11:6) 그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특별히 말씀의 은사를 받은 자들로서 비밀(祕密)을 계시하며 장래(將來)의 일을 예언(豫言)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이 완성 된 오늘에는 선지자의 존재가 필요 없으므로 이 직분은 폐지되었다. 칼빈은 말하기를 “선지자들은 신적 의지와 모든 해석자들을 의미하지 않고 특별한 계시로 뛰어난 자들을 의미한다. 지금은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지 앉으며 혹은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선지자는 그리스도에게 직접 임명 받지 않은 점과 성경을 기록하지 않은 점에서 사도와 달랐다.  

  ③ 전도자(傳道者)

초대교회에 사도와 선지자 외에 전도인(傳道人)이 있었으며 빌립, 마가, 디모데, 디도가 이 전도인의 반열에 속한다.(행 21:8, 엡 4:11, 딤후 4:5) 그들은 사도들을 수행하여 도왔으며 때로는 사도들에게서 특별한 사명을 받고 파송되기도 했다. 그들의 직무는 전도하고 세례를 베풀고 장로를 장립하며(딛 1:5, 딤전 5:22) 권징을 시행하는 일 이었다.(딛 3:10) 그들의 권위는 좀 더 일반적이며 그 권위는 보통 성역자들 보다 다소 우월하였던  같다. 그러나 그들의 직분은 사도들을 보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도직의 폐지와 함께 폐지되었다.

(2) 통상직원

통상직원通常職員)으로는 세 가지 직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⓵ 장로(長老) 혹은 감독(監督)

장로(長老, πρεσβύτερος, presbuteros)는 연장자를, 감독(監督, ἐπίσκοπος epískopo)은 감독자를 의미하는 명칭이다. 성경은 이 두 명사를 교대로 사용 동일한 직임의 두 가지 명칭임을 암시하고 있다.(행 20:17,28, 딤전 3:1, 4:14, 5:17,19, 딛 1:5,7, 벧전 5:1,2) 그리고 성경에는 이 직임에 대해 다음 몇 가지 다른 명칭도 적용되고 있다. 즉 프로이스타메노이(προϊστάμενοι, 치리자, 롬 12:8, 살전 5:12), 퀴베르네세이스(κυβερνήσεις, 다스리는 것, 고전 12:28), 헤구메노이(ἡγούμενοι, 인도자, 히 13:7,17,24), 포이맨(ποίμην, 목양자, 목자, 엡 4:11) 등이다.

이 직임들은 분명히 자기들에게 위탁(委託) 된 주님의 양 무리를 맡아 지키며 보호하며 치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처음 신약교회에서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들과 함께 장로도 교회 지도자의 반열에 들어 교회정치를 했다.(행 12:23, 20:17, 딤전 5:17,19, 딛1:5, 약 5:14, 벧전 5:1-5)

 목사(牧師)

목사(牧師, pastor)는 교사와 함께 에베소서 4:11에서 발견된다. 그러면 목사는 무엇이며 교사는 무엇인가? 디모데전서 5:17에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는 목사에 대한 언급인 듯하다. 지금의 목사들은 장로들과 함께 교회를 치리하는 일 외에 말씀과 성례의 사역을 행하는데 특별히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담당한다. 그러므로 목사도 장로지만 ‘가르치는 장로’(敎訓長老, teaching elder)로 구별하고 있다.    

목사의 본래 참 뜻은 목자(牧者, 양치기)를 의미한다.(마 9:36, 26:31, 눅 2:8,  요 10:2, 히 13:20, 벧전 2:25)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는 목사를 감독의 별명처럼 보고 감독들 혹은 목사들이라고 했고, 목사의 다른 성경적 칭호들을 열거하기를 목자(렘 3:15, 벧전 5:2-4), 그리스도의 종 혹은 사역자, 신약의 집사(빌 1:1, 고전 4:1, 고후 3:6), 장로(벧전 5:1-3), 교회의 사자(계 2:1), 복음의 사신 혹은 그리스도의 사신(고후 5:20, 엡 6:20), 교사(딛 1:9, 딤전 2:7, 딤후 1:11), 전도인(딤후 4:5), 청지기(눅 12:42, 고전 4:1,2)라고 했다.

이는 모두 목사의 계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목사직의 각양 책임을 가리키는 것뿐이다. 또한 목사를 감독이라 칭해도 성경에 위반될 것이 없다. 사도행전 20:28과 디모데전서 3:1-7에 감독의 자격은 목사에게도 해당되고 디도서 1:5에 명한 바는 목사는 직무에 적합하기 때문에 항상 존속할 직임 중에는 목사보다 더 귀한 직책이 없다.

또한 성경은 목사나 장로를 신부(神父)나 제사장(祭司長)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과 목사직은 자기의 직임을 경솔하게 사퇴할 수 없는 귀한 직분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디모데전서 3:1-7은 감독 즉 목사의 자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책망 또는 비난거리가 없는 자, 한 아내의 남편인 자, 근신하는 자, 잘 가르치는 자, 술을 즐기지 않는 자, 구타하지 않는 자,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자,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 불신자로부터도 좋은 평을 받는 자 등이다.

  ③ (執事)

집사(執事, deacon)란 말은 디아코노이(διάκονοι)라는 말인데 사도행전 6:1-6에 집사 직에 대해 나온다. 이 ‘디아코노이’는 본래 사환, 봉사자, 일꾼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던 명사였는데 신약에서는 긍휼과 자선(慈善) 사역에 주로 봉사하게 되었다.(행 6:1-6, 11:29, 롬 12:7, 고후 8:4, 9:1,12,13) 그리하여 그들은 구제금을 나누어주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을 했고 또 교회의 재정(財政) 관리를 위임받았다. 그리고 사도행전 6:6에 보면 남자들은 안수(按手)하고 집사로 세웠으니 오늘의 장립(안수) 집사이다. 그러므로 이 직분은 장로 직분과 같이 임의로 사면할 수 없는 종신직(終身職)이다.

그러면 여자도 장립 집사로 택하여 세울 수 있는가? 사도시대 교회 중에 여자 집사가 있은 듯하지만(롬 16:1,12, 행 9:36, 딤전 3:11, 5:10) 교회마다 다 여자 집사를 둔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현대는 여권운동이 성행하여 시대사조에 맞추기 위해 어떤 교파에서는 여자 장로 및 목사도 장립하는 일이 있는데 이는 성경의 본뜻을 무시한 것이다.(딤전 2:12) 분명히 여자를 장립하며 장로나 목사로 세운다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집사의 자격에 대해서는 디모데전서 3:8-12을 참고하라.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는 효율적인 교회봉사를 위해 통상직원 외에 전도사, 전도인, 권사, 서리집사와 같은 임시직원 또는 강도사, 목사후보생과 같은 준직원의 제도를 운영하기도 한다.

(3) 교회 직원의 소명과 임직                

계시시대에는 사도와 같은 비상직원들이 직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비상한 방법으로 혹은 이적(異蹟)으로 역사했다. 그러나 교회시대의 통상직원들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소명을 받는다. 이는 주로 두 가지 계단을 경유하게 된다.

  ⓵ 직원의 소명(召命)

  • 내적 소명

교회직원이 되는 이 존귀함과 특권은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된다.(히 5:4) 여기에는 특별히 세 가지가 포함된다. 첫째, 감당할 만한 적당한 은사가 자신에게 있다는 확신 둘째, 성직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의 어떤 특별한 사역에 헌신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 셋째, 그 성직을 향한 길이 열리는 것 등이다.

  • 외적 소명                  

이것은 외적으로 교회의 도움이나 인도를 통해서 오는 소명이다. 이 소명은 교황이나 감독에 의하여 유래하는 것이 아니고 지(支) 교회를 통해 교직자들의 인도를 받고 회중의 투표를 통해 임직함으로 오는 것이다.(행  1:15-26, 6:2-6, 14:23)

  ② 임직식

여기에는 임직될 후보자의 소명과 시취(試取)가 전제된다. 그리고 이것은 노회나 당회의 행위이며(딤전 4:14), 통상 ‘손 얹음’(按手)이 수반된다. 사도시대는 이 안수가 두 가지 의미를 가졌다. 하나는 사람을 구별(區別)하여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의미와 다른 하나는 안수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그에게 부여(附與) 된다는 뜻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두 요소가 아직도 안수에 포함되어있어 안수는 안수 받는 자에게 어떤 영적 은사를 현실적으로 부여한다고 하여 안수를 성례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 이유는 안수가 성직자를 세우는 일에 있어 성경적이기는 하지만 안수가 절대적 본질이라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사도들을 세우실 때 그들에게 안수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개혁파 교회에서는 안수란 단순히 후보자가 그 직분을 위하여 성별된다는 상징적 지시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안수를 주술적(呪術的)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지 않는다.

(4) 교회의 회의들

  ⓵ 개혁파교회의 치리회

개혁파교회 정치는 생각하는 자의 관점에 따라 상향식 혹은 하향식 규모로 된 회의들을 특색으로 가지고 있다. 이 회의들은 당회, 노회, 대회, 총회이다. 당회(堂會, consistory or session)는 지(支)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되고, 노회(老會, Presbytery, classes)는 일정한 지방의 각 지교회의 목사 및 장로로 구성된다. 그리고 대회(大會, Synod)는 각 노회에서 파송된 같은 수의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다. 총회(總會, General Assembly)는 각 노회로부터 파송된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다. 대회에서 파송하는 대표자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② 지교회의 대표 정치와 상대적 자율성

  • 지교회의 대표 정치(the Representative Government)

성경은 교회의 치리(治理)를 개인 자격의 치리나 회중적인 치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회중과 교직이 합하여 교회를 치리함이 성경적이다. 사도시대 교회를 보더라도 사도들이 장로들과 함께 다스렸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장로들을 세워야 되는 원리를 언급했다.(행 11:30, 14:23, 20:17, 고전 12:28, 히 13:7) 그리고 장로 선택은 회중이 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 회중이 장로들을 택한다는 것은 회중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장로들의 자격을 식별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며 회중이 그들에게 권세를 준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중도 교회의 치리에 참가하는 것이다. 개혁파교회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치리 장로들을 회중의 대표로 선택하여 그들과 목사로 하여금 교회의 정치를 위한 당회를 구성하게 한다. 이렇게 구성된 당회는 지(支) 교회의 대의정치(代議政治)의 좌소(座所)이며 당회 이상의 노회, 대회, 총회 치리회들은 당회의 권세를 더 넓은 범위에서 행사하는 확대회의에 불과하다.

  • (支) 교회의 상대적 자율성

개혁파교회 정치는 지(支) 교회 자율성(自律性)을 인정한다. 즉 지(支) 교회는 교회정치에 요구되는 모든 것을 충분히 구비한 완전한 교회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지(支) 교회는 무조건 노회나 총회 등의 확대회의의 억압을 받을 처지에 있지 않다. 물론 인접된 교회들과의 연합이 있을 수도 있고 또한 제한된 분야에서 교회로부터 치리권을 위임 받은 상회가 결정한 일에 순종할 처지에 있기도 하지만 지(支) 교회 자율성을 파괴하는 연합은 있을 수 없으며 노회나 총회가 당회보다 더 높은 권세를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支) 교회의 내정에 함부로 간섭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노회나 총회가 지(支) 교회에 대해 그가 하고자하는 바를 무엇이든지 부과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은 본질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정치의 관념이다.

  ③ 당회의 직권                  

당회(堂會)는 회중의 영적 관리의 유지를 담당한다. 그리하여 회중들의 지식과 행위에 대해 사문(査問)하고 범죄자가 있을 때는 범죄자들과 증인들을 호출하여 사건을 처리하는 일과 교회의 각 기관을 감독하는 일 등의 권리를 가진다.(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 9장 6,7조 참고)

  ⓸ 주요 확대회의

성경에는 한 지방의 지(支) 교회들이 반드시 유기적(有機的) 연합을 결성해야 된다는 분명한 명령이 없으며 또한 그런 연합의 실례가 발견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교회 수가 점점 많아짐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공동적으로 필요한 일 때문에 교회들이 서로 교통을 가지고 연락을 가지게 되었고 교회의 본직을 보아 상회의 존재가 요구된 듯하다.(행 15장 참고)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니 모든 지(支) 교회들이 한 몸과 같이 시로 연합해야 될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확대회의(major assemblies)에는 노회, 대회, 총회가 있는데 세계 개혁파 장로교회들의 여러 실정을 보면 이상 세 회합들을 다 구비한 교회들도 있고 또는 노회, 총회만을 가진 교회와 노회, 대회만을 가진 교회들도 있다.(노회, 대회, 총회에 관한 상세한 연구는 장로교 교회 정치 문답 조례 10장, 11장, 12장을 참고할 것) 그러면 이 노회, 대회, 총회 등의 확대회의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확대회의도 교회 사건들만 관계한다. 즉 성격상 지(支) 교회에 속한 문제이지만 어떤 이유로 지(支) 교회에서 결정할 수 없게 된 난제들과 성격상 총회 관할에 속한 문제들 곧 신조, 신앙고백, 교회헌장, 교회의식인 예배모범과 권징조례 같은 것을 작성하는 일들이 총회가 다루어야 할 문제들이다.(*) 글쓴 이 / 김달생 박사(경남 사천 출생, 건국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총신수학, 대한신학교 졸업, 미국 유니언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미국 캘리포니아 신학대학원 명예 문학박사, 1967년 한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설립, 한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교수 및 대학원장, 미국 남가주 오렌지장로교회 시무, 미국 캘리포니아 신학대학원 이사장, 미국 남가주 교역자협의회 회장)  출처 / 김달생 저 ‘바른신학 : 개혁파 정통신학 개요’(서울, 생명의말씀사) 2010.